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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1>후고려기(後高麗記)(24) 
2010/03/20 21:27 광인

고려 멸망 이후, 한반도에 새로이 고려가 들어서기까지 3백년이라는 시간 동안 발해를 제외하고 다른 고려인의 손으로 세운 세습왕조가, 그것도 적국 당조 안에서 무려 4대를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발해로 가는 것마저 거부하고 혹은 발해로 가지 못하고, 당이라는 넓은 땅에 내버려진 고려인들 가운데서 당연히 발군은 이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산동의 넓은 땅을 차지하고 다스리며 60년을 버틴 그의 아들과 손자들. 마찬가지로 당조의 무장이 된 고선지나 연헌성, 심지어 그 이전 수의 백만 대군을 격파한 영양왕과 을지문덕조차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중원정복'의 꿈을 품었던 그들은 어쩌면 당조의 천하에서 영원히 잃어버린 조국 고려를 그리며 살아간 모든 고려인들의 우상이었고 희망이었을는지 모른다.
 
[師道, 師古異母弟. 其母張忠誌女.]
사고는 사도의 이복아우다. 그 어미는 장충지의 딸이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이사도의 외조부인 장충지가 바로 성덕군절도사였던 이보신이다. 이보신이라는 이름은 당조로부터 받은 것이고, 절도사들 사이의 정략결혼에 의해 그 딸은 납왕의 후실로 들어와 이사도를 낳았다.
 
[師道時知密州事.]
사도는 밀주의 일을 맡고 있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사고왕이 죽을 당시 이사도는 밀주자사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고왕이 죽기 얼마 전의 일이고, 사고왕은 자신의 이복아우 이사도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몰랐다. 비록 아버지 납왕의 후광으로 8품 정원관이 되기는 했지만, '적자'인 사고왕과는 달리 '서자' 이사도는 모든 면에서 차별을 받으면서 아무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겪다가 겨우 그 곤궁한 처지가 사고왕에게 알려지면서 밀주자사로 임명된 것이다.
 
[初, 李師古有異母弟曰師道, 常疏斥在外, 不免貧窶. 師古私謂所親曰 "吾非不友於師道也. 吾年十五擁節旄, 自恨不知稼穡之艱難. 況師道復減吾數歲, 吾欲使之知衣食之所自來, 且以州縣之務付之, 計諸公必不察也."]
처음에 이사고에게는 사도(師道)라는 이복 아우가 있었는데 평소 사이가 소원해서[疏斥] 바깥에서 살았으므로 가난을[貧窶] 면하지 못했다. 사고는 스스로 친척이라 하며 말하였다. "나는 사도에게 보탬이 되어주지 못했다. 내가 나이 열다섯에 절모(節旄)를 받았건만 농사의 어려움을[稼穡之艱難] 알지 못한 것이 스스로 한스럽구나. 하물며 사도는 復減吾數歲, 나는 欲使之知衣食之所自來, 且以州縣之務付之하여 計諸公必不察也하라."
《자치통감》권제237, 당기(唐紀)제53,
헌종소문장무대성지신효황제(憲宗昭文章武大聖至神孝皇帝) 상지상(上之上), 원화 원년(806)
 
원래 사고왕에게는 명안(明安)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다. 당조와 한창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 코흘리개 어린애에게 권좌를 물려준다는 건 패망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사고왕은 선대의 여러 중국 황제들이나 연개소문마저도 저질렀던 실수ㅡ자기 직계에게 대권을 물려주고픈 욕심으로 그 능력이나 수준은 가늠해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권좌를 물려주는 오류 따위는 범하지 않았다.
 
[及師古疾篤, 師道時知密州事, 好畫及觱篥. 師古謂判官高沐ㆍ李公度曰 "迨吾之未亂也. 欲有問於子. 我死, 子欲奉誰為帥乎?" 二人相顧未對. 師古曰 "豈非師道乎? 人情誰肯薄骨肉而厚他人, 顧置帥不善, 則非徒敗軍政也. 且覆吾族. 師道為公侯子孫, 不務訓兵理人, 專習小人賤事以為己能, 果堪為帥乎? 幸諸公審圖之." 閏月, 壬戌朔, 師古薨. 沐ㆍ公度秘不發喪, 潛逆師道於密州, 奉以為節度副使.]
사고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을 때, 사도는 밀주의 일을 맡아보면서 그림과 피리에[觱篥] 빠져 있었다. 사고는 판관 고목(高沐)과 이공도(李公度)를 불러 말하였다. "내게 숨기는 것이 있어선 안 되리라. 그대들에게 물을 것이 있다. 내가 죽으면 그대들은 누구를 받들어 수장으로 삼고자 하는가?" 두 사람이 대답하지 않자 이사고가 다시 말했다. "왜 사도라고 말하지 않느냐? 인정으로서 누가 감히 식구에게 야박하고 남에게는 후하단 말이냐. 생각건대 수장의 자리를 내버려둠은[置帥] 옳지 않으니 곧 무리들을 군정(軍政)에 뒤처지게 만들 것이다. 또한 우리 일족에게도 위태로운 일이다. 사도는 공후(公候)의 자손으로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는 힘쓰지 않고 오로지 소인의 천한 짓만 익혀서 이것으로 스스로 능하게 되었다. 과연 수장으로 삼는 것이 옳겠느냐? 제공들은 잘 헤아려 계획을 세워주기 바란다." 윤월 임술 초하루에 사고가 죽으니[薨] 목과 공도는 발상을 비밀에 부친 채 멋대로 사도를 밀주에서 데려와서 절도부사로 받들었다.
《자치통감》 권제237, 당기(唐紀)제53,
헌종소문장무대성지신효황제(憲宗昭文章武大聖至神孝皇帝) 상지상(上之上), 원화 원년(806) 6월
 
《신당서》치청횡해번진열전에서, 일찌기 아우를 밀주자사로 삼으면서 사고왕은 이런 말을 했다. "백성의 괴로움을 바로잡지 못하는 건, 그 핵심이 의식(衣食)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是不更民間疾苦, 要令知衣食所從]." 유언을 남길 때에도 사고왕은 비록 측근 신료들과 함께 후계자를 의논하는 형식을 취했다. 유목민족들의 추장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복아우 이사도를 후계자로 정하는 것 자체는 사고왕 스스로의 결정으로 행한 것이었다. 그것은 왕의 권한. 고목과 이공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자치통감》에서의 이사도는 밀주에서 그림과 피리에나 빠져 지내는 몹시 방탕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고왕이 이사도를 후계로 지목하는 순간의 모습은 《신당서》에서의 기록과는 자못 대조적이다.
 
[師古病, 召親近高沐ㆍ李公度等曰 "即我不諱, 欲以誰嗣?" 二人未對. 師古曰 "豈以人情屬師道邪? 彼不服戎, 以技自尚. 慮覆吾宗, 公等審計之." 及死, 沐ㆍ公度與家奴卒立之, 而請於朝.]
사고가 병이 들자 가까운 신하[親近] 고목ㆍ이공도 등을 불러 말했다.
"여기서 내게 숨김없이 말하라. 누구를 후계로 삼았으면 하느냐?" 두 사람이 대답하지 않자 사고가 말했다. "인간적으로 사도가 낫지 않으냐? 그는 되놈들[戎]한테도 굴하지 않았고 재주도 스스로 닦은 자다. 그에게 내 뒤를 잇게 하리니 공들은 이를 헤아려주기 바라노라." 죽은 뒤 목과 공도는 가노(家奴)들과 함께 그를 세우고 나서 조정에 이것을 알렸다.
《신당서》권제213, 열전제138, 번진열전 치청(淄靑)ㆍ횡해(橫海)
 
이 내용은 원래 《신당서》번진열전에 들어있는 내용인데 <중국 속의 고구려왕국, 제>에서는 《구당서》에 있는 것처럼 적어놨으므로 여기서 밝힌다. 이 자리에는 고목이나 이공도 말고도 곽호와 판관 이문회(李文會)도 함께 있었다.
 
원화 원호를 선포한 헌종은 당조 역사에서는 '중흥지주(中興之主)'로 불린다. 제를 비롯해 지방에서 군림하던 독립절도사들의 힘을 꺾고 다시 한 번, 대당천자로서 천하의 군주가 되려 했던 헌종은 사고왕이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사도왕의 직위 세습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덕종이 초기에 행했던 것과 같은 강경한 조치다.
 
[朝命久未至, 師道謀於將吏. 或欲加兵於四境, 其判官高沐固止之. 乃請進兩稅, 守鹽法, 申官員, 遣判官崔承寵ㆍ孔目官林英, 相繼奏事.]
조명(朝命)이 오래도록 이르지 아니하니 사도는 장리(將吏)들과 이를 의논하였다. 사경(四境)에 병사를 늘리자는 얘기도 있었는데, 그 판관 고목이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이에 양세(兩稅)를 내고 염법(鹽法)을 준수하며 관원(官員) 파견도 받아들일 것을 청하며 판관 최승총(崔承寵)과 공목관(孔目官) 임영(林英)을 보내어 줄기차게 아뢰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다급했던 사도왕도 판관(절도사대행) 최승총과 공목관(재정담당) 벼슬의 임영(林英)을 보내 수차례 아뢰면서, 지금까지 안 바치던 양세도 바치고 염법도 착실하게 지키겠다고 매달리다시피 했는데(사실 제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양세도 염법도 다 '배째' 식으로 안 냈지만) 사실 헌종이 저렇게 뻗디디고 나오는 것에 대해, 제 내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개중에는 아예 제의 변경에 배치된 군사들을 증원시켜 무력대응으로 맞서자고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나가지는 않았다. 판관 고목의 반대 때문이었다.(그는 사도왕에게 있어서는 왕으로 즉위시킨 공신이다)
 
고목의 아버지 고풍은 원래 당조로부터 조주자사로 임명되었지만 당시 정기왕이 다스리고 있던 조주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다하지도 못했고, 고목 본인도 실은 정원 연간에 당조의 진사로 발탁되었던 24명 가운데 하나로 당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지만 어쩌다 집이 운주에 있다보니 운주에서 제의 조정에 나아가 일하게 된 몸. 변경 수비군 증원을 반대한 것도 당조를 의식한 데서 나온 것이었고, 나중에 가면 당조에 '국가 재정을 위해서는 산동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제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발언까지 했다. 결국 그는 나중에 사도왕을 저버리고 당조에 항복하려다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목 일파였던 곽호도 제의 정보를 당에 빼돌리다가 발각되어 복주 감옥에 갇힘)
 
[時杜黃裳作相, 欲乘其未定也. 以計分削之, 憲宗以蜀川方擾, 不能加兵於師道. 元和元年七月, 遂命建王審遙領節度, 授師道檢校左散騎常侍, 兼禦史大夫, 權知鄆州事, 棄淄青節度留後.]
이때 두황상(杜黃裳)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그 안정되지 못한 것을 이용하려 하였다. 계책을 세워 그 힘을 분산시키려 하였는데, 헌종은 촉천(蜀川)에서 일이 터지는 바람에[方擾] 군사를 일으켜 사도를 치지 못했다. 원화 원년(806) 7월에 마침내 명을 내려 건왕(建王) 심(審)에게 멀리서 절도(節度)를 감독시키면서 사도에게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겸 어사대부(禦史大夫)ㆍ권지운주사(權知鄆州事)ㆍ기치청절도유후(棄淄靑節度留後)를 주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당조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재상 두황상을 중심으로 사도왕의 권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것을 틈타 공격하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미처 계획이 입안되기도 전에, 하필 촉천(지금의 사천)에서 유벽이 발호하는 바람에 무위로 끝났다. 7월에 이르러서 당 헌종은 황족인 건왕 이심이 평로치청절도의 감독을 맡는다는 조건하에 사도왕을 검교좌산기상시ㆍ어사대부ㆍ치청절도유후로 임명했다. 주로 제에서 세자가 맡던 '유후'직이었지만 윤6월에 사고왕이 죽었다는 걸 생각하면 7월에 해당관직에 임명된 것은 결코 늦다거나 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저 관직들은 선대 평로치청번진의 절도사, 제의 왕이었던 정기왕과 납왕, 사고왕이 두루 거쳤던 관직들 아닌가.
 
[秋八月, 遣使入唐朝貢.]
가을 8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0, 신라본기10, 애장왕 7년(806)
 
그런데 이들 신라에서 온 사신이 과연 누구의 안내를 받아 장안까지 갔을까? 사도왕의 신하, 제에 소속된 평로치청번진의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정작 평로치청절도의 감독을 맡게 된 '신임' 평로치청절도사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 건왕 이심은 절도사의 직책은커녕, 신라와 발해 두 나라와 제 사이의 교역에 아무런 영향이나 결정권도 가지지 못하고, 궁중에서 맴돌면서 임지로는 아예 부임하지도 못했다. 
 
[憲宗元和元年十月, 加王檢校太尉.]
헌종 원화 원년(806) 10월에 왕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를 더해주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강왕 정력 12년(806)
 
숭린왕이 검교태위가 된 것을 《발해고》에서 10월이라고 말한 것은 《신당서》를 따른 것인듯. 《구당서》에는 9월 병술의 일이라고 했다. 《구당서》를 따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10월에 당조는 사도왕을 검교공부상서ㆍ운주대도독부장사ㆍ평로치청절도부대사에 관내지도영전관찰처치ㆍ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로 삼았지만, 끝내 '절도사'라는 관직만큼은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전이나 그 후, 여전히 산동 지역은 사도왕이 장악하고 있었고, 불안정해보였던 그의 세력은 점차 안정되기 시작한다.
 
[唐憲宗, 放宿衛王子金獻忠歸國, 仍加試秘書監.]
당 헌종(憲宗)이 숙위하던 왕자 김헌충(金獻忠)을 귀국시키면서, 그에게 시비서감(試秘書監)의 관작을 더해 주었다.
《삼국사》 권제10, 신라본기10, 애장왕 7년(806) 11월
 
원래 이 기록은 《삼국사》에서 가을 8월 이전에 있었던 일처럼 그 앞에다 턱 갖다붙여놨지만, 《구당서》에 기록된 바 이것은 11월 경자 초하루 기해에 있었던 일이다. 사도왕에게 관직을 내려주면서, 비슷한 시점에 숭린왕에게 검교태위의 자리를 내려주고 거기서 불과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아서는 신라왕자 김헌충에게 비서감 벼슬까지 줘서 보낸 것은 두 나라 사이에 뭔가 제휴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하고 보면 왜 당조에서 이토록 사도왕의 세습 임명을 늦추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풀린다. 신라와 발해, 두 나라에 대해서 훗날 사도왕을 공격해 제거할 때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ㅡ라고나 할까. 그것을 위한 군사적 연합을 추진하면서 시간을 벌기 위해
사도왕을 달래는 듯한 제스처를 보내고, 신라와 발해에는 나름대로 사신을 보내는.
 
[十二月, 遣使朝唐.]
12월에 사신을 보내어 당에 조공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강왕 정력 12년(806)
 
그리고 한 달 뒤에 발해에서도 당조에 사신을 보냈다.(《책부원귀》의 기록이다.)
 
2년(807)에 발해의 진봉단오사(進奉端午使) 양광신(楊光信)이 동관(潼關)으로 도망쳐 돌아갔는데, 관리가 잡아서 보내자 황궁(皇宮) 안에서 국문(鞫問)하였다.
《책부원귀》
 
정력 12년 즉 태세 정해(807)에 발해에서 단오를 축하하러 갔던 진봉단오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기서 엄청 국문을 당했다. 잘못했으면 벌받는 게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만 뭔 죄를 지었는지 얘기라도 좀 해주지 그때 사람도 아닌 내가 이제 와서 그걸 알아보려고 해도 알 길이 없잖아.
 
<발해제국사>라는 책에 보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단오를 유난히 큰 명절로 생각했던 곳이 북쪽 지방이란다. 그게 고려 때부터 이어져온 풍속이라고 하는데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고, 나중에 발해가 거란족에게 패망당한(926) 뒤에 발해의 풍속이 일부 거란에 전해진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단오 즉 수릿날이라는 건 처음 듣는 재미있는 얘기다. 《요사》에 보면 거란족의 단오 풍속 가운데 외래풍속은 4월 초파일과 5월 5일의 단오인데, 요동의 풍속 가운데 오시에 (오후 2시~4시)에 쑥잎을 따다가 무명옷을 고르고, 군신들은 큰 잔치를 열며 쑥떡을 만들어 먹는데 이때 그걸 만드는 것이 '발해 출신'의 남자 요리사[廚子]란다. (무규의 《연북잡지(燕北雜志)》나오는 얘기다)
 
그리고 합환결(合歡結)이라고 해서 오색실을 팔에 감기도 하고 고운 색실로 인형을 만들어서 머리에 꽂기도 하는데 이걸 '오래 산다'는 뜻에서 장명루(長命縷)라고도 불렀단다. 오색실을 팔에 감는 풍속... 에 대해서는 《동국세시기》에서도 읽은 것 같다. 머리에 색실로 만든 인형을 꽂는다는 풍속은 조선조 《열양세시기》에서 쑥으로 만든 꽃인 '애화(艾花)'를 하사한다는 것이나 쑥으로 만든 범인 '애호(艾虎)'를 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하면 이걸 갈대처럼 나풀거리게 보이려고 범을 비단 조각으로 묶고 다시 쑥잎을 붙여 머리에 꽂았다는 얘기와 비슷한데 다르다. 《동국세시기》나 《열양세시기》같은 건 우리나라 전통 세시풍속을 대부분 중국의 그것과 연관지어서 설명하고 중국에서 그 기원을 찾으려 한 것이라 그 내용을 모두 믿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풍속 자체야 조선조까지 있었겠지만 그게 조선 이전의 고려, 고려 이전의 발해에서 내려온 풍속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들 기록만 갖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발해의 풍속에 대해서는 《구당서》나 《신당서》모두 고려와 거란의 풍속을 닮았다고 했으니, 고려 풍속 이외에도 거란의 풍속도 발해가 많이 본받은 것이 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다. 거란에 유행했던 수릿날의 풍속이 발해에서도 똑같이 유행하던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발해만 그런게 아니라 당조에서도 유목민족의 풍습이 성행했다. 격구나 호복胡服 같은.) 아마 발해와 거란 사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극악스러운 관계는 아니겠지만,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고 태조 왕건도 그걸 이유로 거란을 배척하는 바람에 두 나라의 우호적인 측면은 잊혀진 감이 없지 않다.
 
원화 7년(807) 6월, 치청절도사 이사도가 사묘를 세우면서 죽은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 3대와 함께 형 사고의 신주를 모셨다.
《당회요》백관가묘
 
처음 형이자 선왕인 사고왕의 능침을 조성한 뒤 종묘를 세우고자 헌종에게 글을 올렸을 때, 헌종은 '형에 대한 정이 지극하구나'라고 하면서도 '작위에 맞게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당송8대가(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백낙천. 사도왕이 종묘를 만들겠다고 사신을 보냈을 때, 헌종의 명을 받아 답서를 썼다.>
 
12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책부원귀》
 
당조가 발해와 신라에 책봉사를 보내고 당조의 벼슬을 내린 것은 두 나라가 당조의 제후국임을 공론화시키면서 그들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 순치시키려고 했던 의도가 담겨 있지만, 사실 발해로서는 전조(前朝) 고려처럼 당조의 천하관을 부인하고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당조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를 받아들임으로서 그 속에서 실리를 챙기려고 했다.
 
[遣金力奇入唐朝貢. 力奇上言 “貞元十六年, 詔冊臣故主金俊邕爲新羅王, 母申氏爲大妃, 妻叔氏爲王妃, 冊使韋丹至中路, 聞王薨却廻. 其冊在中書省, 今臣還國, 伏請授臣以歸.” 勑 “金俊邕等冊, 宜令鴻臚寺, 於中書省受領, 至寺宣授與金力奇, 令奉歸國.” 仍賜王叔彦昇及其弟仲恭等門戟, 令本國准例給之.]
김력기(金力奇)를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력기가 아뢰어 말하였다. “정원(貞元) 16년(800)에 조칙으로 신의 죽은 임금[故主] 김준옹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어머니 신(申)씨를 대비(大妃)로 책봉하였으며, 아내 숙(叔)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책사(冊使) 위단(韋丹)이 도중에 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습니다. 그 책봉문서가 중서성(中書省)에 있다 하오니, 지금 제가 귀국하는 길에 저에게 주셔서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여 주십시오.” 황제가 명을 내려 말하였다. “김준옹(金俊邕) 등의 책봉문서를 홍려시에 명하여 중서성에서 받아오게 하고, 홍려시에 이르면 김력기에게 주어 귀국시켜라.” 이어 왕의 숙부 언승(彦昇)과 그 아우 중공(仲恭) 등에게 문극(門戟)을 주되 본국의 예에 따라 주도록 하였다.
《삼국사》권제10, 신라본기10, 애장왕 9년(808)
 
2월에 갔던 신라 사신들은 10월에 귀국했는데, 이때서야 겨우 당조가 소성왕을 책봉한 문서를 받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받아온 형식이 실로 괴이하다. 홍려시에서 중서성에 책봉문서를 수령하기 전까지 그 문서는 신라에 전달되지 못하고 중서성 문서창고 안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책서는 당에서 파견한 사신이 직접 신라에 갖다주는 것이 상례였고, 비록 왕이 죽어서 돌아갔다고 해도 날을 택해서 다시 사신을 파견해 국서를 전달해주는 것이 상식에 맞다. 그런데도 소성왕이 죽은 뒤(800) 애장왕이 국서를 다시 달라고 청할 때까지 무려 8년 동안이나 당조의 책봉문서는 그 주인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신라의 사신이 와서 직접 가져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왜 당조는 소성왕의 사망 사실을 알면서도 8년 동안이나 그 국서를 전달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신라의 사신들은 산동, 제가 차지하고 있는 땅을 경유해 당조로 들어왔고 (신라 사신의 객관이 덩저우에 있었음), 두 나라 사이에 외교와 교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땅을 차지한 제의 협조가 필요했다. 하지만 당조와 제가 서로 대치하게 되면서 당조로서는 신라로 가는 길이 막혀버리게 되었고, 소성왕의 책봉문서도 그에 따라 신라로 가지 못한 채 8년 동안이나 먼지에 덮여있어야 했다. 당조와 신라의 교류가 제의 영토인 산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당조의 사신이 이후 제의 땅을 경유하지 못할 정도로 그 지배권역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元和四年王薨. 正月赴唐.]
원화 4년(809)에 왕이 훙하였다. 정월에 당이 조문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강왕 정력 15년(809)
 
《책부원귀》에는 헌종 원화 4년(809), 정월 무술에 천자가 인덕전(麟德殿)에 임어하여 발해의 사신을 불러 알현하고, 차등 있게 물품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들이 아마 숭린왕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발해에서 온 사신인듯 한데, 발해에서는 당이 중관 벼슬의 원문정(元文政)을 조제와 책립사로 임명해 보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이 정력 15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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