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00865

일본 망명정부 구상한 이승만, 선조와 닮았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구암 허준>, 다섯 번째 이야기
13.08.29 14:34 l 최종 업데이트 13.08.29 15:49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구암 허준>의 선조(전노민 분). ⓒ MBC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이 무책임하게 행동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나라를 지키기보다는 자기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그는 일본군의 북상 속도 못지않게 신속히 북상했다. 그런 모습을 인공위성에서 지켜봤다면, 선조가 멀찌감치 앞장서서 일본군을 이끌고 북상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선조 임금 못지않게, 아니 훨씬 더 무책임한 통치자가 있었다. 일부 사람들이 아직도 대한민국의 국부로 떠받드는 대통령 이승만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실상을 알고 보면 이승만이 훨씬 더 무책임했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MBC 드라마 <구암 허준>의 선조는 마지못해 피난을 가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드라마 속의 선조는 일부 신하들의 간청에 못 이겨 한성을 떠나 개성에서 평양으로, 다시 의주로 이동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라를 지키지 않고 자기를 지킨 선조

역사 기록 속의 선조는 드라마와 달리 아주 명확하게 무책임성을 보여주었다. 임진왜란은 음력으로 선조 25년 4월 13일(양력 1592년 5월 23일) 발발했다. 선조는 전쟁이 발발한 날로부터 17일 뒤인 음력 4월 30일(양력 6월 9일) 새벽에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한성을 탈출했다. 그의 탈출이 부득이한 행동이 아니라 무책임한 행동이었다는 점은 조선 백성들이 선조를 격렬히 비난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선조는 개성·평양·영변을 거쳐 음력 6월 22일(양력 7월 20일)에 최전방인 평안도 의주에 도착했다. 이쯤 되면 갈 데까지 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선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도 갈 데가 더 있었다. 압록강 건너 명나라로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명나라 망명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해 6월 26일자(양력 7월 24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명나라에서 조선왕을 푸대접할 것으로 보인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망명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명나라는 선조가 망명할 경우에 압록강 인근의 전방 군사기지인 관전보에 그의 숙소를 마련해줄 계획이었다. 이곳은 명나라와 여진족 군소 정권들의 경계지역이었다. 그래서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명나라가 그런 곳에 거처를 만들어주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선조는 그제야 체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성을 떠나는 순간부터 이미 체면은 땅에 떨어졌는데도, 선조는 관전보 같은 곳에 기거할 경우에 자신의 체면이 추락하리라고 염려했다. 이렇게 오로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기 때문에 선조는 무책임한 왕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선조를 무색케 하는 무책임의 극치, 이승만


▲  한국전쟁 중의 이승만. 이승만의 사저인 이화장에서 찍은 사진. 이화장은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에 있다. 대학로가 있는 혜화역 2번 출구에서 15~20분 거리에 있다. ⓒ 김종성

우리 역사에서 선조처럼 무책임한 통치자가 또 있었을까? 그런 사람은 정말로 또 있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오전 2시, 이승만은 국회에 통보도 하지 않은 채 대전으로 피신했다. 그러고는 라디오 담화를 통해 "정부는 서울에 머물 것"이라며 국민을 안심시켰다. 정확히 말하면 안심시킨 게 아니라 기만한 것이다. 

2시간 뒤인 오전 4시, 이승만은 수원 천도를 결정했다. 7월 1일부터 그는 이리와 목포를 거쳐 부산으로 피신한 뒤에 대구를 거쳐 대전으로 이동했다. 선조는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온 데 반해, 이승만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가 북쪽으로 올라갔다. 

만약 이 정도로 끝났다면, 이승만의 무책임과 선조의 무책임이 비슷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선조 임금을 능가할 만한 결정적 행적을 남겼다. 

1996년 4월 14일자 <연합뉴스>를 포함한 국내 언론들이 일본 교도통신을 인용해서 보도한 바와 같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도 전에 이승만은 이미 일본 망명 계획을 세웠다. 교도통신이 제시한 자료는 전 야마구치현 지사이자 전 통산성 장관인 다나카 다쓰오가 쓴 회고록과 미국 국무부가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다. 

한·일 양국의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이 자료들에 따르면, 6월 27일 새벽에 수원 천도를 결정할 때에 이승만은 존 무치오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서울이 함락된 것은 6월 28일이었다. 이승만은 서울이 함락되기도 전에 일본 망명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이승만이 심리적 공황 상태였다는 점은 존 무치오 대사가 딘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외교관계>에 수록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존 무치오 대사는 "한국 지도부는 절망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내각은 망명정부가 되어 일본으로 이동하는 가능성에 대해 문의해왔다"고 보고했다.  

▲  부산시 서구 부민동에 있는 임시수도기념관.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다. ⓒ 김종성

미국을 통해 이승만의 의향을 전해들은 일본 정부는 자국 땅에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세우는 준비에 착수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싸우던 일본이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차려줄 준비를 했던 것이다. 망명정부의 기지로 예정된 곳은 한국과 가까운 야마구치현이었다. 야마구치현은 일본 본토와 규슈섬의 경계 지역이다. 일본은 이곳에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진행된 이 망명 작전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무산되었다. 만약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지 못했다면, 이승만 망명정부가 야마구치현에 상륙했을 것이다. 

원수의 나라에 망명정부를 꾸리려 한 이승만

한성을 버리고 계속 몽진을 하다가 명나라 망명 계획까지 세운 선조. 서울을 버리자마자 일본 망명 계획까지 세운 이승만. 언뜻 보면, 두 사람의 무책임성이 엇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문제를 꼼꼼히 뜯어보면 이승만의 무책임이 훨씬 더 크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선조가 망명하고자 했던 나라는 동맹국인 명나라였다. 이승만이 망명하고자 했던 나라는 그로부터 5년 전까지 조선을 식민 통치한 일본이었다. 이승만은 일본을 원수로 대했다. 그가 얼마나 공개적으로 일본을 증오했는지는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런 이승만이 일본의 도움을 빌려 그곳에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에 이어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이 된 인물이 일본에서 대한민국 망명정부의 대통령까지 되고자 했던 것이다. '대통령 그랜드슬램'이라도 이루려 했던 것일까. 그의 행적은 선조의 행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 중에 책임을 방기한 통치자의 전형으로 선조 임금을 거론하지만, 이승만은 선조보다도 훨씬 더 무책임한 통치자였다. 그는 조선을 식민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도 혐오감을 표시했던 일본에 망명정부를 꾸리려고 했다. 그런 인물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수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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