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4>후고려기(後高麗記)(27)
2010/05/03 00:27  광인

발해 희왕 주작 3년. 간지로는 태세 을미(815) 정월. 어수선한 당조의 상황 속에 발해의 사신 묘정수(卯貞壽)가 장안에 도착했다.

[十年春正月癸酉朔. 乙酉, 宣武軍節度使韓弘守司徒, 平章事並如故. 丙申, 嚴綬帥師次蔡州界. 己亥, 制削奪吳元濟在身官爵. 庚子, 桂管奏移富州治於故城.]
10년(815) 봄 정월 계유 초하루 을유(13일)에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 한홍(韓弘)에게 사도(司徒)를 내리고 평장사(平章事)는 모두 전과 같았다. 병신(24일)에 엄수(嚴綬)가 군사를 거느리고[帥師] 채주(蔡州) 경계에서 싸웠다. 기해(27일)에 오원제(吳元濟)의 몸에 지닌 관직을 깎아 없앴다. 경자(28일)에 계관(桂管)이 아뢰어 부주(富州)의 치소를 고성(故城)으로 옮겼다.
《구당서》헌종본기
 
《책부원귀》에 보면 원화 10년에 해당하는 서력 815년, 발해의 사신 묘정수 등은 당조에서 받은 관고(官告)를 가지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기록에는 제대로 나와있지 않지만 관고라는 것의 성격과 묘정수 등이 본국으로 바로 귀환한 것을 볼 때, 여차하면 안록산의 난 때에 그랬던 것처럼 발해에게 군사를 요청할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사도왕의 힘이 한창 뻗치던 이 무렵, 당조는 발해에서 오는 사신에게 꼭 관고를 주어 보냈다.
 
[二月癸卯朔. 甲辰, 嚴綬軍爲賊所襲, 敗於磁丘, 退守唐州.]
2월 계묘 초하루 갑진(2일)에 엄수의 군이 적을 습격했지만 자구(磁丘)에서 패하고 물러나 당주(唐州)를 지켰다.
《구당서》 헌종본기 원화 10년(815) 정월
 
자구에서 엄수의 군사를 패배시킨 오원제는 곧장 정주를 함락시키고, 낙양 부근까지 진격했다. 정주는 낙양과는 직선거리로 110여 km 떨어진 거리인데, 정주뿐 아니라 낙양에서 70여 km 떨어져 있는 여주까지도 오원제는 공격해 들어갔다. 《구당서》이사도열전에는 이때의 일을 가리켜 "오원제가 북쪽으로 여주와 정주를 침공하여 교기(郊畿, 수도 주변)가 많이 소란스러웠고 방어병은 모두 이궐(伊闕)을 지키고 있었다 [因吳元濟北犯汝ㆍ鄭, 郊畿多警, 防禦兵盡戍伊闕.]"고 적고 있다. 이궐은 낙양 남쪽의 요충지로 낙양 공략을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甲辰, 李光顏又奏破淮西兵於南頓. 吳元濟遣使求救於恆ㆍ鄆. 王承宗、李師道數上表請赦元濟,上不從。是時發諸道兵討元濟而不及淄青,師道使大將將二千人趣壽春,聲言助官軍討元濟,實欲為元濟之援也。]
갑진(2일)에 이광안(李光顏)이 다시 회서의 군사를 남둔(南頓)에서 깨뜨렸다고 보고했다. 오원제가 사신을 긍(恆)ㆍ운(鄆)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승종과 이사도는 여러 번 표문을 올려 원제를 구할 것을 청했지만 상은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여러 도(道)의 병사들를 내어 원제를 토벌하는데 치청(淄青)은 빠져 있었다. 사도는 대장(大將)을 시켜 2천 인을 거느리고 수춘(壽春)으로 가게 했다. 입으로는 관군을 도와 원제를 토벌한다고 하면서 실은 원제를 도우려 한 것이다.
《자치통감》권제239, 당기(唐紀)제55,
헌종소문장무대지지신효황제(憲宗昭文章武大至至神孝皇帝) 중지상(中之上), 원화 10년(815) 2월
 
815년경부터 독립절도사들에 대한 당조의 토벌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양세법을 비롯한 개혁운동 덕분에 악화되었던 경제상황은 호전되고 국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서 당조는 자신감을 갖고 독립절도사들에 대한 압박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회서절도사 오원제의 반란 때 여러 절도사들의 군대를 끌어들이고 임시특별부대인 회서행영도통(淮西行營都統)을 조직하면서도, 사도왕에게만은 끝내 병사파병을 요청하지 않았다. 당조에게 오원제와 이사도는 똑같은 '반역자'였다.
 
수춘은 채주보다 영주보다 가까운 지역으로 운주에서 보면 동남쪽으로 엄청 먼 거리다. 이곳까지 군사를 보내어 당의 시선을 분산시키면서 소수 병사들로 하여금 하남부 하음창을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음은 훗날 밝혀진다.
 
2월 갑자(22일)에 발해의 사신 대여경(大呂慶) 등에게 관고를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책부원귀》
 
사신 대여경에 의해 당조의 어수선한 상황은 모두 보고되었다. 《구당서》에 기록된 바, 예부상서 이강(李絳)이 화주(華州)의 동관(潼關)을 지키는 방어진군등사(防禦鎭軍等使)가 되었다는 것, 하동의 방추장(防秋將) 유보(劉輔)가 풍주자사(豊州刺史) 연중간(燕重旰)을 죽였다는 것, 그리고 우림장군(羽林將軍) 이휘(李彙)가 당조로부터 경원절도사로 임명되었다는 것도. 이 달에 흑수말갈의 추장 11명도 와서 조공했다.
 
3월 병자(5일)에 발해의 사신에게 관고를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책부원귀》
 
원화 10년 3월의 초하루는 임신이니까 병자면 5일이다. 이 해에 일본으로 갔던 왕효렴의 사신단이 일본 관료들과 시 주고받으면서 희희낙낙 하고 있는 동안에 당조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벌'. 폭발 직전이었다. 오원제의 난은 아직 진압되지 않았고, 그 군사들은 낙양을 압박하고 있었다.
 
[師道使賊燒河陰倉,斷建陵橋.]
사도는 휘하 병사에게 하음창(河陰倉)을 불사르고 건릉교(建陵橋)를 끊게 했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사도왕은 이때를 전후해 낙양 하음창에 불을 질러버렸다. 그 시점은 《구당서》본기에서 3월조에 "신해(16일)에 도둑이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에 불질렀다[辛亥, 盜焚河陰轉運院]"고 했는데 오행지에서는 "원화 10년(815) 4월에 불이 났다."고 해서 한 달 정도 차이가 있다. 3월이라고 하면 일본에 가있던 발해 사신 왕효렴이 귀국하기 엿새 전의 일이다.
 
[師道素養刺客奸人數十人. 厚資給之. 其徒說師道曰 "用兵所急, 莫先糧儲. 今河陰院積江ㆍ淮租賦, 請潛往焚之. 募東都惡少年數百, 劫都市, 焚宮闕, 則朝廷未暇討蔡, 先自救腹心. 此亦救蔡一奇也." 師道從之. 自是所在盜賊竊發. 辛亥暮, 盜數十人攻河陰轉運院, 殺傷十餘人, 燒錢帛三十餘萬緡匹, 谷二萬餘斛, 於是人情恇懼.]
사도는 평소 양성한 자객과 건달[奸人]이 수십 인이었는데 이들을 후하게 먹이고 챙겼다. 그 무리들이 사도에게 말하였다. "용병(用兵)하는데 가장 급선무는 식량을 쌓아두는 일입니다. 지금 하음원(河陰院)에 강(江)ㆍ회(淮)의 조부(租賦)가 쌓여있으니 몰래 잠입해 불을 지르십시오. 동도(東都)에 모여있는 불량소년들[惡少年] 수백 명이 도시를 약탈하고 궁궐을 불사르면, 조정은 곧 채주를 토벌할 겨를이 없이 복심(腹心)부터 먼저 구하려 할 것입니다. 이 또한 채주를 구하는 한 가지 방법이올시다." 사도는 이를 따랐다. 이에 소재한 도적들이 절발(竊發)하였다. 신해일(16일) 밤에 도적 수십 인이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을 공격해 10여 인을 살상하고 수십 명을 죽인 뒤에 불을 지르니 30여만 꿰미나 되는 돈과 30여만 필의 비단이 불에 탔고, 3만 곡 가량의 곡식은 잿더미로 변했다. 이에 인심이 크게 놀랐다.
《자치통감》권제239, 당기(唐紀)제55,
헌종소문장무대지지신효황제(憲宗昭文章武大至至神孝皇帝) 중지상(中之上), 원화 10년(815) 2월
 
《자치통감》에 하음전운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하음창은 당조 각지에서 올라온, 장안과 낙양으로 보낼 물품들을 보관하는 창고이자, 낙양의 식량이 비축된 기지였다. 사도왕은 이때 낙양의 군사들이 모두 이궐에 가있다는 것, "방원병(防院兵) 5백 인은 현남에 진치고 있다[防院兵五百人營於縣南]"는 정보를 모두 낙양 안에서 얻었다. 낙양에 두고 있던 그의 진주원(進奏院) 말이다.
 
[初, 師道置留邸於河南府. 兵諜雜以往來, 吏不敢辨.]
사도는 하남부에 저택을 갖고 있었다. 사도의 부하들이 군사기밀을 염탐하기 위해 수시로 오갔지만 관리들은 알지 못했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구당서》에는 그냥 하남부의 저택이라고만 했지만 《신당서》는 그 저택을 가리켜 '진주원'이라고 똑똑히 명시했다. 진주원은 각지의 절도사들이 수도에 두고서 부임지의 역소와 중앙관청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던, 일종의 지방연락소와 비슷한 곳인데 절도사들은 모두 수도 창안에 이 진주원을 갖고 있었다. 일본 학자 이시다 미키노스케의 <장안의 봄>에 보면 장안 남문의 서쪽에 동주ㆍ화주ㆍ하중ㆍ하양ㆍ양주ㆍ서주ㆍ위주ㆍ경원ㆍ영무ㆍ하주ㆍ소의ㆍ절서ㆍ절동ㆍ용주 등 절도사들의 진주원이 모여 있었는데, 《당서》에서는 이것을 '저(邸)'라고 기록했다. 절도사 관직의 별명인 '저장(邸將)'이나 천자의 제칙 및 정부포고를 번진에 속보하는 것을 '저보(邸報)', '저초(邸○)'라 부르는 것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장안에는 북쪽의 숭인방 및 남쪽의 선양방까지 합쳐서 약 서른 곳 가량의 경저(京邸)가 있었는데, 유독 사도왕의 진주원은 장안이 아닌 낙양에만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미치는 번진은 장안에, 그렇지 못하고 절도사가 독자권력을 행사하는 번진은 낙양에 진주원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 <중국 속의 고구려 왕국, 제>의 설명이다.
 
《구당서》는 하음전운원의 소실에 대해 "무릇 채백(錢帛)이 불탄 것이 20만 관필(貫匹)에 쌀은 2만 4천 8백 석, 창실(倉室)은 55칸이었다 [凡燒錢帛二十萬貫匹、米二萬四千八百石、倉室五十五間]."고 했다.
 
[群臣多請罷兵, 上不許.]
군신들이 여러 번 군사를 보낼 것을 청했지만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자치통감》권제239, 당기(唐紀)제55,
헌종소문장무대지지신효황제(憲宗昭文章武大至至神孝皇帝) 중지상(中之上), 원화 10년(815)
 
《자치통감》의 설명대로라면 사도왕이 하음전운원에 '테러'를 한 건 당군이 채주를 치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낙양을 차지하자는 것. 내지는 당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목적으로 벌어진, 병법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후방치기' 전법이었다.
 

<당 시대 뤄양의 도읍조방도.>
 
비록 장안과 마찬가지로 '수도'의 지위를 갖고는 있었지만 낙양은 장안에 비하면 도시의 규모와 번화함, 기녀의 수준도 차이가 큰 도시였다. 그럼에도 장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역사적, 문화적 정통성을 지닌 곳 또한 이 낙양이다.
 
장안과 낙양. 두 곳 모두 옛날 한조의 수도였다. 장안은 서한의 수도였고 낙양은 동한의 수도. (고대에는 동한도 서한의 연장선으로 생각해 똑같이 '한'이라고 불렀다.) 특히나 낙양이라고 하면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위에 있었던 천자국 '동주(東周)'. 공자께서 그토록 그리던 이상향이었다. 서주 시대부터 비롯된 중국 고대 문화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곳. 상투적으로 말하는 '마음의 고향' 같은 것이다.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권 안에서는 그러한 '상징', '명분'의 영향이 현실적인 '힘'만큼이나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때로는 그것이 국가 발전에 발목을 잡는 수도 있다.) 안록산이 장안을 차지하지 못하고서도 당조를 향해 당당히 황제를 일컬을 수 있었던 이유도 낙양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정신의 고향'을 손에 넣었다는 뜻이니까. 자기가 태어난 집이라는 것만으로도 애착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고 귀소본능이다.
 
헌종은 사도왕의 하음전운원 '테러'가 채주에 가있는 진압군을 빼오려는 계획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도왕도 오원제도 모두 당조의 입장에서 토벌해야 하는 반란군이었지만, '이사도보다는 오원제가 먼저'란 계산은 낙양을 거의 사도왕의 손에 내버리다시피한 헌종의 도박이었다. 낙양을 차지한 사도왕이 제를 당조와 같은 '정식'국가로 선포하면서(안록산이 그랬던 것처럼) 전국을 흔들어놓는 사태는 헌종이나 다른 절도사들도 바라는 것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師道潛以兵數十百人內其邸, 謀焚宮闕而肆殺掠. 既烹牛饗眾矣, 明日將出, 會有小將楊進ㆍ李再興者詣留守呂元膺告變.]
사도는 수십에서 수백의 병사를 그 저택 안에 숨겨놓고서 궐을 불지르고 약탈할 것을 모의하였다. 드디어 소를 잡아 잔치를 벌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이튿날 출병하려 하였는데, 소장(小將) 양진(楊進)과 이재흥(李再興)이란 자가 유수(留守) 여원응(呂元膺)에게 사도의 음모를 고변하였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자칫 정말 사도왕이 점령할 뻔한 낙양을 지켜낸 것은 낙양의 유수였던 여원응이다. 아니 정확히는 사도왕의 소장이었던 양진과 이재흥이란 배신자들이라고 해야겠지.
 
[元膺追伊闕兵圍之, 半日不敢進攻. 防禦判官王茂元殺一人而後進, 或有毀其墉而入者. 賊眾突出殺人, 圍兵奔駭, 賊得結伍中衢, 內其妻子於囊橐中, 以甲胄殿而行, 防禦兵不敢追.]
원응은 이궐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들을 거느리고 달려와서 그들을 포위하였으나 반나절 동안 감히 앞으로 나아가 공격하지 못했다. 방어판관(防禦判官) 왕무원(王茂元)이 한 명 불러다 죽이고 나서야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그 담을 허물고 들어가는 자도 있었다. 적의 무리가 갑자기 뛰쳐나와 관군을 죽이니 포위한 군사들이 놀라 도망갔다. 적은 넓은 대로에서 다시 대열을 정비한 뒤 처자를 큰 휘장 안에 감추고 갑주를 쓴 병사들이 에워싼 채 앞으로 나아갔다. 방어병들은 이들을 감히 추격하지 못했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구당서》에 보면 낙양에서 여원응의 군사들이 사도왕의 치청 군사들과 맞서 싸우는 동안 현남에 주둔하고 있었던 방원병 5백 명도 나와 싸우지 못했던 모양이다. 기록에는 여원응이 '그 장수를 불러다 처형했다[呂元膺召其將殺 之]'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도왕의 군사들이 유유히 대로를 걸어 낙양을 빠져나가는 데도 멀뚱멀뚱 지켜볼 뿐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니.... 말 그대로 '당나라 부대'. 아무튼 하음전운원 소실에, 건릉교까지 부서지면서 낙양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낙양뿐 아니라, 장안까지 극심한 물자부족으로 혼란을 겪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낙양의 민심이 동요하여 점점 흉흉한 소문만 나돌았다.
 
[元衡宅在靜安裏. 十年六月三日, 將朝, 出裏東門, 有暗中叱使滅燭者, 導騎訶之, 賊射之, 中肩. 又有匿樹陰突出者, 以棓擊元衡左股. 其徒馭已爲賊所格奔逸, 賊乃持元衡馬, 東南行十餘步害之, 批其顱骨懷去. 及眾呼偕至, 持火照之, 見元衡已踣於血中. 即元衡宅東北隅墻之外. 時夜漏未盡, 陌上多朝騎及行人, 鋪卒連呼十餘里, 皆云賊殺宰相.]
원형의 집은 정안리(靜安裏)에 있었다. 10년(815) 6월 3일에 입궐하려고 리의 동문을 나오는데, 어둠 속에서 불을 끄라는 소리가 들려 도기(導騎)가 꾸짖자, 적이 그것을 쏘아 어깨를 맞혔다. 그리고 나무 뒤에 숨어있던 사람이 튀어나와 몽둥이로 원형의 왼넓적다리를 때렸다. 그 마부는[徒馭] 이미 적에게 맞아 도망쳐 버렸고[奔逸] 적이 이내 원형의 말을 잡고 동남쪽으로 10여 보를 가서 해치니, 그 머리뼈를[顱骨] 맞아 죽었다. 무리들이 쫓아와서 불을 밝히고 보니 원형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곧 원형의 집 동북쪽 담 모퉁이[隅墻] 바깥이었다. 이때 야루(夜漏)가 미처 다 되지 않아 길 위에는 입조하는 말들과[朝騎] 행인이 많았고,포졸(鋪卒)은 10여 리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모두들 적이 재상을 죽였다 하였다.
《구당서》권제158, 열전제108, 무원형
 
6월 3일 새벽, 자신의 집이 있던 정안리 동문으로 말을 타고 나오던 재상 무원형은 뜻밖에도 자객의 습격을 받고 암살당한다. 범인은 자가진ㆍ문찰ㆍ장안 등 세 사람. 사도왕이 보낸 자들이었다. 이때 무원형의 나이는 58세. 《구당서》에는 무원형 암살의 배후가 사도왕과 동맹을 맺고 있던 진주절도사 왕승종이었다고 적고 있는데, 왕승종이 암살의 배후로 주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도왕이 사주했다고 의심을 받은 건 이들 암살범들이 나중에 사도왕의 군사들과 함께 있다가 붙잡혔기 때문이다. 이 날 어사중승(御史中丞) 배도(裴度) 역시 통화방(通化坊)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았지만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다.
 
한 나라의 재상까지도 마음대로 죽여버릴 정도면 이건 당조의 치안수준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보여주는, 위신이 깎여도 엄청 깎이는 대사건이었다. 장안의 수도와 문까지의 모든 길목에 병사들이 배치되고, 재상의 호위가 금오위사(황궁 친위대)에게 위임되고, 가인부곡(家人部曲)이라고 해서 조선조의 5가작통법 같은 것도 조직됐고. 자객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전(錢) 1만 관과 함께 5품관을 내려주겠다는 거액 현상금까지 내걸리게 됐지만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의 배후를 캐라고 헌종에게 상소했던 백거이는 '간직(諫職)을 통하지 않고 직접 상소를 올린 월권죄'(어찌 생각하면 굉장히 얼토당토않은) 를 받아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당했는데, 좌천당해 한직에 머무르던 시절에 지은 작품이 그 유명한 《비파행(琵琶行)》이다. 그리고 6월 14일, 풍랑으로 일본에 발이 묶여있던 발해의 대사 왕효렴은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7월에 왕자 대정준(大庭俊) 등 101인이 와서 조공하였다.
《책부원귀》
 
그런데, 그때 낙양을 빠져나간 치청 군사들의 행방이 슬쩍 궁금하다.

[賊出長夏門, 轉掠郊墅, 東濟伊水, 入嵩山. 元膺誡境上兵重購以捕之.]
적들은 장하문(長夏門)을 빠져나가 교외의 창고를 약탈하고 동쪽으로 이수(伊水)를 건너 숭산(嵩山)으로 들어갔다. 원응은 그들을 생포하기 위해 변경 군사들에게 많은 현상금을 걸었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이 일은 분명 3월이나 4월에 하음전운원을 불사를 때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구당서》에는 원화 10년(815) 8월 정미조에 "치청절도사 이사도가 몰래 숭산의 승려 원정과 짜고 반란을 모의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사도왕을 치청절도사라 부르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사도왕을 절도사로 임명하지 않으려고 차일피일 미루던 당조에서 사도왕을 치청절도사라고 부른 것은 오원제 등의 공세로 위협을 느낀 당조가 무마책으로 그렇게 한 것인듯 하다. 그렇게 넉 달이 지난 8월 정미. 《당서》에는 사도왕의 장군 자가진이 낙양에서 일어난 난의 주범이라고 적고 있다.
 
[數月, 有山棚鬻鹿於市, 賊遇而奪之. 山棚走而征其黨, 或引官軍共圍之谷中, 盡獲之. 窮理得其魁首. 乃中嶽寺僧圓靜, 年八十余, 嘗爲史思明將, 偉悍過人.]
몇 달이 지나 사슴을 잡아 시장에 내다팔던 화전민이 있었는데, 적을 만나 그걸 뺏겼다. 산붕이 달려와 그 무리들을 고발하였다. 관군을 끌어들여 그들을 계곡 안에 포위하고 모두 잡았다. 궁지에 몰아넣고[窮理] 그 우두머리의 목을 얻었다. 이에 중악사(中嶽寺)의 승려 원정(圓靜)을 사로잡았는데, 나이는 여든살 정도였고 일찌기 사사명(史思明)의 장수로서 위한(偉悍)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안ㆍ사의 난이 실패로 끝난 뒤 당조에서는 그 주모자들이나 부하들을 잡아들여 처형하거나 유배했지만, 잡히지 않고 무사히 도망쳐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다른 반란자들의 휘하에 들어가 절치부심하며 '재기'와 '복수'를 계획하곤 했다. 당조에 대해 '부셔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의 원한만 갖고 있다면 그건 때로는 정부를 전복하려는 자들에게는 꽤 좋은 동지가 돼줄수 있다. 설령 자신과 가깝든 멀든 간에. 사도왕도 원정을 보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조에 원한을 품고있는 이 자라면 틀림없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줄 것이라고.
 
《구당서》에서는 원정이 붙들렸을 때의 일화 한 가지를 수록해놨다.
 
[初執之, 使巨力者奮錘, 不能折脛. 圓靜罵曰 "鼠子, 折人腳猶不能, 敢稱健兒乎?" 乃自置其足教折之. 臨刑, 乃曰 "誤我事,不得使洛城流血."] 
처음 붙잡혔을 때 힘이 센 자를 시켜 쇠망치로 내리쳤는데 그의 무릎을 꿇릴 수가 없었다. 원정이 꾸짖었다. "쥐새끼같은 놈! 사람 다리 하나 못 끊는 주제에 무슨 건아(健兒)란 말이냐?" 그러더니 직접 자기 다리를 부러뜨려서 어떻게 무릎을 꿇리는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형을 받기에 이르러 말하였다. "내가 일을 그르쳤으니 낙성(洛城)에서 피를 흘릴 수 없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이 일에 연루되어 죽은 자만 수십 명. 유수의 어장(禦將)과 낙양의 도정역(都亭驛)과 감수역(甘水驛)의 역졸까지, 모두 사도왕의 매수를 받고 그의 눈과 귀가 되어 사도왕을 도왔다. 그럼에도 이들은 원정이 잡혀죽을 때까지 끝내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으니, 그 때까지 다섯 달 동안 사도왕의 귀와 눈에 들어간 당조의 주요 정보가 얼마나 되는지는 상상을 할 수 없다.
 
여원응이 이때 잡힌 자들을 통해서 얻어낸 정보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사도왕이 이궐과 육혼(陸渾) 사이 10여 곳에 많은 농토를 사들여서 산붕(화전민)들에게 나눠 주면서 그들을 끌어들여 사병을 조직하고, 천만 전의 돈을 내어 숭산의 불광사(佛光寺)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 (하여튼 반란도 돈 없으면 안 되는 건가.) 무원형을 죽인 범인인 자가진과 원찰도 이들 산붕의 무리에 속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며, 자가진이 무원형을 죽일 때 숭산에 불을 지르고 두 현의 산붕들을 모아 난을 꾸미려 했다는 것도 조사과정에서 모두 드러났다. 《신당서》에는 이때 압수된 '증거자료'로서 자가진이 감추어두었던 활과 무기 5천 점, 아울러 낙양에서 건릉교를 부술 때 썼던 극(戟) 47개를 모두 찾아냈다고 적었다.(건릉교는 나무 다리였던 듯)
 
당시 당조의 귀족들과 관료, 번진절도사 모두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둔전이니 영전이니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특히 이궐은 하남윤이 통치하는 기현(機縣) 즉 당조의 '수도권'이다. 천자 거주지인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백리 안의 땅은 모두 기(機)라고 부르는데, 육혼산도 이궐현 부근에 있는 곳으로 낙양과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땅이다. 당조로서는 삼합회나 천지회, 일본 야쿠자나 마피아들이 서울 근교에 자기네들 아지트 마련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 말이다.
 
이곳을 경작하는 화전민들은 사도왕에게는 엄밀한 의미의 둔전병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군대에 가는 대가로 나라로부터 땅을 받아, 전쟁이 없을 때에는 나라에서 주는 땅에서 농사를 짓고 겨울에 군사훈련을 하다 전쟁이 터지면 군사로 징발되어 나가는 둔전병. 자신의 토지가 없는 사람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할 생각을 하다니. 나름 머리를 굴렸다.
 
한편 11월, 장안의 헌릉 침궁 영항에서는 또다시 화재가 발생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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