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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육상교통 말이 끄는 수레 이용하고 통치·교역을 위한 도로망도 발달

2002-06-12  


고조선 후기 수레의 모양과 종류


고조선의 수레는 고조선 초기보다 후기에 더욱 화려하게 발달했다. 평양 일대의 나무로 만든 귀틀무덤에서 출토된 마면과 말자갈, 자갈받이 등 마가류와 Ω형, 〉형, B형과 두 종류의 삿갓형 수레 부속품들을 보면 후기에 와서는 말 두 필 또는 네 필이 끌 수 있는 외채 수레와 말 한 필 또는 세 필이 끌 수 있는 쌍채 수레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삿갓형 또는 버섯머리형 부품 


청동으로 만든 삿갓 또는 버섯머리 모양의 수레 부속품으로 네 개가 한 세트이다. 그러나 이 네 개의 부속품은 모양이 서로 다른 두 개씩 두 세트로 되어있다. 첫째 삿갓형 부품은 삿갓 밑둥치가 10cm 정도로 짧고 사다리형의 원통에 삿갓 밑부분이 접시처럼 넓게 만들어졌다. 다른 두 개의 한 세트는 삿갓 밑둥치가 15cm 정도의 길고 곧은 원통모양이다. 접시형 삿갓 부품에는 장식이나 무늬가 없고 밑둥치에는 못을 박을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 있다. 밑둥치가 긴 삿갓 부품에는 못 구멍이 없는 대신 둥치 겉면에 볼록 튀어나온 두 개의 띠가 성형, 도금되어 있다. 도금은 당시로서는 매우 놀라운 기술이다.


평양 근방 낙랑의 정백동 무덤에서 나온 긴 밑둥치의 삿갓형 부품은 나무 막대기에 꽂혀 있다. 이 부품의 겉면은 도금이 되어 있고 밑둥치에 두른 띠 아래 윗부분에는 구름과 달리는 짐승이 그려져 있다. 이 두 가지 삿갓형 부품의 용도를 분석한 결과 접시형 삿갓 부품은 멍애대 양쪽 끝에 씌우는 꼭지이고, 긴 밑둥치의 삿갓형 부품은 좌석틀 네 귀퉁이에 세운 기둥 꼭지 씌우개용 장식품임이 밝혀졌다.


형과 파이프형 부속품 


이 두 모양의 수레 부속품은 각각 두 개씩 네 개가 한 세트로 되어 있다. 평양 인근의 태성리 10호 무덤에서 나온 두 개의 >형 부속품은 활 모양의 나무 막대기에 달려 서로 연결되었는데 그 윗부분은 버섯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그 아래로 두 개의 파이프가 달려있는데 여기에는 긴 나무 막대기가 꽂혀 있었다. 이 두 개의 >형과 파이프형 청동품은 좌석틀 가운데 세웠던 일산용 부속품인 것으로 보인다.


B형 부속품 


청동으로 만든 이 B자 모양의 부속품 한쪽 돌기에만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구멍에 말고삐를 걸었다. 정백동 무덤에서 나온 길이 140cm 정도의 멍애대는 수레채와 T자 모양으로 연결되는데, 이 멍애대 중심에는 반달 모양의 완만한 홈이 파여 있다. 이 홈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 멍애대 끝에 B자 모양의 고삐 걸개가 각각 한 개씩 꽂혀 있고, 양쪽 중간 부분에도 구멍이 뚫린 D자 모양의 고삐 걸개가 각각 한 개씩 달려 있어 말 두 필이 끌도록 만든 T자형 외채 수레용 멍애대 부품임을 알 수 있다.

말 2필 견인 외채수레 고삐 배치


Ω형 부속품 


이 부속품은 꺾쇠처럼 모가 난 것과 문고리처럼 둥근 모양 두 가지가 있는데 모두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멍애대에 부착한 말고삐걸개라는 것이 남정리의 채협무덤에서 나온 멍애대에서 확인됐다. 이 멍애대에는 Ω형 말고삐걸개가 두 개밖에 달려있지 않아 말 한 필이 끄는 수레용임을 알 수 있는데, 기원전 1000년 이후에 등장한 말 한 필 또는 세 필이 끄는 Ⅱ모양의 쌍채 수레에 달았던 것이다. 꺾쇠형 말고삐걸개는 쇠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기원전 1000년 후기에 사용한 고삐걸개로 보고 있다.


그런데 B형 고삐걸개는 모두 청동제품으로 고조선 전기의 무덤인 나무상자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초기의 수레용이고, Ω형 고삐걸개는 청동 또는 쇠로 만들어졌으며 후기의 무덤인 귀틀무덤에서만 나왔기 때문에 후기 수레용으로 보고있다.


따라서 기원전 10세기 후기에 와서 B형 말고삐 걸개의 외채 수레와 Ω형 말고삐 걸개의 쌍채 수레 두 종류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외채 수레 다음 쌍채 수레가 나타난 것을 기원전 1세기경으로 보고 있지만,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 고조선에서 철제품이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때 등장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고조선은 승용 수레 외에 화물 운반용으로 짐수레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상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주위에 있던 수많은 작은 나라들(거수국들)과 교역하고 이들의 반란과 침입을 제압하며 정벌하는 과정에서 군량미를 수송하기 위해 짐수레를 많이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이는 기원전 3세기경 서쪽 국경에 인접했던 중국의 연나라가 고조선에서 많은 군량미를 수입해 갈 때 고조선의 수레로 운반했다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 후기의 짐수레 유사품


고조선의 수레 제조기술


외채와 쌍채 수레는 말고삐 걸개와 채의 모양만 달랐을 뿐 바퀴나 차체 또는 좌석의 구조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즉 바퀴 두 개가 달린 차축 위에 네모난 좌석틀이 얹혀졌으며 밑의 차축에 직각으로 고정된 T자 모양의 긴 채가 앞으로 뻗은 구조였다. 그러니까 고조선 초기인 기원전 10세기 전반 만주 일대에서 쓰던 수레와 후반 들어 평양 일대에서 사용하던 수레는 구조에서 큰 차이가 없지만 후기의 수레는 전기보다 끄는 말의 수가 많았고 철제 부속품을 많이 써서 튼튼한데다가 사치스러운 형태로 발전했던 것이다.


바퀴와 바퀴 통 


평안도 주의리에 있는 이탄층에서 출토된 나무바퀴와 채협무덤에서 나온 모형 수레의 바퀴를 보면 바퀴 통, 바퀴 살과 바퀴 태로 구성되었고, 땅과 닿는 둥근 바퀴 태는 4∼5개의 반달형 나무 태 조각을 이어 만든 다음 마모되지 않도록 태 표면에 질긴 가죽을 씌웠던 것 같다. 여러 개의 바퀴 태 조각들을 어떤 방법으로 연결, 고정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복원해보면 직경 1.6m에 바퀴 살이 24개 정도인 상당히 큰 나무바퀴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후기 수레바퀴 유사품


평양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10세기 후반의 고조선 무덤에서 나온 수레 부속품들 중에는 바퀴 통에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쇠판 고리들이 있다. 이것은 바퀴 통과 바퀴축의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바퀴 통 가운데 있는 축 구멍 양쪽에 박았던 것이다.


역학적으로 만든 바퀴 통 구조


평안남도 황주군에 있는 상동무덤에서는 바퀴 통 가운데 뚫린 축 구멍의 양쪽 끝에 끼워 마모를 방지했던 갈모고리가 나왔고, 역시 같은 황주군 금석리에서는 갈모고리가 빠지지 않도록 바퀴 통 외부에 끼우는 Ω형 둥근 쇠고리인 조임쇠가 발견됐다.


무덤에서 나온 각종 수레 부속품


굴대


차축에 끼워 회전하는 바퀴 통 구멍 내부의 마모를 막는 일종의 부싱(bushing) 역할을 하는 것이 굴대이다. 굴대는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썩어 없어져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굴대를 바퀴 통에 고정시켰던 청동제 부속품들이 출토되어 굴대를 사용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굴대 부속품으로는 자리 쇠, 굴대마구리 쇠, 굴대마구리 씌우개 등이 발견됐다. 자리쇠는 갈모와 굴대끝 마구리가 바퀴의 좌우로 쏠림에 의해 생기는 마모를 막기 위해 두 부속사이에 끼우는 고리쇠다. 원통형인 굴대마구리 쇠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바퀴 축에서 마구리 쇠가 빠지지 않도록 비장쇠인 못을 박을 수 있게 구멍이 뚫려있다. 굴대 마구리 씌우개 역시 청동 또는 쇠로 만들었고 한쪽이 막힌 원통으로 마구리 끝을 보호하는 덮게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부속품들을 보면 상당히 역학적으로 바퀴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평안남도 남포시에 있는 태성리 10호 무덤에서 나온 굴대마구리 쇠 씌우개 끝에는 방울까지 달려 있어 후기 수레가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좌석 틀 


바퀴 축 위에 고정해 사람이 앉는 차체인 좌석틀은 나무로 만들었고 의자를 지지하는 네 개의 나무기둥 윗부분에 장식용으로 씌웠던 쇠파이프도 발견됐다. 나무틀 좌석은 오랜 세월 동안 썩어 없어지고 청동으로 만든 파이프만 남았는데, 윗부분은 버섯머리 모양으로 생겼고 파이프 표면에는 띠처럼 생긴 도드라진 줄무늬 두 개가 뱀 감듯이 새겨져 있다. 이 청동 파이프가 좌석 장식용임은 다른 출토물을 통해 증명되었다. 평양 인근 정백동의 고조선 무덤에서 직경 4∼5cm 가량의 나무기둥이 박혀 있는 똑같은 파이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일산 


강한 햇빛과 비를 막아주는 양산인 일산은 대와 살 그리고 비단 천으로 만들었고 장식품으로 청동제 대꼭지와 살꼭지를 씌웠다. 평양 부근의 정백동 무덤들 중에 남자와 여자 무덤에서 모두 5세트의 일산 유물이 발굴됐다. 이 중에서 거의 완벽한 일산대의 길이는 205cm에 직이 3cm이고 대의 상단부 옆면에는 30여 개의 구멍이 살을 끼울 수 있도록 뚫려있었다. 일산살의 길이는 125cm에 직경이 1.5cm로서, 완전히 폈을 때 일산의 직경은 260cm로 매우 큰 수레용이다. 수레 좌석틀 바닥 중앙의 나무에 구멍을 뚫고 끼워 세운 다음 고정시켰다.


이처럼 부분적인 유물로 남아 알 수 있는 기원전 10세기 후반 고조선의 승용 수레들은 상류층 귀족들이 탔던 것들로서 초기의 수레와 모양은 비슷하지만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튼튼하고 화려하게 발전해갔다.


채와 멍애대 


채나 멍애대는 나무로 만들어져 유물로 남지 못했지만 고조선 초기의 무덤인 와룡천 무덤에서 나온 청동 모조품과 남산근(평양근방) 102호 무덤에서 발견된 뼈에 그려진 그림으로 알 수 있다. 외 수레채는 T형으로 멍에대와 결합 고정시켰고 멍에대 좌우에는 각각 두 개의 고삐걸개가 달려있어 좌우에 한 필씩 두 필의 말이 끌도록 되어 있다.


왼쪽 말의 자갈에 맨 고삐는 왼쪽 멍애대 끝의 B형 고삐걸개 구멍을 통하여 마부의 왼손에, 오른쪽 고삐는 왼쪽 멍애대 오른쪽 고삐걸개의 구멍을 통해 마부의 오른손에 쥐도록 했다. 오른쪽 말의 자갈에 맨 두 개의 고삐 역시 왼쪽 말처럼 오른쪽 멍애대에 달려있는 두 개의 고삐걸개를 통해 하나는 마부의 왼손에, 나머지 하나는 오른손에 쥐도록 되어있다.


이와 또 다른 방식의 고삐걸개가 그림과 청동모조품에서 발견됐다. 왼쪽 말의 오른쪽 고삐는 오른쪽 멍애대의 왼쪽 고삐걸개를 통했고, 오른쪽 말의 왼쪽 고삐는 왼쪽 멍애대의 오른쪽 고삐걸개를 통해 마부에 연결됐다. 왼쪽 말의 오른쪽 고삐와 오른쪽 말의 왼쪽 고삐가 X 모양으로 엇갈려 마부가 쥐는 형식이다.


어느 방법이나 마부가 왼손에 쥔 고삐를 당기면 두 필의 말이 동시에 왼쪽으로, 오른손의 고삐를 당기면 오른쪽으로 달리도록 되어 있어 말몰이가 매우 기술적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BC 1000년대 후기의 평양지역에서 쓰인 수레는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서 쌍채수레 역시 차체의 기본구조나 형식은 외채 수레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후기에 나온 쌍채 수레는 철제부속이 늘어나고 부속들의 모양이 다른 정도다. 그러나 말을 매우는 수레 채가 외채와 달라 수레채와 멍에대의 결합방식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Ⅱ형으로 결합된 쌍채 수레는 두 개의 수레체 사이에 한 필의 말을 매우거나 좌우에 한 필씩 덧붙여 세 필이 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상 고조선의 수레제조방법을 보면 상당히 발달된 수공업기술로 수레의 차체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목재를 깎아 정밀하게 맞추었고 각종 청동, 철제 부속품으로 조립했음을 알 수 있다. 수레 한 채를 만드는데는 금속제 부품 10여 종 수십 개가 들었고 그밖에 비단, 가죽, 옻 등의 자재가 필요했다. 고조선의 수레 제조기술은 목공, 금속가공, 방직, 옻칠 등 여러 가지 수공업을 함께 발달시켰던 것이다.


수레의 사용과 고조선의 도로


고조선시대의 수레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은 그럭저럭 발견 됐지만 이런 수레를 타고 다닌 도로에 대한 기록 또는 유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 발달상을 상세히 알 수 없다. 따라서 고조선의 통치방법, 전쟁, 교역, 지리조건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전부를 차지한 넓은 영토에 많은 거수국(제후국)을 거느린 종주국이었다. 최고 통치자인 단군은 하늘의 신을 대신하는 신권통치로 거수국들을 다스렸지만 직접통치하지 않고 거수국의 우두머리인 거수들을 통해 간접통치를 했다. 고조선의 거수국들 분포를 보면 추·맥·예·진번·발·숙신·양이·양주·유·청구·고구려·고죽·옥저·부여·낙랑·현도 등으로 대다수가 요하 서쪽지역에 있었고 단군의 통치 중심지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머지 진·시라·비류·행인·개마·구다·조나·주나·한 등은 요하 동부로부터 한반도에 걸쳐 있었다. 단군은 이들 넓게 퍼져있는 수많은 거수국들을 강한 군사력과 종교, 혈연으로 통치했다.


단군이 있는 중앙과 거수국들은 상비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거수국들의 상비군은 변방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고, 중앙의 상비군은 외적을 방어하고 정벌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거사국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변방에 침입한 외적이나 거수국들의 반란을 즉시 진압하기 위해 전차와 수레를 동원했고 이를 사용하느라 도로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722년에 건국한 중국의 연나라는 고조선의 서쪽국경과 접하여 교역과 왕래가 빈번했다. 중국의 고대서인 전국책(戰國策)의 연책(燕策)에 보면 연나라는 군사 수십만 명과 전차 700대, 말 6천 필에 10년을 버틸 수 있는 군량미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수시로 고조선을 침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3세기 초에는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범했다가 격퇴 당한 적이 있다. 이 전쟁에 연나라는 많은 군사와 함께 전차로 고조선을 침범했다는데, 고조선에 도로가 없었다면 전차를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나라는 자국내 농산물만으로는 10년간 버틸 군량미를 확보할 수 없었음이 한서(漢書)의 지리지(地理志)에 나타나 있다. 전국시대 연나라 영토였던 상곡군(上谷郡)과 요동군에 이르는 땅은 넓으나 사람이 드물어 여러 차례 오랑캐의 침입을 받았다는 기록을 보면 연나라에는 농사지을 사람이 적어 농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10년 버틸 정도의 군량미는 농업이 발달된 이웃 고조선에서 들여왔다. 이때 많은 양의 곡물을 운반하기 위해 수레를 썼다는 것이다. 이 역시 도로가 발달하지 못했다면 수레 수송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단군의 도읍지와 많은 거수국들이 모여있던 서쪽 요하유역과 동쪽의 거수국들이 위치했던 송화강유역은 평지가 넓게 깔려있어 지형적으로도 도로를 만들기 쉬운 조건이었다. 여러 거수국들과 단군의 왕도 사이에 통치권 수행이나 경제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서 도로가 개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의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수레부품과 마구류부품들을 보아 평화시에는 귀족들의 교통수단으로, 전시에는 전차로 수레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수레를 쓰기 위해서라도 전 국토에 도로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레의 동력으로 소와 말을 이용하다


고조선의 수레는 바퀴의 직경이 1.6m 되는 비교적 큰 수레였기 때문에 사람이 끌기에는 힘이 부쳤다. 고조선은 초기부터 농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경작에 동물의 힘을 이용한 나라였다. 따라서 목축업도 같이 발달해 가축을 많이 길렀다. 그 중에서 소와 말을 수레견인용 동력으로 썼음을 초기의 여러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남산근 102호 무덤에서 출토된 짐승의 뼈에는 수레와 말이 그려져 있다.


평양의 입석리 유적에서는 12종류의 동물 뼈 35마리 분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두 마리 분의 소뼈가 있고, 정가계자의 무덤에서는 소뼈와 함께 네 마리 분의 마구도 출토되어 당시 수레를 끄는데 소나 말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주로 수레를 끄는데 쓰고 소는 논이나 밭을 가는데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에서 출토된 수레용 마구류가 대부분 말에 쓰는 부속품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조선 사람들이 소로 수레를 끌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유물이나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고조선의 뒤를 이은 고구려시대의 벽화나 무덤 벽에 소가 수레를 끄는 그림이 있는 것을 보면 고조선에서도 소가 수레를 끌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말은 길들이고 다루기가 까다롭지만 소는 순해서 길들이기가 쉬워 말보다 소를 먼저 수레의 동력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소는 느리지만 끄는 힘이 세서 화물운반용 짐수레를 끄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말 4필 견인 수레의 유물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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