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01610001


영품리왕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영품리는 부여의 왕으로 부루왕의 다른 칭호라고도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구려조에는 주림전(珠林傳)을 인용하여 “이 졸본부여는 또한 북부여의 별도이므로 부여왕이라 이른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此卒本扶餘 亦是北扶餘之別都 故云扶餘王也 寧稟離乃夫婁王之異稱也)”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조에서는 영품리왕에 대비되는 인물로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이 등장한다.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가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얻어 궁에 두었는데 유화는 햇빛을 받아 알 하나를 낳았다. 알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후에 고구려의 시조가 되는 주몽(朱蒙)이다.


그리고 영품리왕을 『삼국지』 열전 동이 부여(夫餘)에서는 고리국왕(槀離國王)으로 소개하였으며,『후한서』 열전 동이 부여국,『북사』 열전 백제지국(百濟之國)에서는 색리국왕(索離國王),『논형』길험편,『통전』변방(邊防) 부여국에서는 탁리국왕(橐離國王), 『수서』 열전 동이 백제에서는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구려조 말미에 나온 설화는 부여의 건국신화로서 『삼국유사』의 찬자는 이를 고구려의 건국신화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으로 『논형(論衡)』,『위략(魏略)』등에 실려 있는 부여 건국시조 기록의 원문을 소개한 후에, 『논형』에 기록된 부여 시조 동명에 관한 이야기는 고구려 시조 주몽 이야기가 잘못 적힌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논형』에 있는 탁리국은 북부여국의 별명이며, “탁(橐)”은 『위략』에서는 “고(槀)”라 쓰고, “고구(高句)”의 오기라고도 하는데,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다고 하는 전설을 본말을 전도시켜서 고구려로부터 부여가 나온 것처럼 잘못 기록했다는 것이다.(那珂通世/나카 미치요, 1894) 비슷한 입장에서 『논형』을 비롯한 역사서에 나타나는 부여 시조전설이 신빙하기 어렵다고 전제한 다음, 거기 기록된 부여 시조전설은 고구려 시조전설을 거꾸로 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동명(東明)이 부여에서 도망쳐 엄호수(掩淲水)를 건너 탁리국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할 것을, 거꾸로 후자에서 전자로 도망한 것처럼 잘못 전해졌다고 하였다. 그렇게 보는 근거로, 부여 시조전설에 나오는 “탁리(橐離)”의 “탁(橐)”이 『위략』에는 “고(槀)”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는 “구려(句麗)” 혹은 “고려(高麗)”를 다르게 표기한 것이며, “엄호(掩淲)”의 “호(淲)”도 여러 가지 표기가 있으나 이 역시 “엄니”의 잘못으로 본다면 「광개토왕비」에 있는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이병도, 1959)


부여건국신화와 고구려건국신화를 별개의 신화로 보는 입장에서 동명과 주몽을 다른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동명은 부여의 시조,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이며 음운상으로 유사점이 없기 때문에 각각 다른 사람이며, 동명과 주몽을 같다고 본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池內宏/이케우치 히로시, 1931)


부여와 고구려는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여 건국하였다는 비슷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시조에 대한 신성관도 일치하고 있어, 양국의 건국신화가 대동소이할 수 있는 법인데,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하나의 독자성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부여와 고구려건국신화가 같다는 입장을 비판하면서 먼저 피해 나온 나라이름의 경우, 선행기록인 『논형』의 “탁리(橐離)”를 취해야 하는데, 『위략』의 “고리(槀離)”만을 선택해 이를 고구려로 해석한 것은 지양해야 하며, 건넌 물 이름의 경우 『논형』의 “엄호수(掩淲水)”를 택하여 이를 「광개토왕비」에 있는 “엄리대수(奄利大水)”로 본 것은 견강부회라고 하였다. 이를 토대로 『논형』에 있는 내용은 부여의 건국신화로 보아 두고, 고구려건국신화는 그것대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이홍직, 1959)


지역마다 각국의 동명신화가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북부여, 고구려(졸본부여), 동예(동부여), 백제(남부여)가 분열하기 이전 단계의 전부여족(全扶餘族)이 애초에는 북중국의 어느 원주지에 있다가, 그 생활권이 무너지면서 각국의 동명신화가 발생했다고 파악한 것이다. 제1차 분열시의 신화가 북부여족의 동명신화(고리국신화)이며, 제2차의 것이 고구려의 동명신화, 제3차의 것이 백제의 온조신화라고 하였다. 이는 각국의 건국신화를 구분하되, 그 주인공의 이름이 각국 시조에 공용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여 동명을 보통명사화하여 이해한 것이다.(김철준, 1975)


종래 주몽신화와 관련된 여러 문헌기록에 기록된 주인공의 이름이 동명계와 주몽계로 대별되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렇게 나뉜 양 기록은 내용상 주인공의 출생지, 잉태경위, 건국국명, 남주(南走)의 동기 등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양 기록은 별개의 시조신화 기록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논형』을 비롯한 동명계기록은 부여의 시조 동명에 관한 것이며, 『수서』를 비록한 주몽계기록은 고구려시조 주몽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몽계 기록에 나타나는 동명이란 호칭은 그 찬양적인 어의에서 후대에 붙여진 것이며, 동명계 기록에 있는 사람이름으로서의 동명과는 구별해야 한다고 하였다.(이복규, 1979)



참고문헌


那珂通世, 1894, 「朝鮮古史考 第四章 高句麗考」『史學雜誌』5-9.

池內宏, 1931, 「高句麗の建國傳說と史上の事實」『東洋學報』28-2.

이병도, 1959, 『韓國史』古代篇, 을유문화사.

이홍직, 1959, 「고구려의 흥기(1)」『국사상의 제문제』4, 동국문화사.

김철준,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이복규, 1979, 「「朱蒙神話」의 文獻記錄 檢討」『國際語文』1.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고구려)


高句麗


高句麗 卽卒本扶餘也 或云 今和州又成州等 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 國史高麗本記云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先是 北扶餘王解夫婁旣避地于東扶餘 及夫婁薨 金蛙嗣位 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 我是河伯之女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自言 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淥邊室中 <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有産子 名曰夫婁 今據此記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于此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光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五升許 王棄之與犬猪 皆不食 又棄之路 牛馬避之 棄之野 鳥獸覆之 王欲剖之 而不能破 乃還其母 母以物之 置於暖處 有一兒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岐>嶷異常 自作弓矢 百發百中 國俗謂善射爲朱蒙 故以名焉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技能莫及 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若不早圖 恐有後患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自乘肥 瘦者給蒙 王之諸子與諸臣 將謀害之 蒙母知之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不可 宜速圖之 於是蒙與烏伊等三人爲友 行至淹水[今未詳] 告水曰 我是天帝子河伯孫 今日逃遁 追者垂及 奈何 於是魚鼈成橋 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至卒本州[玄菟郡之界] 遂都焉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時年十二歲 漢孝元帝建昭二年甲申歲 卽位稱王 高麗全盛之日 二十一萬五百八戶 珠琳傳第二十一卷載 昔寧稟離王侍婢有娠 相者占之曰 貴而當王 王曰 非我之胤也 當殺之 婢曰 氣從天來 故我有娠 及子之産 謂爲不祥 捐圈則猪噓 棄欄則馬乳 而得不死 卒爲扶餘之王[卽東明帝爲卒本扶餘王之謂也 此卒本扶餘 亦是北扶餘之別都 故云扶餘王也 寧稟離 乃夫婁王之異稱也]


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혹은 지금 화주 또는 성주 등이라고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의 경계에 있다. 『국사』고려본기에 이르기를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며 휘는 주몽이다. 이에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가 이미 동부여로 피한 뒤 부루가 죽은 후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으니,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 유화인데 여러 아우들과 나와 놀고 있는데, 그 때 한 남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였다. 나를 웅신산 아래 압록강가의 집속으로 꾀어 사통하고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단군기에서는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고 부루라 이름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사통한 뒤에 주몽을 낳은 것이다. 단군기에서는 아들을 낳아 부루라 이름하였다하니,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인 것이다] 부모가 중매 없이 사람을 따른 것을 꾸짖어 마침내 이곳으로 귀양가서 살게 하였다”고 하였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깊숙이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췄다. 몸을 이끌어 피하니, 해그림자가 또 쫓아와 비추었다. 그로 인해 잉태하여 한 개의 알을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만 하였다. 왕이 그것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에 버리니 소와 말이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니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왕이 그것을 깨뜨리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매우 영리하고 보통과 달라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번 쏘면 백번을 다 맞추었다. 나라의 풍속에 활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금와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재주가 미치지 못하였다. 장자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듣지 않고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준마를 알아보아 적게 먹여 수척하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장차 해하려고 모의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 말하기를 “국인이 장차 너를 해하려고 하니 너의 재략으로 어디를 간들 못하겠는가? 마땅히 속히 도모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오이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 가다가 엄수[지금은 자세하지 않음]에 이르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손자이다. 오늘 도망하는데 쫓는 자가 거의 미치니 어찌하랴?”고 하니,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건너자 다리가 없어지니 뒤쫓던 기병이 건너지 못하였다. 졸본주[현도군의 경계]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고 다만 초가를 비류수 가에 엮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본래 성은 해씨이다. 지금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하고 햇빛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고로서 성을 삼았다] 이 때 나이 12세였으니 한 효원제 건소 2년 갑신(기원전 37)에 즉위하여 왕이라 칭하였다. 


고구려의 전성기에는 21만 5백 8호였다. 주림전 제21권에는 “옛날 영품리왕의 시비가 임신을 하였는데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귀하여 왕이 된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기운이 하늘로부터 와서 그 때문에 내가 임신한 것이다’고 하였다. 아이가 태어남에 미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굿간에 버리니 말이 젖을 먹이어 죽지 않더니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 고 하였다.[곧 동명제가 졸본부여왕이 된 것을 말한다. 이 졸본부여는 또한 북부여의 별도이므로 부여왕이라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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