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4_0030_0010_0030


3) 고조선의 주민과 예맥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Ⅱ. 고조선 > 1. 고조선의 국가형성


우리 민족의 선조로 중국의 사서에 종종 등장하는 예맥문제에 관해서는 문헌 자체에 대한 고증과 해석의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의견이 개진되어 왔다.166) 이들 예맥으로 나타나는 존재는 우리 민족 형성의 근간이 되었으며 특히 고조선 주민구성의 중심적 존재라는 점에서 관심이 증대되어 왔다. 문헌에 나타나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최초의 지칭어는 ‘濊貊’(예맥)·‘濊’(예)·‘貊’(맥) 등으로서 西周(서주) 초기부터 중국측 문헌에 보인다. 우리 학계에서는 동북아시아 민족이동의 관점에서 고아시아족과 알타이어족의 이동을 염두에 두고, 청동기문화의 주역으로서 예맥족이 신석기문화의 담당주민이었던 고아시아족을 흡수·통합하는 과정이 우리 민족의 형성과정이라고 인식하고 있다.167) 이에 대해 북한학계는 구석기인의 인골분석 등을 통하여 한민족의 체질적 특징은 한반도와 만주의 구석기시대 사람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의 후손이 계속 성장하여 한민족을 출현시켰다고 보고 있다.168) 또한 우리 학계에서도 주민 교체에 의한 문화변천이라는 기왕의 주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169) 한민족의 형성과정에 관한 여러 견해 가운데 한반도 본토기원설에 입각한 단일민족설은 보다 구체적인 자료검토와 보완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기왕의 견해에 대한 일부 비판만으로 새로운 주장을 내세우는 것 역시 아직 미흡하다는 느낌이 든다.170)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예맥이라는 표현이 單稱(단칭)인지 또는 連稱(연칭)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대체로 예와 맥의 연칭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한반도와 요령·길림성 등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으로서 구체적으로 예족은 길림지역의 송화강 및 嫩江(눈강)유역과 한반도 일부에 분포하고 있었으며, 맥족은 산동과 요동 및 한반도에 분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들 예·맥은 이후 고조선·부여·고구려 등의 역사체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 이들 예맥의 분포범위와 존재시기는 고고학상으로 비파형동검문화의 연대 및 범위와 일치하므로 이들 예·맥족이 바로 고조선을 구성한 중심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선진문헌에서부터 濊(예)와 貊(맥)의 표기는 동일음을 취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濊는 穢·薉·獩·蘂(예) 등으로, 貊은 貉(맥)·狢(학)·栢(맥)·沐(맥) 등으로 쓰기도 하였다.171) 예맥에 관한 사료로 선진문헌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다음의 자료이다.


커다란 저 韓(한)의 城(성)은 燕(연)의 백성들이 완성시킨 것.

선조들이 받으셨던 명을 받들어 수많은 오랑캐들을 다스리신다.

왕께서는 韓의 侯(후)에게 追(추)와 貊(맥)을 하사하셨다.

북쪽의 나라들도 모두 다 받아 그 곳의 우두머리가 되셨다.

(≪詩經≫大雅 韓奕篇) /시경 대아 한혁편


이 구절에 보이는 韓은 우리와는 무관한 존재이며 관심의 대상은 追와 貊이다. 추는 ‘되’·‘퇴’의 음을 갖고 있으며 濊의 본음도 ‘회’·‘외’이기 때문에 이는 同音異字(동음이자)로 파악된다.172) 따라서 ‘추’는 곧 ‘예’를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선진시대 문헌에 나타나 있는 표현들173)을 보면 예와 맥은 따로 나뉘어져 언급되고 있다.174) 그러므로≪詩經≫한혁편에 나오는 추와 맥은 바로 예와 맥을 일컫는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같이 예맥은 일찍부터 중국에 알려져 있었는데 이 시기 예맥의 지리적 위치는≪管子≫(관자)에 나타난 사료로 보아 山戎·孤竹·令支(산융,고죽,영지)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桓公(환공)… 북으로 孤竹(고죽)과 山戎(산융)과 濊貊(예맥)에 이르렀다.

(≪管子≫小匡篇) /관자 소광편


이는 예맥이 燕(연)의 동북인 산융의 동쪽에 있었다는 내용으로 예맥의 중심지가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呂氏春秋≫(여씨춘추)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예맥이 ‘北海之東’(북해지동)으로 언급되어 있어 그 위치가 요령지역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같이 예맥에 관한 초기 기록은 예맥이 종족명칭으로서 고조선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비파형동검문화가 분포한 지역의 주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예맥 관련 명칭이 구체적으로 중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漢代(한대) 이후의 문헌이다.


① 북쪽으로는 烏丸(오환)·夫餘(부여)와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穢貉·朝鮮·眞番(예맥,조선,진번)에서 利(이)를 취했다(≪史記≫권 129, 列傳 69, 貨殖). /사기 권129 열전69 화식


② 여러 左方(좌방)의 王將(왕장)들은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上谷(상곡)을 거쳐 곧바로 가면 동으로 穢貊·朝鮮(예맥,조선)과 맞닿는다(≪史記≫권 110, 列傳 50, 匈奴). / 사기 권110 열전50 흉노


③ 彭吳(팽오)가 예맥조선을 물리치고 滄海郡(창해군)을 설치하자 燕(연)과 齊(제)의 사이가 모두 들고 일어났다(≪漢書≫권 24 下, 志 4 下, 食貨). /한서 권24하 지4하 식화


이들 사료에서는 예맥이 夫餘·朝鮮(부여,조선)과 함께 언급되어 있는데 특히 ‘濊貊朝鮮’(예맥조선)이라는 연칭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이전까지의 조선이라는 명칭은 지역적 성격이 강한 표현이었는데, 새로이 등장하는 예맥조선이라는 표현은 종족명칭이 부가되었다는 점에서 ‘예맥족이 사는 조선’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75) 즉 예맥은 기본적으로 고조선을 구성하는 중심 종족으로서 중국의 동북방면에 위치한 조선지역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한대에는 보다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 시기 예맥의 구체적 위치는≪史記≫匈奴列傳(사기 흉노열전)에서 흉노가 東胡(동호)를 멸망시킨 다음 동쪽에서 예맥조선과 접했다고 한 사실을 통하여 흉노와 인접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後漢書≫(후한서)나≪三國志≫(삼국지)등에 나타나는 예맥은 부여와 고구려의 先住種族(선주종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예맥족이 지역적으로 각각 성장하는 과정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가장 초기에 요하유역의 세력이 고조선으로 구체적인 정치체를 형성하였고 이후 지역적 분화를 통하여 부여와 고구려 등의 후속 정치체로 이어졌다고 해석되고 있다.




166) 金庠基,<韓·濊·貊移動考>(≪史海≫1, 1948;≪東方史論叢≫, 서울大 出版部, 1974, 366쪽).

―――,<東夷와 淮夷·西戎에 대하여>(≪東方學志≫1·2, 1954·1955;≪東方史論叢≫서울大 出版部, 1974).

金廷鶴,<韓國民族形成史>(≪韓國文化史大系≫I,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64).

尹武炳,<濊貊考>(≪白山學報≫1, 1966).

三上次男,<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吉川弘文館, 1966).

文崇一,<濊貊民族文化及其史料>(≪中央硏究院 民族學硏究所集刊≫5, 1958).

金貞培,<韓國民族과 濊貊>(앞의 책, 1973).


167) 金貞培, 앞의 책(1973), 5∼45쪽.

―――,<韓民族의 起源과 國家形成의 諸問題>(≪國史館論叢≫1, 1989), 2∼14쪽.

金元龍, 앞의 책(1986), 66∼67쪽.


168)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조선사람의 기원과 인종적 특징>(≪조선전사≫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307∼360쪽.

장우진,≪조선사람의 기원≫(사회과학출판사, 1989).


169) 李鮮馥,<신석기·청동기시대 주민교체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韓國古代史論叢≫1,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1), 41∼66쪽.


170) 金貞培, 앞의 글(1989), 14쪽.

171) 金貞培, 앞의 책(1973), 24쪽.

172) 金庠基, 앞의 책.

173) ≪逸周書≫王會解 “稷愼大塵 穢人前兒 良夷在子.

≪尙書≫권 6 “華夏蠻貊 罔不率俾 恭天成命.

≪詩經≫魯頌篇 “淮類蠻貊”.


174) 金貞培, 앞의 책(1973), 25쪽.

175) 도유호,<예맥조선에 대하여>(≪문화유산≫6, 1962).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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