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06306

가야 시조 수로왕님께 알현하옵니다!
[가야문화권 답사 06] 김해 수로왕릉
09.08.29 12:04 l 최종 업데이트 09.08.30 09:13 l 송영대(greenyds)
 
구산동고분군에서 내려온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 수로왕릉에 들리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점심 후에 국립김해박물관이나 대성동고분군을 관람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판단해서였다. 수로왕릉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수로왕릉은 김해를 대표하는 가야의 유적지 중 하나로서 가장 중요한 유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사적 제 7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단순히 무덤 하나만 딸랑 있는 게 아닌, 여러 건물들이 같이 있어서 말 그대로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수로왕은 가야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도 제사가 계속 이어졌고,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숭상되었기에 지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으리라. 다른 나라의 시조들의 무덤이 확실치 않은 경우도 있다는 점을 볼 때,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가야 시조의 무덤이 이렇게까지 가꿔져있다는 점은 약간 의아하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수로왕릉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하마비(下馬碑)였다. 하마비가 표시된 구역부터는 말에서부터 내리는 게 조선시대의 법도로, 주로 사찰이나 향교, 혹은 궁궐이나 왕릉 같은 중요한 장소들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수로왕릉 또한 왕릉이기 때문에 하마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수로왕릉의 입구는 크게 보면 2개로서, 숭화문과 숭경문이 그것이다. 현재 숭경문은 폐쇄되어 있고, 숭화문을 통해서만 들락날락 거릴 수 있게 해 놓았다. 그 외에 작은 문들이 있지만 잘 쓰이진 않는다.
 
납릉으로 가는 길목엔 무엇이 있을까?
 

▲ 홍살문과 가락루 입구인 숭화문을 지나면 홍살문과 가락루가 보인다. ⓒ 오은석
 
수로왕이 묻힌 곳, 즉 수릉(首陵)이라고도 불리는 납릉(納陵)으로 가는 길목에는 여러 건물들과 문이 배치되어 있다. 왕릉이기 때문에 일부러 여러 건물들을 두어 격을 높인 것이다. 왕릉에 진입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는데, 입구인 숭화문에서 일직선으로 홍살문, 가락루, 납릉정문, 수로왕릉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좌우로 여러 건물들을 배치하여 제례의식을 치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숭화문에서 입장권을 끊은 뒤, 묘역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바로 홍살문이다. 홍살문은 궁궐이나 향교, 사당, 왕릉 등 신성한 구역의 앞에 설치해 놓는다. 이 홍살문은 신성한 공간으로 진입함에 있어서 경건한 마음으로 출입해야 한다는 의미로 세운 것으로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수로왕릉의 홍살문은 윗부분의 가운데에 이태극의 3지창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 다음으로 보게 되는 것은 가락루(駕洛樓)라는 이름의 누문이다. 언뜻 들으면 중국집 이름 같기도 하지만, 가락은 가야를 의미하며. 이 문은 사실상 수로왕릉의 묘역의 정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관청이나 서원, 궁궐, 사찰 등을 가보면 입구에 누문을 둔 경우를 더러 볼 수 있으며, 이를 둠으로 인하여 더욱더 신성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 숭신각 수로왕릉의 신도비가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 송영대
 
가락문을 지나면 왼편에 숭신각(崇神閣)이 보인다. 숭신각을 신도비각(神道碑閣)이라고도 하며 가락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고종 22년(1885년)에 3칸으로 창건되어 1926년과 1954년의 두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뤄졌으며, 198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면서 보수되었다고 전한다. 신도비라는 것은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두어, 죽은 이나 무덤에 대하여 적어 놓은 비석을 말한다. 즉 숭신각에는 그러한 비를 봉안한 건물이다.
 
반대편에는 시생대와 숭정각이 있다. 시생대(豕牲臺)는 춘추대제 때 제사에 쓸 돼지를 잡는 장소이며, 숭정각(崇禎閣)은 수로왕과 허황후의 영정을 봉안해 놓은 장소이다. 봉안된 영정은 오낭자화백의 작품으로서 1991년에 둘 다 표준영정으로 지정 되었다.
 
수로왕릉, 그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 납릉정문 오른편에 시생대와 납릉정문이 보인다. 가운데가 바로 납릉이다. ⓒ 오은석
 
납릉을 살펴보기에 앞서 납릉정문부터 일단 살펴보자. 납릉의 바로 앞에는 납릉정문(納陵正門)이 있다. 납릉정문은 3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건물로서 입구에서 납릉을 바라볼 때 정면에 있지 않고 오른편에 치우쳐져 있는 게 특징이다. 납릉정문은 납릉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는데, 정작 납릉정문에 새겨진 조각 때문에 후세들에게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쌍어문(雙魚紋)이 그것인데, 이 무늬를 가지고 그 원류를 찾고자 여러 학자들이 의견을 내었다. 이를 가지고 아유타국과 허황옥의 정체를 밝히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 확실하게 정의된 것은 없다. 흔히 쌍어문에서 물고기 사이에 있는 탑의 모습이 파사석탑과 닮았다고 하지만, 정작 파사석탑을 보면 그렇게 닮은 편은 아니다. 공주 마곡사 5층석탑이나 보성 대원사 수미광명탑 같은 라마교에서 보이는 탑과 비슷하다.
 

▲ 수로왕릉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묻혔다고 전한다.(사적 제 73호) ⓒ 오은석
 
납릉정문 너머엔 수로왕이 묻혀있다고 전하는 납릉이 있다. 원형의 봉토분으로서 그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로 거대한 편이다.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 등이 갖추어져 그 격을 높여 놓았다. 하지만 이 납릉이 과연 수로왕의 무덤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릉은 거등왕이 199년에 조성하였으며 당시엔 왕릉 옆에 편방(便房)이라고 하는 작은 건물만 있었다. 이 당시 가야의 무덤은 대개 목곽묘였으며 낮은 봉분을 가지고 있기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보기엔 힘든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하여 현실적으로 발굴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무덤의 형태가 가야시대의 것과는 다르지만 신라시대 문무왕이 수로왕릉에 사당을 세우면서 동시에 봉분을 크게 성토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동시에 당시 신라 왕실의 무덤 양식과 비슷하게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구체적인 확인을 할 수 없으니 어디까지나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 왜 이러한 말들이 나오는 것일까? 이유는 조선시대의 문헌인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수록된 기록 때문이다. <지봉유설>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년에 왜(倭)가 수로왕릉을 도굴하니, 광(壙) 속이 매우 넓었고 두골은 크기가 동분(銅盆)만하며 수족과 경골(脛骨)은 매우 컸다. 관 곁에 두 여자가 있었는데, 얼굴 모습이 살아 있는 것 같으며 나이는 스무 살쯤 되어 보였다. 광 밖으로 내놓자 곧 그 모습이 사라졌다. 아마도 순장(殉葬)된 자들일 것이다.
 
물론 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기엔 무리가 있다. 관 곁의 두 여자가 순장자라고 치면 그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확률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즉 설화적인 이야기이며, 묘광이 크고 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한다. 이러한 형식은 횡혈식석실묘, 즉 굴식돌방무덤에서 널리 보이는 형태인데, 당시 신라 왕실의 묘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로왕릉이 1800년 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 수로왕 영정 가야 시조인 수로왕의 영저이며, 숭정각에 봉안되어 있다. ⓒ 선현의 표준영정

어찌되었든 수로왕릉을 가야 시조인 수로왕의 무덤으로 보는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수로왕릉은 사실 나름대로 여러 사연이 얽힌 무덤이지만, 이를 지키려고 하는 후손들의 노력이 많았기에 지금처럼 우리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금관가야, 즉 가락국이 번영하던 때엔 이곳에 종묘를 세워 크게 제사를 지내곤 하였었다. 하지만 가락국이 멸망당한 뒤에는 얼마간 제사가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가야 세력의 도움을 받은 문무왕이 661년 3월에 조서를 내린 이후부터 다시 수로왕릉에선 관리와 제례가 이뤄지게 된다.
 
당시 문무왕은 자신에게 있어서 수로왕이 15대의 시조가 된다고 하며 남다른 감정을 보인다. 그래서 17대손인 갱세 급간(賡世 級干)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매년 명절마다 제사를 지냈고, 거등왕이 정했던 연중 다섯 날에도 그대로 제사를 지냈다.
 
이후로도 고려와 조선에 와서도 수축과 보수가 이뤄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도굴로 인하여 황폐화되자 인조 24년(1646년)에 수로왕릉과 허황후릉의 능비와 생석(牲石)을 세웠으며, 정조 17년(1793년)에는 경상감사 조시준(趙時俊) 등의 장계를 받아들여 거의 모든 건물들을 새로이 건축하고 전각들을 조성하였다.
 
지금도 이러한 전통들이 그대로 받들어져서 숭선전제례(崇善殿祭禮)가 열린다. 이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있다. 조상의 무덤을 지키고 전통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이러한 소중한 유형, 무형문화재들이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존속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수로왕릉에 갔다온 것을 바탕으로 써 보았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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