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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나무가 어는 추위에 패한 일본
여름옷 차림의 일본군 평안도 강추위에 `항복'
2012. 01. 02   00:00 입력 | 2013. 01. 05   07:32 수정

혼란하기만 했던 일본을 최초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아직도 강성하기만 한 제후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는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허울 아래 1592년 4월 13일 700여 척의 전함에 약 20만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부산에 상륙한 후 파죽지세로 진격한 일본군은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서울에서 대오를 정비한 후 평안도와 함경도의 두 길로 나누어 진격한다.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평양으로 도망친 왕 선조를 추격하기 위해 개성을 거쳐 북서방면으로 진군했고,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피신한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고 동쪽 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함경도로 진격했다.

평양성 전투 그림

동래성전투 그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개전 두 달 만인 6월 16일에는 선조가 압록강변의 의주로 다시 피난했고, 백성마저 모두 도망해버린 텅 빈 평양이 고니시의 일본군 수중으로 들어갔다. 함경도 회령까지 진입한 가토의 일본군은 두 왕자를 포로로 잡고 종성과 경흥을 거쳐 성진 길주 지역에 자리 잡았다.

비록 왕을 사로잡지는 못했지만, 서울과 평양을 점령했고, 왕자 두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한반도 전역을 거의 점령한 일본은 조선이 항복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왕은 항복하지도 않고, 화의 요청에도 응답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에서는 원병을 보내기에 앞서 심유경(沈惟敬)을 일본군에 보내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하면서 시간을 벌자는 계책이었다.

이 사이에 명나라에서는 이여송을 동정군(東征軍) 제독으로 임명해 조선에 출정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강추위가 몰아치는 12월 25일에 5만여 명의 명나라 군사가 압록강의 얼음 위를 건너왔고, 1월 7일 이른 아침에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 공격을 개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군은 거의 저항다운 저항조차 해 보지 않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쟁 초에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그리고 평양과 함경도에서 주둔하던 막강한 일본군이 전투다운 전투조차 하지 못하고 후퇴한 것은 왜였을까? 당시 사대주의에 사로잡혔던 대신들의 말처럼 명나라의 참전 덕분이었을까? 그러나 당시 명나라 군사는 약 5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병력이나 장비 그리고 전쟁 경험 면에서 일본군이 결코 뒤질 것이 없었기에, 명나라 참전이 전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꼬리를 내리고 패주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추위 때문이었다.

일본 장군들은 대체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일본 남부지방 사람들이다. 이 지역의 가장 낮은 겨울기온은 평균 영상 2~4℃로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당시 일본의 전투 관습은 추운 겨울에는 싸우지 않고 쉬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은 겨울철에 평균기온이 영하 10℃에 이르고, 강한 시베리아 고기압이 영향을 줄 때면 영하 30℃까지 떨어진다. 그러니 혹한이 몰아치는 한국의 북부지역까지 진격한 일본군은 추운 날씨에 적응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일본은 속전속결을 예상하고 여름옷 차림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에게 보급라인이 봉쇄당하면서 겨울옷의 지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군에게 명나라의 참전보다는 겨울 추위가 더 무서운 적이었던 것이다.

이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고 한다. 12월에는 추위가 예년에 없이 무섭게 몰아닥쳐서 평안도 지방은 문자 그대로 얼음지옥이었다고 한다. 평양성에서 후퇴하던 일본군 종군 병사의 ‘요시노 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날 밤은 북풍이 무섭게 불고 한기는 살갗을 에며 뼛속까지 스며들어 인간의 지각을 모두 빼앗아 갈 듯했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은 활은커녕 지팡이조차 잡지 못할 정도였고, 막대가 다 된 다리를 몽유병자처럼 질질 끌고 걸어갈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동사라는 확실한 죽음이 큰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록적인 추위 이외에 침공 두 달 만에 거의 전국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음에도 조선이 망하지 않았던 것은 조선 민중들의 끈질긴 항쟁도 한몫했다.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조선군의 창검보다는 청야전(淸野戰)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은 피난 가면서 싸들고 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가지고 갔고, 들판의 곡식까지 깡그리 망쳐놓고 산성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식량 부족은 일본군의 전력을 급속도로 저하시켰거든요. 하느님은 결코 일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을 따라 종군했던 포르투갈 신부 프르와의 말이다.

이처럼 조선 민중은 자신을 희생한 청야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을뿐더러, 또 의병을 일으켜 끈질긴 저항을 함으로써 일본군을 교란시켰다. 무능한 국가지도자들 탓에 7년간 참담한 어려움을 당해야 했던 민중들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겠다는 그들의 소박한 애국심에 하늘이 감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예년보다 억세게 매섭고 추운 날씨로 전쟁을 도운 것을 보면 말이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Tip]이율곡의 예측 리더십-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에 `십만 양병설' 주장에 감탄 

1582년 ‘선조수정실록’에는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서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율곡의 ‘십만 양병설’이 기록돼 있다. 그의 주장 10년 후인 1593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의 주장에 반대한 사람들도 감탄했다고 하는 놀라운 예측력이다.

후에 이율곡 선생의 뛰어난 예측 리더십을 흠모한 사람들이 만들어 전한 전설도 많다. 그 중 하나가 화석정과 관련된 이야기다. 율곡 선생이 화석정에서 명상을 할 때면 늘 아랫사람들에게 기름걸레로 화석정을 닦으라고 지시했다. 의아해하는 하인들에게 ‘다 소용이 있을 것’이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피난을 위해 임진강을 건너려 했으나 너무 어두워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화석정에 불을 지르자 그동안 닦여진 기름이 활활 타올라 무사히 어둠을 뚫고 피난에 성공했다는 전설이다. 이항복이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러 갈 것을 예측해 ‘눈물의 비단주머니’의 지혜를 준 것도 흥미로운 전승이다.

이런 예측력이 공짜로 얻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평소에 부단한 연구와 노력을 한 대가일 것이다. 세상의 흐름을 살피고 분별하다 보면 미래가 보인다고 영웅들은 말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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