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독선을 원칙으로 착각…연휴 뒤 ‘겨울 정국’ 온다
등록 : 2013.09.17 18:32 수정 : 2013.09.19 17:39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추석 이후 정국은 어디로

‘박근혜-황우여-김한길’ 3자회담은 예상대로 파탄이 났다. 결국 올 추석도 정치 얘기를 피하기 어렵게 됐다. 연휴를 앞둔 민심의 흐름을 짚고 앞으로의 정국을 살펴본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전략통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과 민주당의 관계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데는 두 사람의 착각이 크게 작용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거의 평생 ‘권력을 쥔 강한 남자들’과 대결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회창,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은 그가 맞서 싸운 정적의 명단이다. 그래서일까? 상처에 앉은 딱지처럼 그의 의식 저변에는 방어본능이 꽉 들어차 있다. 그는 야당이나 언론을 대할 때 “나는 잘못이 없다.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태도를 보인다. 16일 3자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자신을 억울한 피해자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집권초기 대통령이다. 최고 권력자가 양보하지 않으면 정치는 풀리지 않는다.

3자회담서 재확인된 ‘불통’ 
야당과 대화·타협하는 것을 원칙 깨는것으로 여기는 듯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베스트셀러 <여자의 남자>를 쓴 작가다. 그는 6월24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정원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공개편지를 쓴 일이 있다. 밤을 새워 문장을 가다듬어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을 설득해 보려고 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상대는 비타협적 방어본능으로 무장한 최고 권력자였다. 국가정보원은 그날 오후 2002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다. 김한길 대표는 3자회담이 끝난 뒤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서 이 땅의 민주주의 회복을 기대하는 것은 무망하다는 것이 제 결론이다”라고 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16일 오후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3자회담이 완벽하게 깨진 이유가 뭘까? 단 한 가지다. 박근혜 대통령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독선’을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특이한 정치인이다. 현 정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전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과거 정부와 다르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남재준 국정원장이나 김관진 국방부 장관 등 원칙적이고 강경한 사람들을 그래서 좋아한다. 야당과의 대화나 타협에 대해서는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지난 7월 말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와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한때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합의에 이른 적이 있었다. 당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발언 공방,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실종 사건 등이 얽혀 정국이 대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여야 공동의 엔엘엘 수호 선언, 국정원 개혁을 위한 국회 특별위원회 설치 등 구체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특위 위원장을 야당이 맡는다는 세부적인 내용까지 조율됐다. 그러나 황우여 대표가 막판에 발을 뺐다. 청와대와 당내 친박근혜 세력이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왜 야당과의 타협에 반대했는지는 16일 3자회담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타협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당장 추석연휴 이후 정국은 캄캄해졌다. 민주당은 애초 이번 3자회담에서 적절한 수준의 타협이 이뤄지면 국회 일정에 부분적으로라도 합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확인됨에 따라 국회를 전면 거부하고 장외투쟁에 나서자는 ‘초강경론’이 힘을 얻게 됐다. 민주당이 지금처럼 원내·외 투쟁을 병행하기로 결정하더라도 정기국회에서 정부제출 법안과 내년도 예산안을 고분고분 통과시켜줄 가능성은 사라졌다. ‘진짜 파국’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새누리당도 이런 기류를 감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준예산 등 비상조처를 검토중이다. 준예산은 새 회계연도가 개시될 때까지 국회가 예산안을 의결하지 않으면 정부가 헌법이나 법률에 의하여 설치된 기관 또는 시설의 유지·운영비 등을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과 주요 정치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실제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독 오른 민주당, 원내외 병행투쟁, 내년 예산안 통과 쉽게 안해줄듯 
당분간 주도권 잡을 가능성은 희박

박근혜 대통령은 60%를 훨씬 뛰어넘는 국정수행 지지도와 대외관계 성과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당분간 국정 장악력을 높이려고 시도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당장 3자회담 다음날인 17일 국무회의에서 “야당이 장외투쟁을 고집하면 민생을 외면한다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그 책임 또한 야당이 져야 할 것”이라며 ‘누가 이기는지 갈 때까지 가보자’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그가 풀어야 하는 과제는 사실 하나도 만만한 것이 없다.

첫째, 당장 채동욱 검찰총장 사퇴는 눈앞에서 터진 지뢰다. 본질적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현 집권세력이 못마땅하게 여기던 검찰 수장을 무리하게 내쫓으려다 발생한 사건이다. 이미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민심이 순식간에 돌아설 수 있다.

둘째, 경제와 일자리 등 민생 문제도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묘수로 내놓은 ‘창조경제’는 취임 6개월이 지나도록 실체가 무엇인지 오리무중이다. 대기업 총수들과 밥을 먹는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김종인 전 의원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 마찬가지로 재벌에 휘둘려 실패할 것이다”라고 저주에 가까운 비판을 퍼붓고 있다.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으면 지지도가 내려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셋째, 측근들의 비리가 터질 수 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5촌 조카가 사기 혐의로, 근혜봉사단 전 회장이 특가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각각 구속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아무 돈이나 허겁지겁 받아먹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때 캠프에 돈을 전혀 마련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돈을 써야 움직이는 여당 체질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선거조직이 각 단위별로 알아서 돈을 마련해 썼다. 캠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금품수수 비리가 터져 나올 수 있다.”

높은 국정수행 지지도라는 겉보기와 달리 박근혜 대통령이 사실은 매우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새누리당은 어떨까? 새누리당의 관심은 온통 내년 지방선거와 당권의 향배에 쏠려 있다. 의외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황우여 대표의 2년 임기는 내년 5월까지다. 하지만 내년 6월 지방선거 때문에 전당대회를 지방선거 이후로 미룰 가능성이 높다. 혹시 연내에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해 지방선거가 위험해지면 2월에 조기 전당대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선출할 수도 있다.

차기 당권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사람은 김무성 의원이다. 그가 만든 공부모임에 새누리당 의원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변수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김무성 의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꽤 알려져 있지만, 당권을 잡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나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008년 총선에서 친박연대 대표를 지냈던 서청원 전 의원은 최근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는 책을 내고 경기 화성갑에 공천 신청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서청원 전 대표에게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고 말한 일이 있는데, 서청원 전 의원은 책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공천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서청원 전 의원이 원내에 들어오면 유력한 당대표 후보가 된다. 하지만 그는 친박연대 대표 시절 수십억원을 받은 공천헌금 비리로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다. 민심은 그의 복귀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최경환 원내대표도 박근혜 대통령의 지원을 기대하며 당권에 뜻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당은 지방선거·당권에만 관심 
김무성에 의원들 구름처럼 몰려, 박대통령, 저지 나설지는 의문

민주당은 당분간 정국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김한길 대표는 3자회담 직후 다시 노숙을 위해 서울시청 앞으로 돌아갔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독이 오를대로 오른 김한길 대표가 어떤 비장의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다.

민주당 안에서는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의원에게 좀더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있다. 문 의원과 가까운 의원은 “민주당이 처해 있는 리더십 부재 상황은 언젠가 대선주자인 문재인 의원이 당권을 잡아야 타개될 수 있다. 지금부터 활동 반경을 넓혀야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재선에 성공하면 당 안의 문재인, 당 밖의 박원순 두 사람이 민주당을 이끌어 가는 두 대의 기관차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침체된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는 손학규 전 대표가 기여할 수도 있다. 손학규 전 대표는 9월29일 귀국할 예정이다. 10월8일 동아시아미래연구소 창립 심포지엄에서 ‘저녁이 있는 삶의 재구성-한국사회의 새로운 위기과 대안의 모색’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한다. 민주당 대선주자로 복귀하는 절차인 셈이다.

안철수 의원은 10월 재보선을 건너뛰고 내년 지방선거를 통해 세력을 구축하겠다는 야심을 마침내 드러냈다. 성공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정국에 미칠 영향은 클 것으로 예상된다.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은 이석기 의원 사건을 계기로 진보세력의 구심을 노리고 있지만 정치풍토와 조직역량의 한계로 고전중이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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