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319150352882


려당전쟁 현장중계 3 - 백암성주 손대음을 위한 변명

[고구려사 명장면 92] 

임기환 입력 2020.03.19. 15:03 수정 2020.03.20. 09:12 


백암성 전투를 다룬 이 글의 부제를 '백암성주 손대음을 위한 변명'으로 붙였다. 645년 당과의 전쟁에서 스스로 항복한 성주는 손대음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인물로 그동안 평가돼 왔다. 필자도 그런 견해에 동의하고 있었는데, 요즘 려당전쟁 관련 사료를 곱씹어보다가 백암성주 손대음이 다소 억울한 평가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존 시각을 뒤집어보고자 한다.


5월 28일. 요동성 함락 이후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당나라 군대는 요동성 동쪽의 백암성(白巖城)으로 진군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오골성(烏骨城)에서 1만명의 군사가 백암성을 구원하려고 도착했지만, 당의 장수 계필하력(契苾何力)에게 격퇴당했다.


6월 1일, 백암성을 포위한 당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사람을 보내 항복 의사를 전하였고, 당군 깃발을 성안에서 세우니 이미 당군이 성안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해서 모두 성주를 따라 항복하였다. 이렇게 해서 백암성은 당태종의 침공 시에 스스로 항복한 유일한 성이 되었다.


백암성이 항복한 경위는 위에서 정리한 대로이다. 포위된 지 불과 3~4일 만에 제대로 항전도 못해본 치욕스러운 항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오늘 우리의 시선일 뿐, 그 당시 백암성주 손대음이나 백암성 주민의 입장을 상상하면 그리 간단히 평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다소 장황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내용을 살펴보자. 다만 이 기사는 고구려 자체 전승 기록이 없어서 중국 측 역사서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당태종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문장 뒤에 가려 있는 백암성주 손대음의 입장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세적이 백암성(白巖城) 서남방으로 진공하고 황제가 서북쪽으로 이르니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당군이) 성에 이르면 칼과 도끼를 내던져 항복을 표시하겠다고 하면서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안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당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정녕 항복하려거든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고 말하였다.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니 성안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으로 올라온 것으로 여기고 모두 성주를 따랐다.


황제가 요동성에서 이겼을 때에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 후회하였으므로 황제는 이랬다 저랬다 번복함에 화가 나서 "성을 빼앗으면 반드시 사람과 물건들을 모두 군사들에게 상으로 줄 것"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황제가 다시 백암성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을 본 이세적은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청하였다.


"병사들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이 거의 함락되었는데 어찌 다시 항복을 받아들여서 군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황제가 말에서 내려 사과하며 말하였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장군 아래 공이 있는 자에게는 짐의 창고 물건으로 상을 줄 터이니 장군은 이 성 하나와 바꾸기 바란다."


이세적이 그제야 물러났다. 황제가 성안 남녀 1만여 명을 붙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고 그들에게 음식을 내렸으며, 80세 이상 된 자에게는 비단을 차등 있게 내렸다. 그리고 백암성에 있던 다른 성 군사들은 위로하여 타이르고 양식과 병장기를 주어 그들이 가는 대로 보내주었다.


위 글대로 백암성 전투와 관련된 중국 측 기록은 당태종의 자애로운 모습을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황제가 항복한 자에게 베푸는 인자함은 전쟁의 일반 상식을 훨씬 넘어섰다. 항복한 주민에게 상을 내리기도 하고, 또 다른 성에서 구원하러 온 포로들을 제집으로 돌려보냈으니 말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는 당태종의 홍보 전술이기도 하다. 황제의 자애로움을 널리 알려 고구려인들의 자발적 항복을 기대하려는 일종의 심리전술인 셈이다.


사실 당태종이 백암성 공격에 직접 참여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백암성은 군사가 2000명, 주민 1만명 정도의 중급 규모 산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런 규모의 성을 공격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참여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당의 대군이 백암성을 거쳐 오골성으로 진격하려는 계획도 아니었다. 결국 다시 요동성으로 되돌아와야 하는데, 왜 당태종이 작은 백암성 공격에 직접 나섰을까?


아마도 백암성이 스스로 항복한다고 하였을 때 당태종은 백암성의 항복을 본보기로 해서 천자의 은덕을 널리 알리게 되면 고구려 주민들의 민심 이반이나 동요를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렇다면 당태종이 직접 백암성에 가서 황제의 위엄과 자애를 과시하는 이벤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당태종의 여유는 요동성 함락으로 인해 갖게 된 자심감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당시 당태종이나 당의 장군들은 수양제의 대공세를 물리쳤던 철옹성 요동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이미 이 전쟁에서 반은 승리했다고 여긴 듯하다. 이제는 다른 전략, 즉 군사적 압박이 아니라 황제의 너그러움을 전파하여 고구려인의 저항 의지를 뒤흔드는 심리전을 펼치려는 전략을 세운 듯하다. 그 대상이 백암성이었다. 성의 규모나 모든 면에서 적절한 대상이었다.


그러면 항복을 주도한 백암성 성주 손대음과 성안 주민들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들여다보자. 싸울 것인가 아니면 항복할 것인가. 막상 그런 상황에 처하고 보면 판단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백암성이 항복하겠다고 하고 다시 번복했다는 중국 측 기록에서 백암성주와 주민들이 가졌던 그러한 마음의 갈등과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이때 중요한 점은 과연 싸우면 당의 대군으로부터 성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중국 측 기록을 보면 백암성이 무척이나 험준한 지세를 갖고 있는 철옹성 같은 인상을 받는다. 다음과 같은 백암성 공격 기록이 그러하다.


"백암성은 산을 따라 물가에 있는데, 돌을 겹쳐 성을 쌓았다. 사면이 험하고 절벽이어서 공격할 수 있는 곳이 겨우 60보에 불과했다. 이적이 충차로 성벽을 부딪치자, 곳곳 꺾이고 무너졌다. 돌과 화살이 비처럼 성안으로 쏟아졌다."

백암성 성벽 /사진=필자


필자도 백암성에 가보기 전에는 정말 위 기록대로 공격이 쉽지 않은 성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가본 백암성은 위의 기록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강변을 끼고 있는 성벽의 일부 구간은 천연의 험준함을 자랑하지만 이는 전체 성벽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성벽과 성문은 완만한 능선에 구축되어 있다. 그래서 최대한 성벽을 높게 축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흔히들 백암성의 높고 장대한 성벽을 고구려 산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하곤 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정반대다. 필자가 다녀본 다수의 고구려 산성 중에서 지형상으로 가장 취약한 성이 백암성이었다. 인공 성벽을 아무리 높게 쌓아도 험준한 지세를 이용한 것만 못하다. 이는 성벽 위에 올라서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필자는 고구려 산성 답사를 다니면서 험준한 지세의 성벽 위에서 항상 마음 든든했다.


그런데 백암성 성벽 위에서 올라선 필자는 그때까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성 밖 평원에 가득한 10만 대군을 상상하면 솔직히 필자라도 항복할 생각이 절로 들 듯했다. 도저히 이런 성벽으로는 당군의 공세를 막아낼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아래 백암성 원경 사진을 보시라. 위 기록대로 당군이 돌과 화살을 성안으로 비처럼 쏟아부었다면 과연 견뎌낼 재간이 있었겠는가? 그때 필자는 백암성주가 왜 항복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역사 현장은 기록이 보여주지 않는 역사를 보여주는 법이다.


백암성 원경 /사진=필자


당태종의 자애로움을 손대음의 시각에서 바라보자. 성 밖의 1만 구원군도 이미 후퇴하고 없는 상황에서 2000도 안되는 군사와 주민 만으로 과연 당군의 거센 공격을 버터낼 수 있을까? 이 작은 성은 곧 무너질 게다. 함락된 성안은 적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로 금방 피비린내와 곡성이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항복한다면 자애로움을 과시하려는 당태종의 아량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필자는 손대음의 항복에서 몰살할 수도 있는 성안의 주민들을 살리기 위한 성주의 충심이 느껴졌다. 오히려 손대음은 백암성을 황제의 자애로음을 과시하는 이벤트의 현장으로 삼으려는 당태종의 생각을 읽어내고, 이를 이용하여 성안 주민들을 살리는 지혜를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손대음을 비겁한 성주이고, 항복한 백암성 주민을 수치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당태종은 자애로운 군주의 모습으로 백암성에서 멋진 이벤트를 펼쳤다. 물론 이렇게 백암성에서 당태종이 베푼 너그러움에 대한 소문이 고구려 후방의 여러 성에 퍼져나가면, 백암성처럼 앞다투어 당태종에게 무릎을 꿇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당태종의 이런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고구려의 어떤 성도 항복하겠다고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6월 11일, 열흘을 기다리던 당태종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공격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대상이 안시성이었다. 아마 당태종은 이제는 너그러움이 아니라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했으리라. 하지만 공격 대상을 잘못 골랐던 것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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