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04237

금관가야, 대가야는 어떻게 흥망했을까
가야왕국의 역사와 유물들
10.01.19 13:42 l 최종 업데이트 10.01.19 13:42 l 김준희(thewho)

가야의 역사는 서기 42년에 시작되서 562년 신라에 흡수되면서 끝난다.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 남쪽 일부를 차지해왔던 것이다. 왕국의 역사가 500년이 넘게 유지되었으니 그 시간 동안 주변에 미친 영향도 그만큼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가야의 전체적인 역사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가야의 대표적인 인물도 고작 시조인 김수로, 악성 우륵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야의 역사를 서술한 사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가야가 통일된 고대왕국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연맹체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점이  그런 것들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관련 박물관도 생겨나고, 방송에서 가야를 다루기도 하면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진 편이다.

가야연맹체를 구성했던 나라들은 고령의 대가야, 김해의 금관가야, 고성의 소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창녕의 비화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상주의 고령가야 등이다. 이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나라는 대가야와 금관가야다. 금관가야는 초기 가야연맹체를 주도했고, 금관가야가 약해진 다음에는 대가야가 후기 가야연맹체의 중심이 된다.

하늘에서 내려온 가야의 왕


▲ 금관가야 김해에 있는 김수로 왕릉 ⓒ 김준희

이 금관가야의 시조가 김수로 왕이다. 나라를 세운 왕에게 여러가지 설화가 있는 것처럼 수로왕에게도 그런 전설이 있다. 오래전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내려왔다.

"하늘이 내게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시므로 여기에 왔으니 너희는 이 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노래하고 춤추어라."

사람들은 자신들을 다스릴 임금이 온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추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

이 노래가 우리가 알고 있는 구지가(龜旨歌)다.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자 곧 하늘에서 줄이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 끝에 있는 함을 열어보니 황금색으로 빛나는 둥근 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알 여섯 개는 모두 여섯 명의 사내아이로 변했고, 열흘이 지나자 9척 장신으로 성장하였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왕을 맞이하며 그달 보름에 즉위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 여섯 명 중의 한 명인 김수로는 금관가야의 초대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명은 다른 가야국의 왕이 되었다. 수로의 한자어는 머리 수(首)에 드러낼 로(露). 노래의 주문처럼 왕이 머리를 드러낸 것이다.

수로왕은 이후에 왕위를 노리고 찾아온 사람과 술법으로 겨뤄서 이기기도 하고, 아유타국의 공주와 국제결혼도 하게 된다. 하지만 초기 금관가야의 형편은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신라와의 잦은 분쟁 때문이었다.

신라는 아무래도 가야에 비해서 대국이었던 만큼 그런 분쟁에서 가야는 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아무리 하늘에서 명을 받고 내려온 왕이라지만 구체적인 군사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수로왕은 158년 동안 금관가야를 다스리고 서기 199년에 죽는다. 수로왕의 탄생과 죽음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있다.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수로왕은 두 가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 그리고 가장 오랜 통치기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 당시에 158세까지 산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구약성서 창세기에 보면 200살이 넘도록 오래 산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오래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있었던 일들이 2천 년전 한반도에서 있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뛰어난 제철기술을 가졌던 가야왕국


▲ 김수로왕릉 참배중인 방문객들. 붉은 관복을 입은 이가 세계거석문화협회 유인학 총재 ⓒ 김준희

수로왕의 무덤은 현재 김해시에 있다. 수로왕이 내려왔던 구지봉에서 조금 남쪽에 위치한다. 사적 47호인 이 무덤은 김해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서 김해시민들이 많이 찾는다.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는 대제가 열리고, 평소에도 참배를 원하는 시민들이 있으면 참배하도록 해준다. 수로왕릉에 절을 할 때는 능의 정면을 향하지 않고 측면으로 숙여서 한다. 왕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금관가야가 초기가야연맹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입지조건과 제철기술 때문이었다. 서해와 남해의 모든 항구와 교통이 가능했기에 중국 및 일본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또한 이 지역에 풍부한 철광자원 때문에 제철기술이 발달해서 금관가야의 철기가 중국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가야를 이야기할 때 철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관가야의 철기유물들은 김해국립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구지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이 박물관의 가야전시실에는 금관가야를 포함해서 대가야, 아라가야, 비화가야 등의 문화전반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가득하다. 당시의 갑옷과 토기, 장신구들과 벽에 붙은 안내문을 따라서 읽다보면 가야역사의 개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 국립김해박물관의 전경 내부에서 가야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 김준희


▲ 가야의 유물 금관가야의 철제 갑옷과 투구 ⓒ 김준희

금관가야의 쇠퇴는 고구려와 연관있다.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원군요청을 받고 군대를 남쪽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신라를 압박하던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공격해서 큰 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는 금관가야에게 직격탄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은 금관가야는 서서히 세력이 약해졌고, 이 틈을 타서 대가야가 후기 가야연맹체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대가야의 시조는 이진아시왕이다. 가야에는 두 가지 건국신화가 전해진다.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가야산신과 하늘신 사이에 태어난 두 형제 가운데 형은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되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쪽 건국신화가 맞건 간에 대가야와 금관가야는 비슷한 시기에 건국되었을 것이다. 대가야도 금관가야처럼 주변의 철광산을 개발해서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고 백제, 중국과 교류를 가졌다.

꾸준히 성장하던 대가야는 서기 400년 이후에 금관가야가 쇠퇴하면서 그 전성기를 열게 된다. 5세기 말에는 중국으로 사신을 보낼 정도가 된다. 전성기때 대가야의 세력권은 동쪽으로 고령, 북쪽으로 무주, 서쪽으로 순창, 남쪽으로는 여수까지 이르렀다. 당시의 한반도는 4국시대라 불러도 좋았을 것이다.

다른 길을 걸었던 두 왕국의 왕자


▲ 대가야박물관 내부에서 대가야의 유물들을 전시한다 ⓒ 김준희


▲ 대가야박물관 대가야의 덩이쇠 ⓒ 김준희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두 나라는 역시 6세기 중반 30년 간격으로 차례로 멸망의 길을 걷는다. 서기 532년, 금관가야의 10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구형왕은 자신의 세 아들을 데리고 신라의 법흥왕을 찾아가서 항복한다. 10대 490년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법흥왕은 스스로 투항한 가야의 왕족에게 진골의 지위를 주고 그들이 살던 곳을 다스리게 한다. 구형왕의 셋째아들 김무력이 김유신의 조부다.

대가야의 운명도 신라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서기 554년, 대가야는 백제와 연합해서 신라를 공격한다. 하지만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에서 패하면서 대가야도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 관산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신라의 장수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자인 김무력이다.

결국 562년, 신라 진흥왕 시절에 이사부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사들에게 대가야는 멸망당하고 만다. 이때 5천의 기병을 이끌고 선봉에 섰던 인물이 화랑 사다함이다. 16명의 왕을 거치며 520년 동안 유지됐던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가야의 역사도 끝난다.

대가야에게도 마지막 왕자가 있었다. 대가야와 신라 사이 결혼동맹의 산물도 태어난 월광태자가 그 인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동맹이란 있을 수 없다. 이 결혼동맹이 529년 신라의 배신으로 끝나면서 월광태자의 운명도 결정된다.

어머니의 나라 신라와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변하자 월광태자는 즉위하지 못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월광태자는 가야산 남쪽에 월광사라는 절을 짓고 불교에 귀의한 후 그곳에 은둔했다고 한다. 신라의 장군으로 승승장구했던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자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대가야의 도읍지는 지금의 경북 고령이었다. 고령에는 대가야의 유물과 문화를 보여주는 대가야박물관과 왕릉전시관, 우륵박물관이 있다. 고령읍 지산리에는 가야지역 최대의 고분인 지산리고분군이 있다. 이 고분군까지 가기 귀찮다면 왕릉전시관을 방문하면 된다. 지산리 44호 고분군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대로 재현해서 전시하고 있다. 입장료는 2천원이지만 한 장의 입장권으로 대가야박물관, 왕릉전시관, 우륵박물관 모두 구경할 수 있다.


▲ 대가야박물관 대가야의 토기들 ⓒ 김준희


▲ 대가야박물관 대가야의 기마병모형 ⓒ 김준희

덧붙이는 글 | 세계거석문화협회에서 주최한 2010 가야역사문화 탐방에 다녀왔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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