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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성 (遼陽城)


중문 : 辽阳城


요령성 요양시에 있었던 고구려의 평지성.



개설


요동성이 위치한 요령성 요양시 지역은 전국 시대에서 진대에 이르기까지 ‘양평(襄平)’으로 불렸고, 역대 중국 왕조의 동방 경략 전초 기지이자 본거지였다. 고구려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시기에 양평을 확보하고 요동성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대중국 방면의 주요 거점으로 운용하였다. 따라서 수 양제와 당 태종의 침입 시 이곳에서는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위치


요동성이 있었던 요양시 일대는 태자하 서안의 충적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서북쪽으로는 요동 평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동남쪽으로는 구릉성 평지가 전개되다가 천산 산맥이 나타난다. 요동 평원과 천산 산맥의 점이 지대로 예로부터 요동 반도와 혼하 방면의 경로, 천산 산맥을 넘어 압록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육상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또한 요양은 서쪽의 요서에서 요하를 건너오는 세 가지 도하로인 신민∼심양의 북로, 대안∼안산의 중로, 반산∼고평∼해성의 남로가 모이는 곳이기도 하였다.



건립 경위


요동성의 남아 있는 자취가 불완전하여 요양시 구성구 일대로 비정될 뿐 정확한 위치와 규모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고구려가 요동 지역의 중국 군현성을 차지한 뒤 이를 그대로 활용한 신빈 영릉진 고성이나 현토성의 사례로 보아 후한∼진대의 양평성을 고구려가 연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럴 경우 고구려가 연용하게 되면서 석축으로 성곽을 개축하였을 것이라는 일부 이해는 성립하기 어려울 듯하다.



현황


요동성으로 추측되는 요양 구성의 남벽 아래와 동북 모서리 부근에서 20세기 전반기에 한대의 기와와 함께 고구려 기와 조각이 나왔다고 한다. 또 구성구 북부에서 고구려 유물이 상당수 출토되었고 요양 구성의 서벽 안쪽의 세과사 소학교 부근에서 고구려의 석실묘가 나왔다고 한다. 이로 보아 고구려요동성은 요양 구성보다 동북쪽으로 약간 치우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성지의 흔적이 불확실한 반면, 성곽의 대체적 모습은 1953년 3월 평남 순천군 용봉리대동강변에서 발견된 요동성총의 성곽도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성곽도에 따르면 요동성은 내성과 외성의 이중성으로 이루어진 주성이 있고 작은 위성이 남쪽과 동남에 있었다. 서쪽 바깥으로 강이 흐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성문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표시되고 있다. 외성 동문과 서문의 문루는 2층인 반면, 남문의 문루와 각루는 단층이다. 외성의 서문 안쪽 좌우에 단층집이 한 채씩 있다. 내성에는 기와를 얹은 2층 기와집과 3층 목탑[누각]이 있고, 외성 서문 바깥에도 누각 같은 다층집이 한 채 있다. 성벽 위에는 성가퀴가 그려져 있다. 이 중에는 사혈이 있는 성가퀴 그림도 보인다고 한다. 문루와 각루 사이에는 누각으로 보이는 건물이 묘사되어 있는데 치 위에 세워진 건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645년 당군의 공성 기록에 따르면 성벽 주위에는 해자를 둘렀고, 성벽 위에는 성가퀴가 있었으며, 각 모서리에는 각루가 세워져 있었다. 또 성안에는 주몽 사당을 비롯한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살펴진다.


군사·지리적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곽이었던 만큼, 요동성의 방어 체계는 꽤나 견고했다고 보인다. 612년과 613년 수나라 군대가 요동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비루·운제·지도 등 온갖 공성 무기를 동원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나, 645년 길을 나누어 요하를 도하한 당군이 전 군사력을 모아서 요동성 공략에 나섰다는 사실이 이를 알려준다.



의의와 평가


요동성은 「광개토왕비」의 ‘양평도’ 표현에서 처음에는 양평이라는 후한대 이래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요동성으로 개칭하였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학계의 이해였다.


반면 최근의 연구에서는 광개토왕이 거란의 일파 비려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여정에 보이는 ‘양평도’는 양평성을 중심으로 뻗은 교통로이며 아직 고구려가 양평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이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요동성은 고구려가 양평을 장악한 다음 곧바로 명칭을 바꾸었던 것이 된다.


이후 요동성은 요동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주서』 고려전에 별도인 국내성·한성과 함께 대표적인 성으로 기록된 것이나, 수 양제의 612년 침공시 수군의 공격이 요동성에 집중되었던 것이나 645년 당군에게 함락되었을 때 성안에 병사 만여 명을 비롯하여 남녀 4만 명, 양식 50만석이 있었다는 사실 등이 이를 알려준다. 따라서 당은 고구려를 멸한 뒤 여기에 요성주 도독부(遼城州都督府)를 두어 요동 지역의 지배 거점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여호규,『高句麗 城』Ⅱ(國防 軍史 硏究所, 1999)

이성제 편, 『고구려성 사진 자료집』-요령성·길림성 서부(동북아 역사 재단, 2006)

李成制, 「4世紀 末 高句麗와 後燕의 關係-396년 後燕의 廣開土王 冊封 問題를 중심으로」(『韓國 古代史 硏究』68, 한국 고대사 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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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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