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1103173013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38)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11.03 17:30


이광수 ‘유정’ 무대… 아름답구나, 여인들 순애보


이르쿠츠크역사


이르쿠츠크를 상징하는 휘장은 검은 호랑이가 붉은 담비를 물어 구제하는 도상이다. 검은 호랑이는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서식한 길상 동물이며, 담비는 부근 숲 속에 사는 야생동물이다. 초피(貂皮), 즉 담비 가죽은 예나 지금이나 고급 모피로 애용됨으로써 담비 역시 진중되는 동물이다. ‘산신령’이나 ‘산군’(山君)으로 여겨지는 호랑이의 영험과 위력을 빌려 설한풍 거칠지만 보물로 가득한 이 땅을 번성케 하려는 뜻이 담긴 상징물이라고 해석해 본다. 그래서 그런지 올 때마다 신기(神氣)를 느낄 정도로 훈훈하고 정감이 들며,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하는 그 이색적인 풍광에 매료되기도 한다.


지난 50여년 동안 다섯 번이나 들렀으니,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에 한 번 꼴로 찾아 온 셈이다. 얼마나 변했으며, 또 변해가고 있는가가 늘 궁금하다. 그러면서도 한 구석엔 변하지 말고 그대로였으면 하는 ‘수구’(守舊)의 취향도 가끔 내뱉어 본다. 이번엔 지난해(2008년) 2월에 있은 초원로 답사에 이어 꼭 1년 반 만에 다시 찾아왔다. 사흘 전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시베리아 횡단철도 열차는 예정 시간보다 40분 늦은 오후 6시5분에 도착했다. 시간은 여기가 서울과는 같고, 블라디보스토크와는 3시간, 모스크바와는 5시간 시차가 있으니 드넓은 러시아 땅의 동쪽 편에 약간 치우쳐 자리한 곳이다.


기차 역사 정문에서 현지 여행사 직원과 함께 통역 안내를 맡을 이르쿠츠크대학 유학생 서군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철도대학 유학생 임군이 같은 역을 맡았다. 학구열에 불타 낯선 이역 땅에 와서 열심히 공부하고 세계를 익혀가면서 여행객들에게 안내의 도움까지 주는 젊은이들이 정말로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숙소는 시내가 아니라 30분 거리에 있는 라스트비앙트의 삼림 속 통나무집(올라체카)으로 잡았다. 이색적인 체험이다. ‘북경코야점’(오리구이 식당)에서 저녁을 때우고 8시가 다 되어서 거리에 나섰는데도 백야 탓으로 대낮처럼 환하다.


이르쿠츠크를 상징하는 휘장(검은 호랑이가 담비를 구제하는 도상).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도시들 중에서 유일하게 350여년의 긴 역사를 가진 유구한 도시이다. 곳곳에 그러한 나이테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1615년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에 앞장섰던 카자크 기병들이 앙가라 강변에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기지촌으로부터 발걸음을 뗀다. 점차 동부 시베리아 정복의 거점으로 확장되다가 1686년에 도시로 승격하고, 18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는 시베리아의 정치·경제 중심지로 부상한다. 1761년에 이르쿠츠크 원정대가 베링 해협을 정복한 데 이어 알래스카에 앙가라 출신의 상인과 주민들이 정착하면서 극동과 알래스카 전체가 이르쿠츠크 주의 관할 하에 들어온다. 이때부터 이르쿠츠크는 명실상부한 시베리아의 맹주로 군림한다. 그러나 아직은 시베리아 고풍이 켜켜이 쌓인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남아 있다. 그러다가 제정 러시아의 압제가 극에 달한 19세기에 들어서는 유형지로 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배되어 온 데카브리스트들에 의해 ‘하느님은 높고 차르(황제)는 멀리 있으니’ 죄와 벌이 무섭지 않다고 으쓱거리는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던 살벌한 도시가 ‘시베리아의 파리’로 파격적인 변신을 한다. 20세기 초에는 반혁명 백군(白軍)의 본거지로서 불꽃 튀는 격전장이 되기도 했다. 너무나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은 비록 그 현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원래 건물은 모두가 목조 건물이었으나 1879년 큰 화재로 대부분 건물이 전소되거나 화상을 입었다. 참사 이후 목조건물을 대신해 석조건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파리’였던 그 명성만은 이어가려는 이곳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그 ‘파리풍’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주택을 비롯한 전통 건물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크기나 외양이 같은 것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아기자기한 색깔과 문양은 기괴할 정도로 다종다양하다. 무언가 서로 달라야 신이 쉬이 식별하고 제대로 찾아온다는 속설은 이곳 사람들의 믿음이라고 한다. 도식을 피하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이곳만의 개성이다. 현대적 건물도 전통을 따라 탈러시아적인 서구식으로 짓고 꾸미고 있다. 샤머니즘과 러시아 정교회가 추구하는 전통 양식과 유럽의 바로크 형식이 혼합된 이른바 ‘시베리아 바로크’ 형식의 독특한 건물이 눈에 많이 띈다. 최근에는 200년 이상 되는 건물은 문화재로 지정해 정부가 보호 관리하고 있으며, 오랜 건물은 함부로 허물거나 증축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인구 80만명을 품고 있는 이 도시는 세계적 관광명소 바이칼 호로 가는 필수 경유지라는 점에서 관광 전망은 밝다. 아울러 경제·문화적 잠재력도 상당하다. 교통의 요로에서 중국이나 몽골과의 교역이 활발하며, 1956년에 완공된 앙가라 수력발전소와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동부 시베리아의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교육·문화면에서도 동시베리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기세가 1㎾당 한화로 4원밖에 안 되니 아마 세상에서 가장 싼 전기료가 아니겠는가. 국립 이르쿠츠크대학을 비롯해 30여개의 대학과 직업학교가 있다. 대학 등록금은 1년에 한화로 250만원(6만 루블)이라고 하니 우리네보다 퍽 싼 셈이다.


콜차크 해국제독 동상


첫날밤을 보낸 올라체카는 숲 속 깊숙이 파묻혀있다. 2층으로 된 20여동의 통나무집들이 이곳저곳에 꼭꼭 숨어 있다. 층 마다 방이 대여섯 개씩 딸려 있다. 방바닥이며 벽은 몽땅 널빤지로 짰는데, 널빤지 사이사이의 틈은 자작나무 껍질로 메우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지은 지 몇 해 된 집인데도 구수한 나무 진 냄새가 은근히 코를 찌른다. 한여름이지만 창문을 열어젖히니 시원한 숲 바람이 솔솔 스며든다. 괴괴한 숲속의 밤은 나그네의 온갖 잡념을 털어버리고 곯아떨어지게 한다. 삼림욕을 만끽한 하룻밤이다. 이르쿠츠크 주 전체 면적 76만7900㎢ 가운데서 타이가 삼림 지대가 75%나 차지하며, 7월 이맘 때의 평균기온이 17~19도이니 정말로 쾌적한 자연환경이다.


올라체카에서 시내로 돌아와 관광에 나섰다. 처음 찾은 곳은 앙가라 강의 지류인 우샤코브카 강 건너편에 자리한 즈나멘스키 수도원이다. 수도원 정문 밖 광장에는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해군제독 알렉산드르 콜차크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1689년에 문을 연 이 수도원은 이곳과 울란우데, 치타 지역까지를 관장하는 동시베리아 정교회의 본부이다. 지금까지 줄곧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현행 수도원으로서 내부는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눈 익은 성화도 여러 점 눈에 띈다. 30여명의 신도들이 선 채로 엄숙히 예배를 근행한다. 수도원에는 300여년 전(1698년)에 만들어진 귀중한 성경이 보관되어 있으며, 유명 인사들이 묻힌 공동묘지도 함께 있다. 이 묘역에는 알래스카와 쿠릴 반도를 발견한 ‘러시아의 콜럼버스’ 쉘리호프와 데카브리스트의 뜨레베츠키야 부인과 가족들이 묻혀있다. 쉘리호프의 묘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지도와 컴퍼스, 닻, 원고 등이 청동으로 부조되어 있다.


이어 찾아간 곳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체취가 스며있는 레닌 거리 23번지 옛 극장이다. 이곳은 1920년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한 외국 혁명가들이 자주 모임을 갖던 자리이다. 벽면에는 그러한 역사의 현장임을 전하는 동판이 여러 장 붙어있다. 이에 앞서 1910년대에 이범석, 이범윤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그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이르쿠츠크는 자유세계를 찾아 방황하던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무대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이곳에서 고려인으로선 유일한 러시아 연방의원 유리 텐(한국명 정홍식)이 배출되었으며, 100여명의 한국인 교민과 유학생들이 살고 있다.


이어 발길을 옮긴 곳은 데카브리스트의 박물관이다. 데카브리스트란 1825년 12월 러시아 최초로 근대적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들을 지칭하는데, 러시아어에서 12월을 ‘데카브리’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그래서 일명 ‘12월 당원’이나 ‘데카브리스트 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사건이 여태껏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사건 자체의 의미와 더불어 그 부인들의 기막힌 순애보와 그들에 의해 시베리아 동토에 자유와 근대적 문명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1812년 모스크바까지 쳐들어온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파리까지 진격한 러시아 젊은 장교들은 유럽의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사상, 근대 문명에 감응되어 귀국해서는 농노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 수립하기 위해 1816년 구제동맹을 결성한다. 이를 시발로 복지동맹과 북방결사, 남방결사, 통일슬라브결사 같은 혁명조직을 잇따라 뭇고 세를 키워간다. 그 바탕에서 1825년 12월14일 원로원 광장에서 거행되는 새 황제 니콜라이 1세에 대한 선서식을 계기로 거사를 도모하기로 한다.


데카브리스트 박물관(발콘스키 고택).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 5명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나머지 120여명의 장교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섣달, 송구영신(送舊迎新)의 꿈은 이렇게 꺾이고 만다. 그러나 다음 세기에 타오를 불씨를 이 암흑의 땅에 뿌려놓았다. 그것이 데카브리스트의 자부와 긍지였다. 그들 모두는 장교인 동시에 열렬한 혁명가, 정치가들이었으며, 그 가운데는 이름난 시인도 있다. 시인 라에프스키는 <명상>(1830년 작)에서 자유를 찾은 감격을 이렇게 자문자답식으로 읊조린다. “방랑자여, 그대는 왜 당신의 매력적인 골짜기를 야생의 숲, 바위 덩어리, 어두운 협곡으로 대체하였는가”, 이에 대한 답은 “이 산들 속에서, 이 화강암의 절벽 속에서, 나는 힘과 자유를 숨쉰다”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푸슈킨도 남부로 유배를 가는 바람에 데카브리스트의 대열에 직접 끼지는 못했지만, 그들 못지않은 열정으로 혁명을 동경하고 그들과 호흡을 같이 한다. “무거운 족쇄가 떨어져 나가고, 감옥은 허물어지리니 자유는, 기쁘게 문 앞에서 당신들을 맞이하고, 형제들은 그대들에게 검을 건네리라.” 그가 쓴 시 <시베리아의 깊은 광맥 속에서>(1827년 작)의 마지막 구절이다.


데카브리스트의 한 사람인 발콘스키 백작 주택을 개조한 박물관 1, 2층에는 그들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유물과 사진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 너나없이 감동을 받는 것은 그들 부인의 극진한 순애보이다. 데카리스트들에게 유배형이 내려진 뒤 황실은 부인들에게 반역자인 남편들을 버리고 귀족 신분으로 재가를 하든지, 아니면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전을 버리고 남편들을 따라 유배지로 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명을 내린다. 부인들은 주저없이 유형 길을 택한다. 고대광실에서 영화만을 누려오던 귀족 출신의 부인들은 설한풍 휘몰아치는 시베리아 대지를 1년 이상 걸어서 순정의 드라마를 펼친다. 유배형을 마친 데카리스트들과 부인들은 유배지 이르쿠츠크를 그들이 그토록 꿈꾸던 자유와 이상의 온상으로 변모시킨다. 그들에 의해 이 도시가 지녀오던 역사의 무게와 문화의 결은 확 달라진다. 그것이 오늘로 이어진 ‘시베리아 파리’의 모태이다. 벽에 걸려있는 발콘스키 부인 마리아의 초상화, 38세의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겉늙음에서 그 고난 찬 일생이 읽혀진다. 소박한 살림살이와 숱하게 오간 편지, 읽은 책, 하나하나가 혁명가들의 불꽃 튀는 삶과 참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비롯해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전시실을 발 디딜 틈 없이 꽉 채운 관람객들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기까지 하다. 필자는 ‘참 순애보의 현장을 찾아서’란 감격 어린 말 한 마디를 방명록에 남기고 박물관을 나섰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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