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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엄윤희"에서 "1.머리말" 부분과 "4. 맺음말" 그리고 "※ 참고문헌"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나 종 우 교수지도 인문학부 역사학전공 논문 
2007. 원광대학교 인문대학  인문학부 역사학전공 엄윤희 

목차 

1. 머리말 
2. 발해의 외교
    1) 당과의 외교  http://tadream.tistory.com/7689
        (1)당과의 국교수립
        (2)대당관계의 악화와 계선
    2) 신라와의 외교  http://tadream.tistory.com/7690
        (1)신라와의 국교수립
        (2)발해의 세력 남하와 신라의 대응
        (3)신라와의 체제 경쟁
    3) 일본과의 외교  http://tadream.tistory.com/7691
3. 발해의 문화
    1) 건축
        (1)성곽  
        (2)도성 및 궁성 http://tadream.tistory.com/7692
        (3)주거지  
        (4)보편성과 특수성 http://tadream.tistory.com/7693
    2) 조각과 공예  http://tadream.tistory.com/7736
        (1)유형
        (2)연원 
4. 맺음말 
※ 참고문헌


1. 머리말.

고구려와 발해는 고조선 · 부여에 이어 우리 고대 국가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그 동안 사료부족과 현장접근의 어려움으로 인해 한국 고대사에 있어서 공백상태로 남아 있었던 분야이다. 

발해국의 땅은 중국의 동북부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 한반도의 북부에 걸쳐있어 관련국가들 사이에 발해사연구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어 발해사에 관한 연구는 발해사의 귀속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발해국의 멸망에 따른 사료인멸과 신라, 고려의 무관심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발해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중국과 일본의 기록이 발해사 연구의 1차 사료가 되고 있다. 발해국과 그 역사가 처음으로 연구 대상이 된 것은 한민족의 주체적 사관이 정립되던 조선조 실학시대였다. 발해국을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보는 남북한 학자들의 견해도 일찍이 실학자들에 의해 주창된 바 있다.1)

발해사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 한국에 비해 북한과 중국이 한발 앞서 가고 있다. 북한의 경우 발해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어 발해의 유물과 유적을 직접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발해국을 우리 역사발전에 있어 확고한 정통국가로 보는 저들 나름의 사관이 비교적 일찍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에서는 발해가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 학자들은 국내 학자들과는 또 다른 시각으로 발해사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다.

중국의 발해에 대한 공식적은 견해는 당대 속말말갈인이 중국의 동북지역 및 러시아 연해주의 광대한 지역에 건립했던 지방봉건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학자들은 발해사를 중국사의 한 부분으로 다루고 있으며, 발해문화의 원류도 당연히 당의 문화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발해국의 당대사 문헌에만 의존하게 되면 발해국이 중국의 속국인지 자주국인지 가려내기 힘들다. 또한 일본에서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인정하면서도 당의 문화를 수용한 국가로 간주하여 그 문화적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거란 · 여진 시대를 살아온 발해 유민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면 중국의 의도적인 편견과는 달리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국가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들어 난다.2)

고구려가 멸망한 후인 698년,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그 옛 땅에 발해가 건국되면서 북방 지역은 고구려에 이어 계속적으로 한국사의 무대가 되었고, 이로써 남쪽의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신당서』까지 발해의 연호 사용을 사사로이 사용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같은 사료에서 왕이 죽고 난 이후 부여되는 시호 역시도 사사로이 사용되었다고 발해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있다. 발해는 또한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 이었다. 정혜공주묘비와 정효공주묘비에는 두 공주의 아버지인 문왕이 대왕, 성인, 황상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외적으로도 발해는 일본에서 스스로를 ‘말갈국(靺鞨國)’이라 하지 않고, 부여의 유속이 있는 발해국 내지 고구려의 ‘고려국’으로 자칭하였다. 발해는 또한 당나라를 침공할 만큼 자주적 국가 운영을 하였다.3)

발해는 고왕 대조영뿐만 아니라 발해 건국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포함해서 종족적으로 예맥 · 부여 계통의 고구려인이었다. 기록에서 속말말갈(粟末靺鞨), 백산말갈(白山靺鞨) 등으로 불리는 주민들이라고 하여도 이들은 고구려 변방 주민을 그렇게 지칭하였을 뿐이다. 문화적으로도 발해인들은 『고당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구려와 풍속이 같았던 주민들이었으며, 고구려 지배층이 사용하던 석실묘와 석곽묘 같은 고분도 축조하였고 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온돌도 사용하고 있었다.4) 이처럼 발해의 문화를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발해 대외 관계에 대한 연구는 발해사의 다른 연구 분야와 함께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것은 국가 간 교류 내용이 다른 사료보다 보존과 전승의 측면에서 좋은 여건이기 때문이다. 발해는 건국 이후 먼저 신라와 교류를 맺었고, 바다 건너 일본과도 국교를 열었으며, 중국의 당나라와도 초기 대립 관계를 벗어나 평화로운 교섭을 하였다. 이에 발해의 대외관계는 가장 중심이 되었던 세 나라인 당 · 일본 · 통일신라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발해의 외교

    1) 당과의 외교  http://tadream.tistory.com/7689
        (1)당과의 국교수립
        (2)대당관계의 악화와 계선
    2) 신라와의 외교  http://tadream.tistory.com/7690
        (1)신라와의 국교수립
        (2)발해의 세력 남하와 신라의 대응
        (3)신라와의 체제 경쟁
    3) 일본과의 외교  http://tadream.tistory.com/7691

3. 발해의 문화
 
    1) 건축
        (1)성곽  
        (2)도성 및 궁성 http://tadream.tistory.com/7692
        (3)주거지  
        (4)보편성과 특수성 http://tadream.tistory.com/7693
    2) 조각과 공예  http://tadream.tistory.com/7736


4. 맺음말.

지금까지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관한 여러 부분을 살펴보았다. 발해의 외교에 관한 부분에서는 당과 신라, 일본으로 나누어 각 나라별 국교 수립 과정부터 세세한 변천 과정과 변화의 이유 등을 살펴보았으며, 이 과정에서의 발해의 대처 상황 등을 중점 적으로 조사 하였다. 그리고 발해의 문화 부분은 건축, 조각 및 공예, 묘제 부분으로 나누어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문화사적 공통된 부분을 찾음으로써 나타내 보고자 하였다. 또한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해만의 독특하고 발달된 문화를 제시함으로써 잊혀져 가는 발해에 대한 새로운 재조명을 하려고 노력 하였다.

발해국은 698년부터 228년간 지금의 북한 지역과 중국 지린성[吉林城], 헤이룽장성[黑龍江城], 랴오닝성[遼寧省] 일부,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남부에 있던 왕조였다. 대략 45만 km2에서 최대 59만 km2로 고구려보다 1.5배~2배, 신라보다 3~4배 정도로 한국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발해국의 역사가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것은 기전체나 편년체와 같은 체계적은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료상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가 있어왔다. 이는 근대적 역사 연구와 일제의 만주 침략 과정에서 시작된 발해 유적 발굴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발해국의 옛 지역에서 지금의 북한과 중국, 러시아가 현대사를 이어가고 있어 발해사의 민족사적 계승 문제라든지 국경 문제 등이 얽혀 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것도 연구가 더욱 활성화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통일된 다민족국가(統一的多民族國家)’ 이론인 소수 민족 정책과 관련한 발해사의 중국사화 정책은 한국 등에 큰 자극이 되어 연구를 크게 진작시켰다.

한국의 근대적 발해사 연구는 1963년부터 2년간 북한과 중국의 조중공동발굴대가 실시한 고구려와 발해 유적에 대한 공동 발굴에서 본격화되었다. 이후 1996년에 북한 단독으로 보고서가 출간되고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이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다. 남한의 발해사 연구도 북한과 중국의 연구에 자극된 바가 컸다.

현대의 발해사 연구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쳤던 것은 일본의 대륙 침략부터였다. 동기는 순수하지 못하였지만, 1909년 간도협약 이후부터 연구는 미지의 발해사를 상당 부분 복원하는데 기여하였다. 상경 용천부 터를 비롯하여 동경 용원부 지역으로 알려진 팔련성 터나 중경 현덕부 지역으로 알려진 서고성 터가 모두 이때 발굴되었다. 하지만 이는 ‘만주사’의 일환으로 발굴 작업이 진행된 것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는 중국의 요양인 진위푸는 만주 지역사가 아닌 중국사적 입장에서 발해를 비롯한 중국의 ‘동북사’ 연구에 몰두하여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1934년)과 『동북통사(東北通史)』(1941년)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어 학문적인 입장의 발해사 연구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문화대혁명’(1966년~1976년) 이후 개혁 · 개방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의 발해사 연구는 ‘당나라 지방 정권’과 ‘말갈국’ 이라는 입장에서 진행되었다.

러시아의 발해사 연구는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우수리 강(Ussuri R.) 동쪽의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령으로 변하고 부터였다. 1950년대의 발해사 연구 개척기를 지나 러시아 고고학의 한 획기를 이룬 것이 아.뻬. 아끌라드니꼬프와 에.붸. 샤부쿠노프가 1953년에서 1956년에 걸쳐 수행한 답사 작업부터였다. 최초의 발해사 단행본을 1968년에 에.붸. 샤부쿠노프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공동 발굴 성과는 1994년 에.붸. 샤부쿠노프가 책임 편집하고 13명의 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극동의 발해국(698~926년)과 종족들』로 집대성되었다. 연해주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1993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공동 발굴을 통해 더욱 진전을 보고 있다.64)

사료의 부족과 함께 한국의 발해사 연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특히 남한은 발해 지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고고학적 1차 자료에 한계를 갖고 있다. 아직 개인 차원의 본격적인 발해사 개설서가 나오지 못한 것도 이러한 정황에 기인한다.

발해가 건국한 지 1300주년이 넘어 섰다. 발해인들은 220년간 존속하면서 한민족의 역사로 뿌리 내린 우리 민족의 생명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전통 속에서 새로운 문화 창조의 활력을 불어 넣어준, 만주에 성립되었던 우리의 마지막 왕조였다. 따라서 발해국이 남긴 역사와 전통을 재조명하여 한국 고사대에서의 발해의 위치를 분명히 하여야 할 임무가 주어져 있다.

또한 발해의 건국은 7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동북아시아 각국의 다방면에 걸친 상호 교류와 문화 발전의 폭을 심화시켜준 공헌자로써 재인식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과 러시아, 남 · 북한, 그리고 일본의 발해 연구자들 모두가 서로의 주장을 존중하고 겸허하게 비판하는 토론의 장이 필요한 때이다.

발해사 인식은 동북아시아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그 일원인 발해의 역사로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도서 자료
* 김정배·유재신, 『발해국사』,  정음사,  1988.
* 김일성종합대학·박시형, 『발해사』,  이론과실천,  1978.
* 발해사편집실, 『자주독립국발해』,  천자출판,  2000.
* 발해사편집실, 『발해사연구를위하여』,  천자출판,  2000.
* 박학봉, 『발해사연구』,  정음사,  1989.
* 서병국, 『발해국과유민의역사』,  대진대학교출판부,  1997.
* 서병국, 『발해제국사』,  서해문집,  2005.
* 연변대학출판사, 『발해사연구1~3』,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 유득공,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5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4』,  한길사,  1998.
*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발해의유적과유물』,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 최무장, 『발해의기원과문화』,  한국학술정보,  2003.
* 한규철, 『발해의대외관계사』,  신서원,  2005.
* 한규철, 『발해사의종합적고찰』,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00.
* 동북아역사재단, 『발해의역사와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007.
* 서병국, 『발해 발해인』,  일심,  1990,
* 임상선, 『발해사의이해』,  신서원,  1991. 

-논문 자료
* 박진숙, 『발해문왕대의대일본외교』, 충남대학교, 1995.
* 최혁철, 『발해사회구조의성격』,  인하대학교, 1990.
* 조휘진, 『산운장도빈의발해사인식』,  동국대학교, 1993.
* 김은국, 『발해멸망과계안침공에의고찰』,  중앙대학교, 1991.
* 김은국, 『발해의대외관계의전개와성격』,  중앙대학교, 2005.
* 류성우, 『발해문화의고구려적성격』,  부산대학교, 2001.
* 박진숙, 『발해의대일본외교연구』,  충남대학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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