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514072005946


"짐승처럼 맞고 피흘리는 사람들을 두눈으로 똑똑히 봤다"

허단비 기자 입력 2020.05.14. 07:20 수정 2020.05.14. 10:49 


[5·18 40주년을 말하다⑭] 고등학생 투쟁위원장 최치수씨


[편집자주]1980년 5월 한반도 서남권의 중심도시인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5·18 40주년을 맞아 40년 전 당시 현장을 지켜낸 이들을 통해 그날의 참상을 되돌아본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이었던 최치수씨(57)가 인터뷰 중 생각에 잠겨있다.2020.5.13 /뉴스1 © News1 허단비 기자


(광주=뉴스1) 허단비 기자 = "'아, 내가 오늘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순간에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는데 우리 엄마가 조금 보고 싶더라고…."


1980년 5·18민주화항쟁 당시 '최후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을 지킨 학생 시민군 최치수씨(57)는 5월27일 새벽 도청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당시 궐기대회에서 고등학생 대표연설을 하고 고등학생 투쟁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기개가 있던 학생이었지만 죽음을 앞둔 그 역시 엄마가 보고 싶은 17세 소년일 뿐이었다.


최씨는 "그날 전남도청 상황실에 들어가 있는데 무전이 계속 들려왔다. '계엄군이 유덕동 들어왔다', '조선대 뒷산 들어왔다', '서방 사거리 들어왔다' , '월산동 파출소 들어왔다'는 무전이 빗발치듯 들어왔다. 계엄군들이 무서운 속도로 도청을 향해 포위해오고 있었다"며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그날을 떠올렸다.


"'도청으로 들어와라', '전원 도청으로 들어오라'는 무전 소리 외에는 도청 안은 너무 고요했다. 그때 상황실에서 창문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데 죽음이 다가왔다는 걸 실감했다. 죽는구나 싶었지만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려서 그랬는지 부산에 계신 엄마는 좀 보고 싶었다."


최씨는 전남 나주에서 4남 2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가족들이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되면서 당시 광주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담임선생님께서 "청년 학생은 시사에 눈이 밝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귀담아 들었고 '월계 문학 동인회'라는 문학 서클에 가입해 시를 쓰고 발표,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최치수씨가 학교 문학발표회에서 창작시를 발표하고 있다.(최치수씨 제공)2020.5.13 /뉴스1 © News1


최씨는 문학 동인회 활동으로 시사와 정치 등 사회에 관심이 많았고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에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내며 참여하게 됐다.


그러던 중 5월18일 거리가 어수선하니 무슨 큰일이 났다는 걸 알게됐다. 놀란 최씨는 친구들과 한 집에서 모두 모이기로 했다. 친구 집으로 가는 '동묘 3번' 버스를 타고 금남로를 지나면서 최씨는 처음으로 5·18현장을 목격하게 됐다.


"그때 버스를 타고 가는데 순간 버스 문이 열리고 20여명의 대학생들이 우르르 올라탔다. 버스 안은 최루가스 냄새로 모두가 재채기하고 눈물, 콧물 흘리고 난리가 아니었다. 대학생들 몰골은 신발이 없는 사람, 머리에 피 흘리는 사람, 최루가스를 뒤집어쓴 사람,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사람 등 모두 성한 곳이 없었다."


아수라장에서 최씨가 들은 말들은 "공수부대 저것들을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 "친구가 잡혀갔다", "전두환을 죽여야 한다"는 것들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등교한 최씨는 친구들과 "우리가 이러고 있으면 안된다"며 크게 분노했다. 학생들은 전날 시내에서 목격한 참혹했던 장면들을 이야기하기 바빴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며 크게 동요했다. 그러자 선생님들은 휴업령이 내려졌다며 학생들을 곧장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때는 정말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계엄군이 형, 누나들을 개잡듯이 쥐어팼고 시내 여기저기서 피흘리는 시민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20일부터 최씨는 항쟁에 뛰어들었다. 시내 외곽에서 차가 없어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트럭에 실어나르는 트럭 조수석에 올라탄 것이 시작이었다.


조수석에 탄 최씨는 "갑시다 시내로! 극악한 공수부대와 싸우고 있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도와 함께 싸웁시다. 싸워서 공수부대를 광주에서 몰아냅시다!"고 외쳤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이었던 최치수씨(57)가 13일 당시항쟁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2020.5.13 /뉴스1 © News1 허단비 기자


교복을 입은 소년의 외침에 시민들은 주저없이 트럭에 올라탔고 아주머니들은 트럭에 주먹밥이 들어있는 바구니를 실어주기도 했다.


항쟁 이곳저곳에서 시민들을 돕던 최씨는 21일 이후 결성된 5·18수습대책위원회의 항쟁지도부 형들을 도우며 5·18고등학생 수습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마비됐던 광주는 '5·18수습대책위원회'를 꾸려 그 안에서 대변인실, 상황실, 조사부, 장례위원회, 민원실, 홍보실, 보급부 등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운영해나갔다.


조사부는 시민군 사이에서 선동을 하는 계엄군 프락치를 속아냈고 보급부는 시민들이 나눠준 주먹법과 물을 시민군에게 나눠줬다. 장례위원회는 상무관에 안치한 시신 수십구의 주인을 찾기위해 노력했다.


최씨 역시 장례위원회를 도와 2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종일 시신 더미에서 추모시를 읽기도 했다.


"상무관에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해 향을 많이 피웠더니 상무관 안이 하루종일 뿌옇고 향 냄새가 자욱했다. 유가족들이 통곡하는 곳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고등학생 대표로 다른 여학생과 하루종일 추모시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도청에서 쓰러져 자고 어머니들이 쥐어준 주먹밥을 먹으며 시민군을 도운지 6일째가 되자 옷이 최루탄과 피로 범벅이 되면서 하얀 살레시오고 교복 상의가 까매질 정도였다. 집으로 달려가 교련복 상의와 교복바지를 입고 그는 이끌리듯 다시 도청으로 향했다.


그렇게 최후의 날인 27일이 다가왔다. 오전 4시 무렵 3여단 특공조는 4개 조로 나눠 도청을 포위했다. 도청 뒷담을 넘어 쪽문으로 도청을 침투, 맹렬히 총을 쏘며 도청 내부로 돌격해 들어간 것이다.


살레시오고등학교 하복을 입은 최치수씨(오른쪽)와 친구들.(최치수씨 제공)2020.5.13 /뉴스1 © News1


말을 잇던 치수씨는 잠시 멈춘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그런데 아직도 그게 참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고 후회스럽다…내가 그때 고등학생들을 쪽문에 배치하지만 않았더라도 어린 친구들이 많이 살았을 텐데…하는 마음에 오랜 시간 정말 괴로워했다."


특공조는 옥상부터 내려오며 각 방의 문을 걷어차고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다.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총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인기척이 나는 곳엔 무조건 총격이 쏟아졌다.


최씨는 이날 공수부대에 끌려가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도청에서 연행돼 간 첫날은 '짐승처럼' 계속 두들겨 맞았고 늦은 밤이 돼서야 상무대 헌병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어린 학생이었던 치수씨가 감당할 수 없는 고된 고문이 이어졌다.


끔찍한 폭행과 고문을 받던 어느 날 치수씨는 훈방됐고 살아서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어린 학생이었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써낸 탄원서의 영향이 컸다.


17살의 나이로 민주화와 독재 타도를 외친 소년은 특별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누구나 그랬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치수씨는 "5·18정신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때의 순수성. 민주화나 이념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도 내 가족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불의에 맞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정의롭게 살아가는게 바로 5·18정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청년 학생은 시사에 밝아야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젊은 친구들과 학생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젊은 세대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젊은 세대가 우리 5·18세대 보다 많은 것을 알고 사회문제를 잘 견지하고 이해하는 것 같다. 최루탄과 화염병을 들지 않았지만 집회나 청원에 참여한다든지 슬기로운 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그런 우리 청년들이 5·18을 기억해주는 것에 참 고맙다."


beyondb@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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