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21671

소박하고 온화한 가야인의 심성을 토기에 담다
[가야문화권 답사 10] 국립김해박물관의 가야토기
09.09.22 09:46 l 최종 업데이트 09.09.22 09:46 l 송영대(greenyds)

가야는 문헌기록이 적지만 고고학적 유적이나 유물은 다른 신라나 백제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을 자랑한다. 특히 유물들은 다양하면서도 수량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것은 토기다. 토기는 옛 사람들이 쓰던 그릇이나 항아리 등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다양한 모양의 용기를 여러 방법으로 사용하듯이, 그 당시 사람들도 다양한 종류의 토기를 만들어서 썼다.
 
가야토기는 소박한 모습이 특징인데, 부드러운 곡선이 자아낸 세련미가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신라토기의 경우 직선적이지만, 가야토기는 곡선적이기에 더욱 그러한 느낌이 더해진다. 게다가 가야는 흔히 알려졌듯이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소국마다 다 약간씩 다른 토기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에 비해 다채롭다는 인상을 준다.
 
지역으로는 주로 낙동강을 기준으로 삼아 낙동강 동안을 신라토기, 서안을 가야토기로 본다. 지역 범위를 살펴보면 생각보다 넓은데 가야의 토기들이 경남 서남부권을 넘어 전북이나 전남에서도 보이기도 한다. 교역한 산물로서 백제나 신라, 일본에서도 흔적들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가야토기는 제작방법과 소성상태를 가지고 적갈색연질토기(赤褐色軟質土器)와 회청색도질토기(灰靑色陶質土器)로 나눈다. 시대에 따라서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기도 하며 이 경우 당시 발전과정 및 정치 상황과 연계시켜 이야기하곤 한다. 당시 금관가야나 대가야 등이 있었던 지역을 김해식, 고령식 등 명칭을 붙여 분류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항들이 매우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가야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절대로 빼먹을 수 없는 게 바로 이 토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그럼 국립김해박물관에 진열된 토기들을 중심으로 가야토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연질토기가 적갈색을 띠는 이유는?
 

▲ 그릇받침 적갈색연질토기로서 낮은 온도에서 구워지며 도질토기와 공존하였다. 김해 칠산동에서 출토되었다 ⓒ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토기를 이야기 할 때 흔히 도질토기를 이야기한다. 물론 그 전에도 수많은 토기들이 있었지만, 도질토기부터 가야토기만의 개성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질토기들을 살펴보기 이전에 그 전 토기들을 일단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지역에선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적갈색 민무늬토기와는 다른 회색 계통 경질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는 3세기 말까지 이어진다. 이를 고고학에서는 김해식토기 또는 와질토기라고도 한다. 이들 토기 모양은 각 지역별로 차이가 없고, 거의 비슷해서 진변한(辰弁韓) 공통문화라고도 부른다. 4세기 이후로는 대부분 토기들이 보다 더 단단한 회청색 경질토기로 발전하는데, 4세기 것을 고식 도질토기, 5세기 이후 것을 신식 도질토기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적갈색연질토기의 경우 주로 생활유적인 패총과 주거지, 매장유구 등에서 고루 출토되고,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 생산기술을 계승 발전시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이들은 그늘에 잘 말린 후 노천요에서 700℃~800℃ 낮은 온도에서 구워내는데, 이때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기 때문에 그 색깔이 적갈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소형토기 김해 부원동에서 출토되었으며 연질토기로 만들어졌다. 제사를 위해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국립김해박물관
 
이 적갈색연질토기는 주로 시루나 소형발 등 실생활과 관련된 용기로 많이 제작되었으며, 중대형의 장란형옹은 옹관 등 매장용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기존 민무늬토기에 비해 표면이 매끈하지만 연질이기 때문에 흡수성이 강하다.
 
고령 내곡동 토기가마터에서는 적갈색연질토기가 도질토기와 함께 출토되는데, 비록 제작수법과 소성방식이 다를지라도 같은 가마에서 구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지는데, 초기에는 적갈색연질토기가 많다가 서서히 둘의 양이 비슷해지고, 종래에는 도질토기 양이 늘면서 가야토기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결국 나중에는 도질토기에 밀려 점차 비실용적인 무덤의 껴묻거리(=부장품)로만 쓰인 것으로 보인다.
 
가야토기의 미학, 도질토기에서 찾다
 

▲ 원통모양그릇받침 김해 능동에서 출토된 도질토기다. 연질토기에 비해 높은 온도에서 구워지며 회청색의 색깔을 띠며 다양한 기종들이 있다 ⓒ 국립김해박물관

도질토기는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이 가장 많고 주거지나 패총 등 생활유적에서도 일부 출토된다. 도질토기는 후기와질토기의 전통 위에 새로 전래된 제도기술(製陶技術)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으며 그릇 형태는 테쌓기(輪積法)로 성형하여 타봉(打棒)으로 두드리면서 모양을 잡아간다. 그런 다음 물레를 사용하여 물손질을 하고 표면을 잘 다듬어 문양을 새긴 후 그늘에서 말린다. 등요에서 1000℃~1200℃ 가량 높은 온도로 소성하여 완성한다.
 
등요(登窯)에서 소성(燒成) 할 때 도중에 가마 입구를 막아버리는데, 이로 인하여 산소 공급이 차단된다. 앞서 살펴보았던 적갈색연질토기가 노천요에서 소성함으로서 산소공급이 원활하게 되는 것과 반대되는데, 이렇게 하면 가마 안에서 일산화탄소가스가 발생하며 토기의 바탕흙에 함유된 철분에서 산소를 빼내게 된다. 이러면서 도질토기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회청색 색깔이 나타나는 것이다.
 
때에 따라선 거무스름한 색이 나타나기도 하며, 토기 몸에 재가 쌓여 높은 온도에 녹으면서, 녹청색 또는 녹갈색의 자연유가 되기도 하고 빨간 반점이 생기기도 한다. 자연유(自然油)는 인위적으로 유약을 바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생기는데, 주로 표면을 따라 줄줄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오히려 이러한 모습이 초현대적인 느낌마저 주는데, 이 또한 가야토기의 미학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 네귀항아리 함안 도항리에서 출토되었으며, 토기의 기면에 자연유가 생겨 흘러내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 국립김해박물관
 
도질토기는 가야토기의 주류를 이루며 그만큼 종류도 다양하다. 대표적으로는 고배, 장경호, 단경호, 기대, 소형원저광구호 등이 있으며 또한 사물이나 동물을 형상화한 상형토기(像型土器)도 있다. 가야토기는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야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고배류와 장경호, 발형기대, 통형기대이다.
 
가야토기는 5세기 대가 그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는 가야에 속한 여러 나라들에서 서로 독특하고 다양한 모습의 토기들이 등장하고, 또한 발달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에도 가야토기들이 전래되어 고훈시대(古墳時代)를 대표하는 토기인 쓰에키(須惠器)의 발생과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가야토기의 몰락, 신라토기로 대체
 

▲ 굽다리접시 가야토기를 대표하는 기종으로 낮은 배신에 긴 굽다리가 특징이며, 굽다리엔 투창이 뚫려있다. 김해 능동ㆍ칠산동에서 출토되었다 ⓒ 국립김해박물관
 
하지만 이런 가야토기들도 결국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6세기에 들어서 가야는 신라에 비해 정치적으로 밀리는 상황이 온다. 또한 금관가야를 비롯한 남부의 가야 소국들도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그 세력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신라 세력은 가야지역에 그 발을 디디게 되며, 서서히 신라토기도 그 범위를 넓히게 된다.
 
신라토기 뿐만 아니라 백제토기의 영향도 들어온다. 백제 또한 세력의 확장에 따라 가야에 손을 대게 되는데, 이러한 양상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정치, 문화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야토기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유지했지만, 두 세력의 영향을 마냥 무시 할 수만은 없었다.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고배(高杯), 즉 굽다리접시다. 가야토기를 대표하는 기종 중 하나가 바로 고배인데, 이 고배는 비교적 얕은 배신(杯身) 아래에, 나팔형으로 벌어지는 긴 굽다리(臺却)가 있는데, 이 굽다리에 2단의 투창을 상하 일치되게 뚫어 놓는데 혹은 함안의 불꽃무늬토기처럼 가야 소국들만의 독자적인 장식을 가미하기도 한다.
 

▲ 양산 금조총 출토 굽다리접시 신라토기는 가야토기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굽다리가 짧아지며 투창이 서로 엇갈린다 ⓒ 국립김해박물관

이러던 굽다리접시가 신라 영향을 받으면서 모습이 변하게 된다. 이른바 통일양식(統一樣式) 토기문화로 변화되어 낮은 굽다리접시(短角高杯)가 나타난다. 이 외에도 신라의 영향을 받은 토기들이 다수 등장하며, 혹은 다른 유물이나 유적에서도 신라의 영향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서서히 가야의 색채는 사라지고 신라의 색채로 변하게 된다.
 
고대사를 살펴볼 때 토기의 존재는 단순히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용기의 의미를 넘어, 그 정치적인 의미를 살펴 볼 때 근거자료나 참고자료로 유용하게 쓰인다. 고대의 각국들은 자기 나라만의 독자적인 토기문화가 있었으며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최대한 자신들의 색채를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 상황에서 가야토기는 백제토기나 신라토기 등과는 비교되는 무엇인가가 있다. 전체적으로 일정 부분은 공통된 모습을 보이면서 지역적으로 몇 가지 차이를 둠으로서 개별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김해지역, 고령지역, 함안지역, 고성지역, 창녕지역 등이 대표적으로서, 이를 통하여 당시 세력들이 개별적인 정치체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단순한 그릇이나 쪼가리에 불과한 토기들이지만, 그 내면을 깊이 바라보면 우리에게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덧붙이는 글 |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야토기들을 가지고, 가야 토기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뤄보았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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