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1020172702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36) 아무르 강이 굽이쳐 흐르는 하바로프스크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10.20 17:27


‘시베리아의 심장부’ 감싸안은 애환과 분쟁의 강


아무르 강 전경.


흔히들 ‘아무르 강을 보기 위해 하바(하바로프스크의 약칭)로 간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만큼 아무르 강은 유명하니까. 필자는 일찍이 중국 땅에서 구소련을 넘나들면서 두 번이나 이 강을 건너 본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나름의 감성(感性)에서 ‘검은 용’처럼 흘러가는 강물 위에 무덤덤하게 몸을 띄웠지만, 수십 년이 지난 뒤 찾아가는 아무르는 오성(悟性)에서 발산되는 다른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 온다. 숱한 겨레의 애환을 싣고 하바에서 굽이쳐 흘러간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르를 보기 위해 하바에 왔다고 해도 좋고, 하바를 보기 위해 아무르를 찾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수리스크에서 7분 연착된 밤 11시20분 열차를 타고 하바로 향했다. 듣던 바와는 달리 열차는 현대적으로 아주 편리하게 꾸며졌으며, 승무원들도 굉장히 친절하다. 야행이라서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간혹 희미한 불빛 속에 자작나무며 잣나무 숲이 어른거릴 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까지 구간은 시베리아 횡단철도 노선 중 가장 먼저 운영에 들어간 구간이다. 옛소련 시절에는 국방상 이유로 하바 이동의 선로는 모두 폐쇄되어 하바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역 구실을 한 적이 있다. 다음날(2009년 7월4일) 아침 8시 정각에 하바에 도착했다. 출구를 나서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우람한 동상이다. 그는 1650년쯤 이곳을 포함한 시베리아를 개척한 사람으로서 하바로프스크란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두 개의 빨간 색 바늘을 달고 있는 대형 시계탑도 광장의 명물이다. 바늘 하나는 러시아 전역에서 표준시간으로 삼고 있는 모스크바 시간을, 다른 하나는 현지 시간을 가리킨다.


이 하바로프스크가 오늘은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우며 어딘가 모르게 정적이 감도는 듯하지만, 사실은 살벌한 군사거점으로 출범했다. 1858년 당시 동시베리아 총독이던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백작이 불과 25㎞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청나라로부터 아무르 강에 대한 영유권을 빼앗기 위한 전초기지로 세운 도시가 바로 이 하바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과의 국경분쟁이 쉼 없이 일어남으로써 줄곧 군사도시로 발전해 왔다. 지금도 극동 군관구 사령부가 이 도시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의 하바로프스크 주는 러시아의 89개 행정단위 가운데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면적은 78만9000㎢로서 남한의 9배다. 이 넓은 땅에 사는 사람은 고작 160만명에 불과하며 그중 주도인 하바에만 60만명이 몰려 있다. 하바 주는 수많은 호수와 무성한 숲, 귀한 에너지 자원과 광물, 진기한 동식물을 품고 있는 천혜의 자연보고이며 극동 시베리아의 심장부다. 연해주나 사할린 지방도 원래는 하바로프스크 주의 관할 아래 있었으나 1938년과 1947년에 각각 분리되었다.


기차역에서 곧바로 인투리스트 호텔에 들어가 여장을 풀고는 답사에 나섰다. 먼저 찾은 곳은 호텔 근처에 있는 민족박물관이다. 3층으로 된 붉은 벽돌 건물이다. 박물관 1~2층에는 각종 동식물 박제품과 우리나라 한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민족 유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득의양양한 무라비요프와 의기소침한 만청 대표가 아이훈(愛琿)조약(1858)에 서명하는 모습을 그린 유화는 퍽 인상적이다. 또한 눈길을 끈 것은 3층에 전시된 한 전투 장면이다. 1920년대 초 대치 상태에 있던 적군(赤軍)과 백군(白軍)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 장면을 아주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련의 전투에서 패한 백군은 만주 지방으로 도피한다. 후일 그네들 중 일부가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유입한다.


하바로프스크 기차역 광장에 세워진 개척자 하바로프의 동상.


일찌감치 점심을 마치고 시 중심에 자리한 레닌광장에 들렀다. 햇볕이 쨍쨍 쬐는 정오 무렵인데도 사람들로 붐빈다. 광장은 주 청사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은행과 공무원대학, 의과대학, 병원 등 공공건물들로 빙 둘러싸여 있다. 한 바퀴 돌아본 후 여기서 200m쯤 떨어진 푸슈킨 거리의 한 붉은 벽돌집을 찾았다. 우거진 가로수 속에 파묻혀 있는 이 호젓한 단층집은 1920년대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쓰던 신문발간소이다. 지금은 결혼상담소로 변해 옛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어 김유천(김유경의 오기) 거리로 발길을 옮겼다. 거리에 이름이 붙여질 만큼 이곳 하바가 기리고 있는 고려인 2세 김유경은 1900년 연해주 수이푼 구역 차피고우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적군에 가담한 그녀는 적군 76연대에서 소대급 지휘관으로 성장한다. 그러다가 1929년 백군과의 전투에서 장열하게 전몰한다. 이듬해에 그녀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이 거리가 그녀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녹음이 짙게 드리운 거리는 아득히 곧게 뻗어 있다.


여기서 안내 받은 곳은 ‘영웅광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산화한 3만7000명의 이름이 돌판에 빼곡히 새겨져 있다. 그 숱한 이름 속에서 ‘김’ ‘리’ ‘박’ 같은 고려인들의 성을 찾아냈다. 해외 동포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그 땅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지켜야 할 의리일진대, 우리는 그네들이 그렇게 해서 그 땅에 뿌리 내리는 것을 대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동포들의 삶을 놓고 이 한 가지 소박한 도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말만큼 쉽지는 않아 보인다. 오늘도 하바에는 2000여명의 고려인들이 뿌리 내려 살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국의 번영에서 힘을 얻고 있다. 고국은 그들의 믿음직한 지킴이다. 그래서 고국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우리 일행을 안내한 고려인 3세 정 선생의 간절한 말이다. 광장 뒤편 언덕 위에는 시 방송국과 높다란 영웅탑이 세워져 있다. 거기서 100m쯤 떨어진 곳에는 3년 전에 문을 연 정교회 교회와 지난해 지은 신학교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바야흐로 정교회가 부흥하고 있는 조짐인 듯하다.


아무르 강은 하바의 명물이며, 강 위에 가로놓인 다리는 명물 중의 명물이다. 두 명물을 한꺼번에 감상하기 위해 다리로 향했다. 2006년에 완공한 다리의 동서 길이는 자그마치 5㎞나 된다. 밑으로는 기차가, 위로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2중 구조의 다리다. 서쪽 교두보 언저리에 차를 세워놓고 강과 다리를 유심히 살펴봤다. 물속에 부식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물빛은 검푸르죽죽하다. 이런 색 물줄기가 마치 용처럼 구불구불 흘러간다고 하여 중국 사람들은 이 강을 ‘흑룡강’(黑龍江)이라고 부른다. ‘흑룡강’이란 이름은 13세기에 씌어진 <요사(遼史)>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이전의 문헌에는 ‘흑수’(黑水)니 ‘약수’(弱水)니 ‘오환하’(烏桓河)니 하는 이름으로 나온다. 이 강은 몽골 북부의 성산 헨티산에서 발원해 러시아와 중국 간의 국경선을 이루면서 하바의 바로 남쪽에서 우수리강과 합류한다. 그 후 이 도시를 오른쪽으로 끼고 북동 방향으로 흐름을 틀어서는 사할린 섬 앞을 거쳐 오호츠크 해에 유입한다. 장장 5498㎞를 흐르는 이 강은 세계 10대 강의 하나로서 유역 면적이 넓고 풍부한 수자원을 갈무리하고 있다. 어종만 해도 상·하류 합쳐 160여종에 달한다. 하바에 이르러서는 그 너비가 2㎞를 넘으며 깊이는 평균 7m이다.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어 썰매를 타고 내왕하는 데 두세 시간이나 걸린다고 한다.


아무르 강 다리 전경.


그러나 이 강은 결코 평화롭게 유유히 흐르는 강만은 아니다. 숱한 애환과 분쟁을 싣고 소용돌이치는 강이기도 하다. 강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중국 간에는 시비가 그칠 날이 없다. 최근까지도 강 가운데 있는 두 개 섬을 놓고 일어난 분쟁이 무장충돌 직전까지 치달았다. 원래 러시아 영인 이 두 섬이 퇴적 현상으로 인해 중국 땅에 붙어버렸기 때문에 영유권 시비가 인 것이다. 2004년 양국 간의 국경협정에 의해 일시 분쟁이 봉합되기는 했으나, 언제 또 다시 터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무르 강 다리 답사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이 다리로부터 서쪽으로 기차를 타고 세 시간이나 걸리는 유대인 도시 비로비잔까지의 광활한 땅이 아직껏 유대인들의 소유지라고 한다. 그들은 이 소유지에서 여전히 공동체를 이루고 상부상조의 협동기업을 운영하면서 부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그 모진 수난 속에서도 꺾임 없는 유대인들의 끈질긴 생명력, 그 증언의 현장이다.


하바에서의 이틀째 날엔 아무르 강이 굽이쳐 흐르는 이 길목에서 겨레의 얼과 혼을 불사른 다른 두 한인 선열의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선참으로 찾아간 곳은 마르크스 거리 22번지에 있는 김 알렉산드라 스탄게비치(1885~1918)의 유적이다. 유적 표시로 건물 외벽에는 그녀의 생애를 함축한 내용이 새겨진 동판이 걸려 있다. 그녀는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처에서 함경북도 출신의 이주민 딸로 태어났다. 20대에는 교사를 하다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우랄 지역으로 거처를 옮겨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1918년에 이동휘 등과 함께 하바에서 한인 사회당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이듬해 9월 러시아를 침입한 일본군의 후원을 받는 백군과의 일전에서 체포되어 아무르 강변에서 총살당한다. 한반도의 13개 도를 상징하는 13개 발자국을 뗀 뒤 총탄을 맞고 쓰러진다. 향년 33세의 꽃다운 나이다. 상하이에서 간행된 ‘독립신문’ 1920년 4월17일자는 “혁명사상으로는 대한 여자의 향도관(嚮導官) … 자유정신으로는 대한 여자의 고문관(顧問官), 해방투쟁으로는 대한 여자의 사표자(師表者)”라고 그녀의 한 생을 높이 평가한다. 그녀의 시신은 강물에 내던져졌다. 그 후 비통에 잠긴 시민들은 오랫동안 강에서 낚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많은 아무르 강을 굽어보며 영롱한 이슬로 사라진 그 현장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머리 숙여 열사의 영원한 안식을 빌어 삼가 묵념을 올렸다.


그 길로 콤소몰 거리 89번지에 있는 열렬한 민족문학 작가 조명희(1894~1938)의 고택을 찾았다. 일제의 농민 수탈에 저항하는 한 지식인 운동가의 처절한 삶을 그린 그의 수작 <낙동강>(1927)은 학창 시절 필자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 고택은 낡은 2층 목조건물이다.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한국문학 최초의 창작 희곡집 <김영일의 사(死)>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결국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8년 연해주로 망명해 바로 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중학교 교편을 잡고 동포신문 ‘선봉’, 잡지 ‘노력자의 조국’ 편집을 담당하는 등 망명 작가로서의 눈부신 활동을 펼친다. 그러다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다. 이듬해 4월 일본 첩자를 도왔다는 무고한 죄명을 쓰고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처형된다. 딸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당당하게 선언하며 한 사날 있으면 돌아온다던 그 말이 선생의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필귀정이라, 그의 명예는 회복된다. 여기 하바의 시립 공동묘지의 ‘기억 사원’ 안에는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필자는 3년 전 타슈켄트의 나보이 문학박물관 4층에 마련된 ‘조명희 기념실’을 찾은 바 있다. 기념실 중앙에 모셔진 선생의 흉상 위에는 소설 <낙동강>에 나오는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라는 문구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핍박 속에서 정든 고향산천을 등지고 이역만리에서 서러운 타향살이를 하는 겨레붙이들이 지니고 있는 수구초심(首丘初心,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낙엽귀근(落葉歸根)의 끈끈한 근성이요 고고한 정체성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과연 본능적인 이 근성과 이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동포애를 베풀고 있는지 한번 되새겨봤으면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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