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9057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그가 광주를 위해 남긴 선물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①-2] 5.18 항쟁 복판에 선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

20.05.12 07:12 l 최종 업데이트 20.05.12 07:39 l 글: 소중한(extremes88)사진: 이희훈(lhh)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2020년, <오마이뉴스>는 '평화봉사단'에 주목했다. 항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증인'들의 이야기를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말]


*이전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광주항쟁 곳곳에 등장한 이 미국 청년을 아십니까> http://omn.kr/1nj3g 


▲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Tim Warnberg)의 모습을 담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 나경택 제공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신발도 제대로 못 챙긴 듯, 사진 속 미국인은 슬리퍼를 신은 채 황급히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그가 광주시민 4명과 나눠 든 들것에는 윗옷을 입지 않은 이가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계엄군에게 맞은 머리에는 흰 천이 감싸져 있었다.


팀 원버그(Tim Warnberg). 1954년생인 그는 평화봉사단(Peace Corps) 자격으로 1980년 5월 광주에 머물고 있었다. 평화봉사단은 미국 정부가 1961년 만든 청년 봉사단체로 주로 개발도상국에 파견돼 활동했다. 한국에는 1966~1981년 1700여 명이 파견됐고 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의 현재 모습. ⓒ 이희훈

 

전남대병원에서 근무했던 팀은 자신이 맡은 업무 외에 광주 지역 봉사모임에도 적극 참여했다. 아래는 5.18 직전에 '광주자원봉사단'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팀은 1979년 이 모임을 만드는 데에 큰 역할을 맡았다. 의과대, 간호학과 등 주로 의료계 전공 대학생들로 이뤄진 모임이었다. 


이 모임의 초대 단장을 맡은 고진석 원장(고진석 의원)은 8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무테안경을 쓰고 항상 밝은 표정의, 개구장이 같이 유머도 잘 하는 사람이었다"라고 그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우리가 노숙인 수용시설로 자주 봉사활동을 나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정말 열악한 환경이었다"라며 "가마니 깔고 자고, 머리에 이도 득실득실하고, 강제로 정관수술도 시켜버리고 그러던 곳이었는데 팀이 정말 모범적으로 봉사에 임해 여러 번 감동을 받았다"라고 덧붙였다. 

 

▲  1980년 "광주자원봉사단"의 모습을 담은 사진 일부. 오른쪽 상단의 외국인이 평화봉사단 소속의 팀 원버그이고, 좌측 상단의 인물이 사진을 보내온 당시 전남대 의과대 1학년 안영주씨이다. ⓒ 안영주 제공

 

이러한 성품 때문이었을까. 팀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벌어진 일을 적나라하게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광주시민을 보호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5.18 기간 내내 계엄군의 구타를 말리고, 환자를 후송했으며, 외신기자의 통역(대표적으로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을 맡았다.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가 찍은, 이후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사진첩에도 담긴 아래 사진은 그가 당시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 추측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1987년 팀이 낸 논문(<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 >)에는 사진 속 상황으로 보이는 내용이 담겨 있다(해당 논문은 외국에서 나온 5.18 관련 최초의 논문이다).


"내가 후송했던 환자는 가톨릭센터 앞에서 작은 꽃집을 운영하던 남자였다. 당시 그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내가 2년 후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11번의 수술을 거친 후였고 말을 하지 못했다."


사진 속 흰 가운을 입은 노병유 기자(당시 광주CBS 보도국 차장)도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노 기자는 지난 4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병원에 도착했는데 의식불명이라 환자 접수를 할 수 없어서 내 이름 노병유로 접수를 했다"라며 "그래서 처음엔 내 앞으로 수술비가 청구됐는데 얼마나 수술을 많이 했는지 그때 돈으로 1200만 원이 나왔더라"라고 설명했다.


물냉보단 비냉

  

▲  지난 4월 28일 만난 이흥철씨가 1980년 당시 자신이 일했던 "타박네 음악감상실" 자리에서 팀 원버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 이희훈

 

5.18 이전부터 팀과 자주 교류했다는 이흥철씨를 광주에서 만났다. 팀보다 7살 어린 이씨는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이었던 당시 충장로우체국 옆 '타박레 음악감상실'에서 DJ로 일하고 있었다. 팀은 그 음악감상실의 단골손님이었다.


지난 4월 28일 이씨를 만난 곳은 충장로우체국이었다. 그가 바로 옆 화장품 매장을 가리키며 "여기 지하에 음악감상실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지상층만 있는 건물이었다. 그가 "지하로 내려가던 길"이라며 가리킨 곳엔 '충장로 94-5'라고 적힌 파란 팻말 그리고 소방호스와 연결할 수 있는 송수구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1980년도 초, 겨울이었어요. 1월이나 됐겄죠? 그때 처음 이분이 우리 음악감상실에 오셨어요. 첨에 와서 음악 몇 곡을 신청하길래 내가 틀어줬죠. 본인이 신청한 노래가 나온께 호감을 가진 모양이에요. 웨이타한테 시켜서 나한테 주스 한 잔을 갖다주드만요. 그때 뭐 주스라고 하믄 원액에다가 그냥 물 타서 주는 것인디(웃음). 암튼 나도 감사하게 생각했죠."


이씨는 팀이 자주 요청했던 노래도 기억하고 있었다.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가 그의 주된 레퍼토리였다고 한다.


"저는 그분을 팀이라고 부르고, 그분은 저를 리(Lee)라고 불렀어요. 팀이 밥 딜런 노래를 좋아해서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자주 신청했어요. 비지스(Bee Gees) 노래도 자주 신청했던 거 같고. 올 때마다 음악을 틀어준께 내 타임(순번)에 맞춰서 자주 왔어요. 일주일에 두, 세 번? 나중엔 친해져서 손님들 별로 없을 때 제가 뮤직박스에도 들어오게 해줬죠. 자기도 이런 거 해보고 싶다 글드만요."


이씨에 따르면 팀의 한국어 실력은 거의 원어민에 가까웠다. 그는 실제로 5.18 당시 외신기자 통역을 도맡기도 했다.


"한국 문화에 완전히 적응을 했었죠. 주로 청바지에 셔츠를 입은 채 항상 웃는 얼굴이었어요. 친절한 데다가 한국말까지 엄청 잘하다본께 저도 다가가기에 부담이 없었죠. 한국 음식에도 완전히 적응해갖고 매운 것도, 뜨거운 것도 잘 드셨어요. 젓가락질도 아조 완벽해블고요. 저랑은 냉면을 자주 먹었어요. 물냉(물냉면)보단 비냉(비빔냉면)을 더 좋아하드만요. 저도 매운 걸 좋아해서 같이 비냉을 먹다보믄 내가 '안 맵냐' 물어봐요. 글믄 물을 계속 마심서도 항시 '안 맵다' 그랬어요. 그게 미국인 입에 안 맵겄어요? 매웠겄죠(웃음)."

 

▲  평화봉사단 자료집에 담겨 있는 팀 원버그. 광주에서 근무하던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생생히 목격했다.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음악감상실


1980년 5월 초, 금남로와 충장로는 시위대로 들끓었다. 팀은 한동안 음악감상실을 찾지 못했고, 두 사람은 5.18 도중인 5월 23일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마주쳤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물러나 시민군이 도청을 지키고 있던 시점이었다. DJ여서 방송장비를 다룰 수 있었던 이씨는 당시 가두방송 차량에 탑승해 있었고, 24일엔 팀을 태우고 광주 외곽을 돌기도 했다.


"5월 초부터 금남로랑 충장로에 학생들이 들끓었어요. 데모가 매일 있었은께 최루탄이 막 골목으로 날라 들어온단 말입니다. 음악감상실이 지하라 환풍이 잘 안 돼서 손님들도, 우리도 앉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다본께 우리도 자연스럽게 데모에 참여했죠. 옥상에 있다가 학생들 도망치는 거 보이면 언능 들어오라고 한 담에 샷다 내려블고 그랬죠. 글믄 경찰들이 밖에서 아주 난리였어요. 얼마나 발로 차브렀는지 나중엔 샷다가 휘어갖고 안 올라가블어요.


나중엔 군인들까지 와갖고 너무 잔인하게 패블드만요. 뚜드러 맞는 사람들 본께 장사고 뭐고 '우리 자신을 지켜야겠다' 생각했죠. 그러다가 5월 23일 도청 근처, 옛날 수협 자리(현 천하주차장)에서 팀을 봤죠. 한 보름 만에 봤을 겁니다. 글고 다음날 오전에 우연히 도청 앞에서 또 만났어요. 광주 외곽 상황을 궁금해하드만요. 차에 태워갖고 지원동, 백운동, 농성동으로 해서 운암동 근처까지 돌았죠. 외곽 상황을 본께 많이 놀라드만요. '사람 많이 죽었냐'고 물어봐서 '많이 죽었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광주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의 현재 모습. ⓒ 이희훈

  

▲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의 탄흔이 남아 있는 전일빌딩의 현재 모습. ⓒ 이희훈

  

▲  5.18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가 전일빌딩 앞에서 선회하는 모습. 현재 전일빌딩은 당시 헬기사격에서 발생한 탄흔으로 추정되는 자국들이 남아 기록물 형태로 보존하고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그날 저녁, 이씨는 팀의 손에 이끌려 외신기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헤어진 두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날 오후에 비가 왔어요. 조르륵 조르륵 내리는 보슬비였는디 정말 소름 끼치는 비였죠. 나는 주로 가두방송을 다니다가 도청에 와서는 상황실에 있었거든요? 근디 팀 이 양반이 거기로 찾아온 거예요. 오후 7시 30분이나 됐을라나. 약간 어두컴컴해졌을 땐께. 그땐 광주사람들이 외국인들을 신뢰했거든요. 도청 입구에서 저를 찾는다고 한께 들여보내준 모양이드라고요.


할 이야기가 있다믄서 밖으로 부르드만 어딜 같이 좀 가자 그래요. 왠지 모르게 겁이 나긴 했는디 그래도 따라 나섰죠. 도청 별관 옆으로 나가서 뭔 여관 2층으로 들어갔는디 거기에 외신기자 6명이 있었어요. 팀이 '저 사람들 궁금해하는 것 좀 설명해 달라'고 그런께 '알겠다'고 했죠. 근디 사진을 찍을라 글드만요. 그래서 '지금 다들 얼굴 가리고 다니는 판에 뭔 사진을 찍는다요' 하믄서 나와블라고 했어요.


팀이 저를 겨우 안정시키고, 좀 이따가 기자들이 뭘 막 물어보대요. 팀이 다 통역하고요. '앞으로 어떻게 상황이 진행될 거 같냐', '복면을 한 이유가 무엇이냐' 이런 걸 묻드만요.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선 '나는 잘 모르겄다'고 했어요. 글고 '나중에 추적당해서 잡혀블믄 누가 감당할 수 있겄냐'고 복면을 쓴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죠. 그때 헬기가 돌아다녔는디, 걱서 영상을 찍어블믄 개미새끼 한 마리까지도 다 찍힌다는 소문이 있었은께요. 기자들도 공감했어요. 글고 인터뷰 마치고 여관 밖으로 나온 것이 팀이랑은 마지막이었어요." 


동료들

 

▲  5.18민주화운동 당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평화봉사단 단원들이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다. 왼쪽에 카메라를 든 인물이 위르겐 힌츠페터이고 오른편 4명(차례대로 쥬디 챔벌린, 팀 원버그, 폴 코트라이트, 데이비드 돌린저)이 평화봉사단 단원들이다. ⓒ 위르겐 힌츠페터, 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팀은 앞서 소개한 논문에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자신이 경험했던 일을 꼼꼼히 기록해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 당시 대한민국의 시대상, 언론 보도, 정부 발표를 꼼꼼히 분석해 "정부의 과잉진압"을 5.18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5.18 왜곡세력이 내놓고 있는 "정치세력과 외부 불순세력의 사주와 헛소문에 의해 광주시민이 선동당했다"는 주장에 대해 "완벽히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1987년 하와이대학에서 발간하는 한국학 전문잡지 < Korean Studies >에 실린 이 논문은 2020년의 시선으로 바라봐도 매우 정교하고 객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논문을 번역한 최용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의 조사1과장은 ▲ 국외자의 입장에서 정치적 편견을 버리고 10일 간의 사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학살에 따른 자연발생적이고 자발적인 시민저항이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전두환 정권이 발표한 5.18 수사결과 및 평가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을 이 논문이 지닌 의의로 평가했다.


당시 광주와 인근 지역에서 근무했던 다른 평화봉사단원들도 여전히 팀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 중 대부분도 5.18 현장 한복판에 있었다. 팀은 논문을 쓰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5.18 이후에도 이들과 종종 소통했다. <오마이뉴스>는 평화봉사단원 4명과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암보건소에 있었던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광주에 가면 대부분의 경우 팀을 만날 수 있었다"라며 "커피숍에 가고,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하고,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광주는 팀의 도시였고 갈 만한 좋은 곳을 많이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5.18 당시 데이비드는 도청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등 팀과 함께 광주 시내를 누볐다. 


"팀은 온화하고 친절한 영혼이었어요. 그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군대가 쫓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을 보호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작은 가게로 가게 됐을 때, 한 병사가 젊은 한국인들을 때리기 시작했고 그는 그 군인과 한국인들 사이에 몸을 놓고 멈추라고 외쳤습니다."

 

▲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이 사진은 5.18 직후 미국의 잡지 에 실리기도 했다.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나주 호혜원(한센인 집단 거주지)에서 근무했던 폴 코트라이트 역시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 역시 광주의 참상을 생생히 목격했다. 그는 "팀은 좋은 친구였다.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 우리 마을에서 나를 두어 번 도와줬다"라며 "(5.18 때엔)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기고, (시민들이) 구타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했으며, 외신기자를 위해 통역하는 등 광주시민을 도왔다"라고 말했다. 그는 5.18 40주년을 맞아 <5.18 푸른 눈의 증인>이란 제목의 회고록(영문판 제목은 'Witnessing Gwangju')을 발간했는데, 이 책에도 팀의 이야기가 곳곳에 담겨 있다.


"(다른 평화봉사단원이었던) 에릭은 잠시 천장을 응시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중략) '팀과 나는 부상당한 학생들을 가게 밖으로 데리고 나왔어. 그 뒤로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어. 죽은 학생들도 봤어! 군인들은 사람들을 마구 연행해가고, 지옥이 따로 없었어.' 에릭은 말을 멈추더니 안경을 벗었다. 나는 놀라서 입이 반쯤 벌어졌다."


이러다 보니 광주시민을 돕던 팀 역시 계엄군에게 고초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앞서 소개한 논문에 "(5월 19일) 군인 한 명이 중년 여성의 10대 아들을 연행하려고 했다. 나는 그 군인에게 다가갔고 진압봉으로 얼굴을 한 대 맞고 난 뒤에 그 아이를 놓으라고 군인을 설득할 수 있었다"라고 썼다. 그와 함께 들것으로 환자를 이송했던 노병유 기자도 "입술 있는 데가 터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라고 증언한 것을 보면, 당시 팀이 항쟁의 복판에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움직였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이 사진은 5.18 직후 미국의 잡지 에 실리기도 했다.ⓒ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목포를 거쳐 당시 경기도 안양에서 근무하던 빌 에이머스(Bill Amos)는 5.18 직후 서울에서 만났던 팀의 모습을 떠올렸다. 1999년 5.18을 다룬 최초의 외국 소설 <시드 오브 조이(The Seed of Joy)>를 쓴 그는 "우리는 (5.18 직후 서울의) 평화봉사단 사무실에서 만났고 저녁을 먹으며 팀에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다"라며 "그에게 들은 군의 잔혹함에 소름이 돋았다. 당시의 대화는 5.18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내려는 나의 관심을 일깨워 결국 내 소설로 이어졌다"라고 말했다.


팀이 5.18 직후 서울에 간 이유는 주한미대사관에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데이비드 돌린저는 "팀과 나는 5월 30일 대사관을 찾아갔는데 (대사와의 만남을) 거절당했다"라며 "대사관 관계자는 '광주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알고 있고 당신들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보고서를 가져가라고 강요했다"라고 떠올렸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아시아학과 교수인 도널드 베이커(Donald Baker)는 "개인적으로 팀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 둘 다 광주에서 평화봉사단으로 있었단 사실 때문에 그의 존재는 알고 있다"라며 "그의 논문은 광주의 비극에 대한 최초의 영어 보고서였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1971~1974년 광주에서 근무하다 1980년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서울에 머물고 있었던 그는 "(팀이 논문을 낸) 1987년에 광주를 말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으며 팀의 논문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최초의 학문적 시도였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1993년, 서른아홉

  

▲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를 기억하고 있는 이흥철씨가 지난 4월 28일 5.18 구묘역에 잠들어 있는 동료들의 묘를 찾아 생각에 잠겨 있다. ⓒ 이희훈


팀은 1993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 때였다. 팀이 자주 찾았던 음악감상실의 이흥철씨는 지난 2018년에야 그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됐다. 그를 사진에 담았던 나경택 기자와 그와 함께 사진 속에 담긴 노병유 기자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됐다. 모두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망 소식을 듣고) 멍했죠. 첨엔 돌아가신지 몰랐어요. 그래서 그 사진 속 외국인이 팀이란 걸 알았을 때 '아, 언젠가 한 번 보믄 좋겄다. 40년이 지났는디 어찌 변하셨을까' 그라고 생각했는디... 참 슬픕디다. 고국을 떠나 외국에 있으면서 어지간한 사람은 그렇게 못할 거 아닙니까." - 이흥철


"돌아가셨다고요? 아이고, 참 안 됐네요. 가끔 '그 사람 한 번 보고 싶다' 생각했는디 참 안 됐네. 정말 한국을 사랑한 사람 같았거든요. 최루탄 난무하던 금남로에서, 한국인들도 사람 구해올 용기 못 냈어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을 사랑했던 사람인디..." - 노병유


고진석 원장 역시 번 취재 과정에서 처음 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그는 놀란 듯한 목소리로 "지금도 그 얼굴이 생생한데 정말 안타깝다"라며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라고 말했다. 


팀이 세상을 떠나고 몇 달 후 그 소식을 들었던 데이비드 돌린저는 "나는 팀이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슬펐다"라고 말했다.


"내 외아들은 팀이 죽기 전인 1992년 태어났고, 나는 그의 이름을 팀이라고 지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두 명의 팀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 명은 고등학교 선생님이고 한 명은 (평화봉사단) 팀 원버그입니다. 나는 아들이 그들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희망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팀에게 이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팀이 음악감상실에서 자주 신청했다던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엔 이런 가사가 담겨 있다. 1962년 세상에 나온 이 노래는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팀의 '5월 광주'를 향한 메시지 같기도 하다.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before he can see the sky?

얼마나 자주 위를 올려다봐야 한 인간은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을까?

How many ears must one man have Before he can hear people fly?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한 인간은 사람들 울음소릴 들을 수 있을까?

How many deaths will it takes till he knows That too many people have died?

얼마나 많은 죽음을 겪어야 한 인간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죽어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을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 속에 불어오고 있지.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네.


■ 팀 원버그 논문 번역

: 최용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의 조사1과장)

■ 이메일 인터뷰 번역

: 송재걸 (카디프대학 석사학위 논문 <The Gwangju Democratisation Movement and the Role of International News Flows> 저자)


덧붙이는 글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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