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mahan.wonkwang.ac.kr/nonmun/2008non/12.hwp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TvH9KZ3N-5IJ:mahan.wonkwang.ac.kr/nonmun/2008non/12.hwp+&cd=28&hl=ko&ct=clnk&gl=kr
관련글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원광대  http://tadream.tistory.com/7738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엄윤희"에서 "2. 발해의 외교" 중 "2) 신라와의 외교"만 가져왔습니다.

발해의 외교 : 2) 신라와의 외교

(1) 신라와의 국교 수립

698년 후반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무단강 유역의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우고 진국왕(振國王)을 자처하였다. 이는 국호를 진국(振國)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은 천문령 패배 이후에도 대조영 집단을 토벌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대조영은 건국 직후 곧바로 당과 대립하던 돌궐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한편 최치원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발해가 처음 자칭하였던 진국은 고구려 유민과 물길(勿吉), 즉 말갈로 이루어졌는데, 거란 이진충의 난에 호응하였다가 난이 진압된 후 선회하여 돌궐과 남몰래 공무하였으며 대조영이 처음 도읍을 세웠을 때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대아찬(大阿湌)을 제수받았다.

그런데 이 무렵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 686년과 699년 두 차례만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당 또한 681 · 692 · 693년 세 차례만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양국 관계는 소원하였다. 이는 나당전쟁의 앙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양국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692년 태종 무열왕의 묘호(廟號)를 고치라는 당의 요구를 신라가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해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은 우선 돌궐과 마찬가지로 당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주축을 이룬 발해로서는 당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신라의 동향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신라도 나당전쟁 이후 평안했던 북방에 새롭게 등장한 세력을 간과할 수 없었다. 신라는 대조영에게 대아찬을 제수함으로써 일단 발해를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신라가 699년 2월 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신흥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5)

건국 시조인 고왕 대조영은 도읍지인 동모산 일대를 중심으로 과거 고구려 영역 가운데 요동 지역과 나당전쟁 이후 군사적 완충지대가 된 평양 일대를 제외한 지역, 즉 압록강과 훈장강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특히 발해는 714년 당과 국교가 수립한 이후 대외적 안정 속에서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효소왕을 뒤이은 성덕왕 대에 43번이나 당에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신라가 대당 관계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발해의 세력 남하와 무관치 않았고, 당도 발해를 견제하기 위하여 신라와 관계 개선을 도모하였다. 나당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던 것은 발해의 당장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2) 발해의 세력 남하와 신라의 대응

고왕을 뒤이어 718년 즉위한 무왕 대무예는 동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발해의 동북 방면에는 말갈 부족들이 소규모의 부락 단위로 흩어져 있었다. 무왕이 이들을 정복하며 남쪽으로도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신라도 대당 관계에 적극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721년에는 하슬라도16)지역의 장정 이천명을 동원하여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발해의 세력 확장에 따라 북쪽 흑수말갈과 남쪽의 신라가 당과 밀착하기 시작하자, 무왕은 흑수말갈에 대해서는 직접 토벌에 나섰지만 신라에 대해서는 일본을 통해 견제하였다. 이 무렵 신라와 일본 간에는 외교적 마찰이 있었다. 즉, 721년 일본의 대재부17)는 신라 사신을 본국으로 돌려보냈고, 722년 신라는 모벌군성을 쌓아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발해가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맺은 것은 바로 727년 말이었다. 728년 발해 사신의 귀국 편에 발해에 파견된 일본 사신을 730년 귀환하였는데, 이듬해 일본은 군함 300척을 동원하여 신라의 동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732년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하자, 이듬해 당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의 병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토벌케 하는 한편, 신라도 발해를 공격하게 하는 협공 작전을 구사하였다. 이때 당은 신라 성덕왕에게 종래보다 관직을 승진시키고 영해군사(寧海軍使)를 제수하였다. 신라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지만 발해의 세력 남하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734년 다시 단독으로 발해를 공격하려고 시도하였다.18) 발해에 대한 호전적인 신라의 움직임은 결국 735년 당이 패강(대동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하게끔 하였다. 결국 신라는 발해와 당의 대립을 이용하여 나당전쟁 이후 예성강 이남으로 국한된 국경을 넘어 북방을 개척하였던 것이다. 그 후 748년 이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고 782년에 패강진을 설치하며 신라는 적극적인 경영에 나섰다.19)
  
그러나 발해와 당의 관계가 정상화 되면서 신라와의 긴장 관계도 점차 완화되었다. 발해의 5경 가운데 하나인 동경 용원부의 별명은 책성부 인데, 이곳에서 천정군까지 39驛이 설치되었다. 이것은 발해와 신라의 성설 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를 의미한다. 또한 757년 신라는 동북쪽의 천정군을 강천군으로 개명하고 탄항관문(炭項關門)을 설치하였다. 관문은 내외의 차단과 교섭 창구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긴장 관계가 완화되었을 때는 양국은 39역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하였다.20)
  
764년 당의 사신 한조채는 발해에서 신라도를 통해 신라로 직접 내려갔고, 790년과 812년에 신라가 발해로 파견한 사신도 이 길을 경유하였다. 사료 상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이 두 번이 유일한데, 모두 신라 하대의 정치 불안과 외교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이루어졌다.21)

발해와 신라의 긴장 완화는 발해의 대일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즉, 8세기 중반부터 일본에 파견된 발해의 사신이 무관에서 문관으로 바뀌며 경제적 교류 중심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발해가 일본의 신라 정벌 계획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 것은 이 때문이었다.

발해는 문왕 사후 25년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인해 내분기에 처했지만, 816년 선왕이 즉위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대외적으로 영역을 확장에 나섰다. 신라가 826년 우잠태수(牛岑太守) 감독하에 1만 명을 동원하여 패강에 300리에 걸친 장성을 쌓은 것은 발해의 남하에 대한 대비책이었다.22) 

(3) 신라와의 체제 경쟁

8세기 이후 당 주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당은 고구려 유민이 말갈족을 규합하여 세운 발해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더구나 발해는 돌궐 및 거란과 제휴하며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해 나가며 당과 무력 충돌도 불사하였다. 따라서 당은 신라를 통하여 발해를 견제하였다. 이러한 당의 동방 정책은 당이 남북국, 즉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에게 제수한 책봉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은 신라와 발해를 각각 계림주와 홀한주로 명목상 설정하고 각 국왕들에게 도독을 제수하였다. 그런데 당은 713년 대조용을 책봉하는 형식을 통해 발해와 국교를 수립할 때, 이미 즉위한 지 12년이 지났던 신라의 성덕왕을 새롭게 책봉하면서 사지절(使持節) ·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雞林州諸軍事) · 계림주자사(鷄林州刺史)라는 직함을 새로 추가하였다. 여기에는 일정 지역에 대한 독자적인 군사권을 위임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당은 신라에게 발해를 결제하는 역할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한편 당은 733년 신라에게 발해 공격을 요구하며 성덕왕에게 최고위 문산관인 종1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독자적 군사권을 의미하는 영해군사(寧海軍使)를 추가로 제수하였다. 신라는 이를 명분으로 나당전쟁 이후 양국 간에 군사적 완충 지대로 남아있던 패강 지역에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었고, 결국 이 지역의 영유권을 당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책봉호는 신라 하대까지 계속되었다. 반면 발해의 경우 책봉호에 포함된 관작의 등급은 신라보다 낮았다. 762년 문왕이 ‘발해국왕’으로 진봉(進封)되었을 무렵에는 일시적으로 신라 왕보다 높은 관직을 제수받기도 했지만, 9세기 이후로 발해 왕은 신라 왕보다 낮은 종3품의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와 정3품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가 승진과 강등을 반복하며 제수되었다. 9세기 이후 내분기를 극복하며 해동성국을 구가하던 발해는 점차 쇠약해져가는 신라보다 낮은 처우에 반발하였다.23)

894년 7월 발해의 하정사인 대봉예는 당의 조정에서 신라 사신보다 상석에 앉을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가 당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신라의 사신은 경문왕과 헌강왕의 추증24)을 요청하려고 파견되었지만 아직 진성여왕은 책봉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25) 발해는 이를 빌미로 신라보다 높은 자리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한편 일찍이 당의 빈공과(賓貢科)에서 신라 학생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 발해의 오소도는 906년 빈공과에서 자신의 아들이 신라 학생들보다 처지자 전례를 들어 시정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당은 남북국 양국에 대해 철저한 등거리 외교를 실시함으로써 당 중심의 국제질서를 유지하였다

나당 연합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하는 신라와 고구려 유민이 말갈족을 규합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기본적으로 대립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양국 간의 잠제적인 대립 의식은 발해의 세력 남하로 잠차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당의 요청에 의해 신라가 발해를 공격함으로써 전면화 되었다. 이에 따라 신라는 발해를 점차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물론 신라 지배층인 진골 귀족들에 국한된다. 이후 양국 간의 교류에도 불구하고, 진골 귀족들의 발해에 대한 배타적인 인식은 발해 멸망 이후 한국사가 한반도에 국한되어 전개됨에 따라 한국 중세사회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유득공의 ‘남북국시대론’으로 대표되는 발해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중세사회의 해체기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26)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