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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삼한·가야의 교통 일본·중국은 물론 먼 나라 인도까지 진출 - 자동차생활" 중 부여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부여의 탄생과 교통
자동차생활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말을 잘 탔던 부여인들은 조직적인 정치와 농경, 목축으로 국력을 키워 고구려가 점령하기까지 만주북부일대를 차지한 강력한 나라로 군림했다. 동서남북으로 도로를 잘 닦고 수레도 폭넓게 이용했다. 삼한과 가야에서는 수상교통이 더 발달했다.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해상교역을 했고, 특히 농업과 철 생산, 철제 수공업 기술이 뛰어났던 가야는 일본과 활발히 교역하며 적극적으로 문물을 전파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부여 벽화의 임금용 수레


부여 귀족 수레


부여 임금의 어차 행차


부여의 탄생과 교통

부여(夫餘)는 고조선의 제후국으로서 예맥족이 세운 고리국(高離國)의 왕자 동명(東明)이 기원전 220년경 만주 북부의 송화강 동쪽에 건국한 나라다. 부여는 고조선 다음으로 국가체제를 갖추었던 나라로서 국토가 비교적 완만하고 평야가 많아 농업이 발달했고 중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해 중국의 선진 문화 유입은 물론 활발한 교역으로 서기 494년 고구려가 흡수할 때까지 매우 부유하게 살았다. 

부여의 건국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옛날 북방에는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이 나라 왕의 시녀가 임신을 했다. 왕이 노해 시녀를 죽이려하자 그녀는 “계란 만한 크기의 기운이 태양으로부터 나에게 떨어지더니 임신이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그 후 시녀가 아들을 낳자 왕은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렸다. 그러자 돼지들이 아이에게 따뜻한 입김을 불어 살려냈다. 왕은 다시 아이를 마구간에다 버렸으나 역시 말들이 따뜻한 입김을 불어 살렸다. 

이에 감복한 왕은 하늘(天帝)의 아들로 생각하고 어미에게 돌려주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지어주고 평생 말을 기르도록 명했다. 동명은 장성하면서 활을 잘 쏘는 등 무예에 뛰어났고, 왕은 나라를 빼앗길까 걱정한 나머지 동명을 죽이려했다. 이를 피해 달아난 동명은 남쪽의 엄수(掩水; 송화강)에 도달해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물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격하던 군대를 퇴치했다. 동명은 곧 엄수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부여를 건국했다.’ 

부여인들은 말을 잘 타는 한민족으로 조직적인 정치와 농경, 목축으로 국력을 키워 고구려가 점령하기까지 만주북부일대를 차지한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부여는 나라를 통치하는 최고계급으로 왕도인 부여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4대가(四大加)가 있어 2천 리에 걸친 방대한 국토를 동, 서, 남, 북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왕을 중심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이들 대가들은 왕도를 중심으로 사방에 설치된 4개의 행정구역인 사출도(四出道)를 각각 맡아 다스렸다. 이런 사출도를 다스리기 위해 왕도를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을 향해 도로를 잘 닦아 수레를 넓게 이용해 교통망이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유사시에는 말을 타고 빨리 각 행정구역으로 달려 제압할 수 있었다. 

농경과 목축이 열국들 중 가장 발달 
농기구 제작 등 수공업 수준도 높아 
 
부여는 농경과 목축이 고조선 붕괴 후 열국들 중에서 가장 발달했고 특히 시조인 동명왕의 목마 육성책으로 명마 산지로도 유명했다. 말의 육성은 바로 전쟁과 교통발달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여는 건국 초기부터 풍부하게 매장된 철과 금, 은, 동을 이용한 철기문화도 농경과 같이 발달해 농기구는 물론 무기, 수레부품을 만드는 수공업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수공업품과 농산물, 철을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에 교역했음을 보아 이를 밑받침하는 교통도 아울러 발달했던 것 같다. 

육지에서는 사출도(四出道) 통치에 의해 각 방면으로 발달된 도로와 수레를 이용, 중국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역했고 일본과는 지금의 블라디보스톡 연안인 동해북부에 접한 국토를 통해 일본 북부연안으로 흐르는 해류를 이용, 배로 쉽게 교역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가 고구려에 흡수된 후 수레의 폭넓은 사용에 대한 역사적 증거들이 많이 발견된 것이나 부여사람이 조공과 민간교역 등으로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육로교통에 수레를 많이 이용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증거로 광개토왕릉비에 부여 왕의 아들인 추모(주몽)가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부여의 엄수를 건너 비류수의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해 고구려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여 왕의 아들인 주몽이 조국인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우기 위해 압록강 쪽으로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과 내려올 때 수레를 탔다면 부여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수레를 승용과 화물 운반용으로 널리 쓰고 있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 만주 길림시에 있는 학고동산에서 발견된 부여시대 토광목곽무덤과 역시 길림시 이수둔서산의 수혈암석 무덤에서 여러 가지 화려한 부장품들 중 수레와 마구용품들이 출토된 것을 보아도 부여의 수레 사용은 보편화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레는 부여뿐만 아니라 부여족의 한 갈래가 함경도 지방으로 흘러가 세웠던 작은 나라인 옥저(沃沮)와 강원도 지방으로 내려가 세운 동예(東濊)에도 전파되어 쓰였다. 이는 두 지역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된 수레 부속품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고증사료나 수레와 관련된 유물이 충분히 발견되지 않아 부여의 교통을 상세하게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부여는 해상교통보다 육로교통이 더 발달했다. 국토가 만주 내륙에 위치해 바다와 광대하게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륙 수로교통 역시 도로와의 연계성 때문에 상당히 발전했다. 부여는 1세기 초에 이미 멀리 중국 남쪽의 후한을 시작으로 그 뒤 위나라와 진나라 등 중국의 여러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육로를 통해 교역을 할 만큼 육로교통이 발전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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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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