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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가련한 고구려 국왕 건무
힘 키운 당나라 고구려 `암운' 그림자 숨 죽인 영류왕
2011. 03. 23   00:00 입력 | 2013. 01. 05   06:38 수정

당 태종의 발목을 잡아왔던 돌궐이 붕괴되자 고구려 영류왕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사신을 바로 당제국에 보냈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구당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고구려왕 건무가 사신을 보내 힐리 칸을 격파한 것을 축하하고 고구려의 지도(봉역도)를 바쳤다.” 고구려 주요 정보들로 가득 채워진 지도가 당나라 조정에 공개됐다.


중국 ‘신간전상당 설인귀과해정료 고사’에 실린 연개소문의 비도대전 그림. 연개소문은 중국의 각종 문학작품에 꾸준히 악역으로 등장할 정도로 중국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강의 돌궐이 붕괴되고 새로운 강자, 당이 등장하는 것을 목도한 고구려 영류왕은 향후에 엄청난 파란이 있을 것을 직감하고 공포에 짓눌렸다. 그의 공포는 이듬해인 631년 고구려의 군인들에게 치욕을 안겨줬다. 

그해 평양에 당나라의 사절단이 도착했다. 사절단장 장손사(長孫師)는 당 태종의 처갓집 사람이었다. 당시 광주도독부(廣州都督府) 사마(司馬)로 재직하던 그는 고구려로 가서 수-고구려 전쟁 때 전사한 수나라 병사들의 뼈를 찾아서 묻고, 고구려의 경관(京觀)을 무너뜨리라는 특명을 받았다. 경관은 고구려가 수나라군의 해골을 쌓아서 만든 전승기념탑이었다. 돌궐을 제압한 당 태종은 중국에 치욕을 주는 그 상징물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장손사가 갖고 온 당 태종의 특명을 영류왕은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중국 군인들의 해골더미를 본 장손사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분노가 치밀었을 것이다. “이 잔인한 고구려놈들! 어떻게 죽은 사람들의 뼈로 이러한 짓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도 느꼈을 것이다. 장손사는 세상의 끝 고구려 땅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그 불쌍한 병사들을 위해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영류왕을 시켜 고구려 장정들로 하여금 그 전승기념탑을 스스로 허물게 했다. 

이 사건은 수나라 군대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고구려 장군 이하 병졸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줬다. 수군과 싸우다 전사한 전우들은 이로써 ‘개죽음’이 됐다. 국왕의 이름으로 사라져간 자들의 희생을 없는 것으로 만들어, 살아남은 자들의 충성을 감퇴시켰다. 

마키아벨리는 ‘정략론’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공감을 자아내는 지적을 하고 있다. “군주는 스스로 권위를 해칠 우려가 있는 타협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설사 그것을 참아낼 자신이 있더라도 말이다.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는 것보다 과감하게 대결하는 편이 낫다. 설령 실패로 끝나더라도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오로지 정면 충돌을 피하고 싶은 일념으로 양보책을 써도 실패는 어차피 회피할 수 없다. 양보를 거듭해 봐야 상대편은 만족하지도 않을 것이고, 비굴해진 군주를 상대방은 더욱 얕잡아 볼 것이고 적의는 오히려 노골화해 더 많이 빼앗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려 없는 양보 책에 의해 드러난 군주의 약점은 자신의 편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마저 실망시켜 냉담하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영류왕 건무는 당과의 전쟁을 피하고 싶은 일념에 사로잡혔다. 건무는 본래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아주 기개가 있고 출중한 무장이었다. 612년 수나라 장군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이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대동강 변에 상륙했을 때였다.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 군대가 몰려갔다. 하지만 세계를 제패한 노련한 수나라 군대였다. 고구려군이 역습을 받고 붕괴됐다. 여기서 평양성을 지켜줄 병력이 현저히 줄었다. 이윽고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에 들이닥쳤다. 거대한 공성기가 조립됐고, 평양성 외성의 문에 공격이 집중됐다.

공성기의 타격으로 성문이 부서졌고, 수군이 성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내호아는 그의 부하들에게 약탈을 허락했다. 장군과 병졸 구분 없이 무제한의 약탈에 가담했다. 재물을 빼앗고 여자를 겁탈했다. 흩어진 수나라의 군대가 기강이 무너져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자. 건무가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나타났다.

건무는 평양성이 함락돼 무너진 상태에서 약탈에 정신이 없는 수나라 군대를 기습했다. 생각지도 못한 역전극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흩어졌던 고구려 군대도 재집결했다. 내호아의 군대는 대파됐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의 배가 있는 곳으로 도망갔다. 통제할 수 없는 군대는 수가 적을수록 좋으며,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문제는 내호아의 배에 육로로 남하한 수나라 육군 30만 명이 먹고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식량과 연장이 실려 있었다는 데 있었다. 평양 부근에 와 있던 수나라 육군에 보급품을 실은 수군(水軍)이 대파됐다는 것은 재앙이었다. 굶고는 싸울 수 없다. 평양성 앞에서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천강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하까지 수나라 군대의 시신이 남겨졌다. 건무의 군사적 성공이 없었다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도 기획에 그쳤을 것이다. 그는 대수전쟁의 최고 영웅이었다. 그 용감하고 현명했던 영류왕 건무가 나이가 들면서 변했다. 그는 육체와 함께 정신도 쇠약해져 있었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결단력이 무뎌져 있었다. 당과 일전을 겨루겠다는 각오는 하기 싫었고 어떻게든 당의 비위를 맞춰 타협하려고 했다. 진정한 현실주의자란 혹독한 현실을 헤쳐가는 자다.

고구려 내부에서도 영류왕은 처벌을 행하는 책임정치를 회피했다. 그것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말았다. 630년대 말 어느 날이었다. 고구려의 동부대인 연태조(淵太祚)가 죽었다. 고구려의 실력자인 그는 잔인한 성격의 아들을 두고 있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다. 연개소문의 동부대인직 승계 여부를 놓고 조정에서 회의가 열렸다.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 불려나갔다. 사람들은 포학한 연개소문을 미워했다. 그에게 수모를 당했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회의석상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반대했다.

연개소문의 동부대인 승계가 불투명해졌다. 그러자 당당하게 폼 잡던 연개소문이 머리를 숙이고 뭇사람들에게 사죄를 했다. 그리고 그 직을 임시로 맡기로 청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약 옳지 못함이 생기면 해임을 당해도 감수하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고구려의 앞날을 책임질 영류왕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가 냉정한 판단을 했다면 연개소문에게 동부대인직이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고, 642년 자신이 연개소문의 손에 죽어 토막 난 시체로 도랑에 버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당과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을 염두에 둔다면 연개소문은 이용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죽은 아버지 연태조를 이어 연씨 집안의 가장(家長)이 된 그는 고구려에서 제일의 재산과 가산조직(家産組織)을 소유한 갑부였다. 그의 가문 내력에 대해 장남 남생(男生)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증조부인 자유(子遊)와 조부인 태조(太祚)는 모두 막리지를 역임하였고, 아버지인 개금(盖金 연개소문)은 태대대로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병사를 잘 길러(良弓良冶) 모두 병권을 잡고 국권을 오로지하였다.” 

그의 자급자족적 가산조직은 하나의 국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방대했다. 그 안에는 거대한 농업 생산조직인 농장과 수공업 생산조직인 공방이 있었고, 전쟁과 토목공사에 당장 동원이 가능한 많은 가노(家奴)를 부양하고 있었다.

가장인 연개소문 없이는 그의 가산조직을 이용하기 쉽지 않았다. 영류왕이 연개소문을 동부대인직에 유임시키고 천리장성 수축이라는 거대한 토목공사의 책임을 맡긴 것은 이 때문이다. 천리장성은 향후 예상되는 최강국 당의 침공을 1차적으로 저지하는 담장이었다. 

연개소문을 살린 것은 영류왕이 아니라 돌궐제국을 무너뜨린 당 태종이었다. 그에 의해 돌궐이 붕괴되지 않았다면 연개소문은 유임되지 않았을 것이고, 642년의 쿠데타로 고구려의 정권을 장악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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