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220150509322


려당전쟁 현장중계 1 - 첫 전투

[고구려사 명장면 90] 

임기환 입력 2020.02.20. 15:05 


고구려 원정에서 당 태종은 수 양제와 달랐다. 중국 통일제국 황제로서의 자만심은 같았지만, 그 자만심을 실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여기에는 두 인물이 갖는 캐릭터 차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도 패배한 수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당 태종의 신중함 때문이었다. 그는 수양제의 패배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644년 11월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선포하면서 고구려 주변에 있는 거란, 해, 백제,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벌에 파병을 요구하였다. 특히 신라 사신 김다수(金多遂)가 644년에 귀국할 때 당태종의 국서를 보내 참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반응이 없자 645년 정월에 다시 국서를 보내어 신라의 참전을 독려하였다. 당시 신라는 642년 김춘추의 평양 방문에서 고구려와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고, 백제가 신라에 대한 공세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부득이 당과의 동맹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신라는 참전을 결정하고 고구려 남쪽 국경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이런 국제적인 동원 전략도 수양제 때에는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점이다. 당 태종은 고구려 남쪽에서 신라군을 동원함으로써 고구려 군사력의 분산을 꾀했던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고 판단한 당 태종은 645년 1월 육군 총사령관 이적(李勣)과 수군 총사령관 장량(張亮)에게 출정을 명하고, 3월에는 자신도 정주를 출발하였다. 2월에 유주에서 결집하여 요동으로 향한 당군은 요하선에 배치된 고구려의 방어망을 뚫기 위해 공격선을 여러 갈래로 나누었다.


당시 요서에서 요하를 건너 요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대체로 3길이 있었는데, 그중 요서 회원진(懷遠鎭)에서 요하를 건너 고구려 요동성으로 이어지는 길이 주된 교통로였다.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할 때 이용한 교통로로서 요하 중로(中路)라고 부른다. 이보다 북쪽으로는 통정진(通定鎭)에서 요하를 건너 고구려 신성(新城)을 향하는 요하 북로(北路)가 있며, 남쪽으로는 요하 하구를 건너 고구려 건안성(建安城)으로 향하는 요하 남로(南路)가 있다.


당군의 선봉대를 지휘하는 대총관 이적(李勣)과 부총관 이도종(李道宗)은 고구려의 요하 방어망을 돌파하기 위하여 일부 군대를 통상 사용하는 교통로인 회원진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위장하고는, 실제로는 주력 군대를 북으로 돌려 요하 북로를 이용하여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넜다. 이 때가 4월 1일이었다. 그리고 신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현도성을 공격하였다.


한편 영주도독 장검(張儉)은 요하 하로를 이용하여 요하를 건너 건안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장량(張亮)이 거느린 수군도 평양을 직공하지 않고, 요동반도 남단에 자리 잡은 비사성(卑沙城)을 공격하였다. 정작 주 교통로인 요하 중로는 비워놓았는데, 나중에 당 태종 본군을 이끌고 요하 중로를 이용하여 요동성으로 진군하였다.


이렇게 당군은 공격로부터 수양제의 침공 때와는 전혀 다른 전략을 구사하였다. 사실 수양제는 오직 요동성을 직공하는 길만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요하를 건너는 과정에서 시일이 지체되고 병력상으로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또한 주력을 요동성 공략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신성 등 다른 요충성들이 외곽에서 요동성을 지원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였던 것이다.


이에 당군은 수양제와 달리 요하 중로 길은 비워놓고 요하 북로를 이용하여 신성을 제압하고 요하 남로를 이용하여 건안성을 제압하여 일단 주변 성들이 요동성을 지원할 수 있는 후환을 없앤 후에 요동성을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이는 수양제 정벌의 실패를 거울 삼아 주도면밀하게 짜인 것이었다. 사실 이런 당의 전략에 의해 첫 전투에서 신성과 건안성이 제압당한다면 고구려로서는 매우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645년 고구려와 당의 전쟁 지도. 『한국고대사』1(한국역사연구회 시대사총서, 푸른역사)에서 인용함.


4월 1일 요하를 건넌 이적과 이도종의 군대는 현도성을 공략한 뒤 먼저 부총관인 이도종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이르렀는데, 신성의 고구려군은 나가 싸우지 않고 굳건하게 성을 지키기만 하였다. 신성은 고구려 서북의 요충지로서, 고구려 방어망에 있어서 그 위상은 요동성에 못지 않았다.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서 현도성, 신성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적이 본군을 모두 거느리고 신성을 공격하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4월 15일에 이적과 이도종은 군대를 남으로 돌려 고구려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였다. 개모성은 신성에서 요동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중간에 있는 중형급 성곽이었다. 당군은 개모성 공략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군을 원정하기 전부터 이미 갖가지 공성 도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밤낮으로 포차(砲車)를 쏘아 돌이 비처럼 성안으로 떨어지고, 운제(雲梯), 충차(衝車)가 번갈아 공격에 나섰다. 결국 10여 일 만인 4월 26일에 개모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당군은 2만여 명의 군사와 주민을 포로로 삼고, 군량 10만여 석을 얻었다.


그런데 당군도 적지 않은 손실이 있었다. 행군총관이었던 강행본(姜行本)이 개모성 공격 중에 전사한 것이다. 그만큼 고구려군의 저항이 강력했던 것이다. 주민을 포함해 포로가 2만명이라고 하였으니 그중 군사들 수는 수천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6만명에 가까운 당군이 개모성 공략에 10여 일이 걸린 셈이다. 그러하니 당시 당군은 앞서 신성을 쉽게 공략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이적 군대의 행로를 보면, 애초에 신성 공략 자체를 목표로 삼았던 것 같지는 않다. 4월 1일에 요하를 건너 현도성을 공략한 뒤 신성 공격에 나섰고, 4월 15일에 개모성을 공격하였으니, 신성을 공격하였다고 해도 그 기간은 10여 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적이 거느린 당군 선발대의 목표는 신성이 아니라 요동성이었다. 5월 초에는 당 태종이 본군을 거느리고 요동성에 도착할 예정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요동성을 고립시키고 당 태종의 본군이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주변을 확보하고, 요동성 못지않은 중진인 신성으로부터 구원군을 차단하는 것이 애초의 목적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신성에서 요동성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개모성을 공략에 중점을 뒀던 것이다. 이적은 개모성을 함락시킨 후 위정(韋挺)에게 지키게 하여 신성의 고구려군이 배후를 공격해 오지 못하도록 방어하게 하였다. 역시 고구려군이 개모성을 공격했는데, 역사서에 이후의 전황이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위정이 매우 두려워하며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다고 한 기록을 보면 신성에서 출진한 고구려군이 공세가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4월 5일 이도종이 신성을 공격할 무렵, 영주도독 장검(張儉)은 또 다른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 하로를 통해 요하를 건너 고구려 건안성(建安城) 공격했다. 첫 전투에서 장검 군에게 고구려군 수천 군사가 죽는 패배를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쨋튼 고구려군은 건안성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사실 장검의 군대 역시 건안성에 대해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지는 못한 듯하다. 장검 군대의 목적도 건안성의 고구려군이 요동성을 지원하는 것을 막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장량이 이끄는 수군은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요동반도 끝단의 비사성(卑沙城)을 공격하였다.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이어서 오직 서문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행군총관 정명진(程名振)이 밤에 병사를 이끌고 절벽을 기어올라 기습하였다. 방심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패배하고 비사성은 함락됐으며, 남녀 80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5월 2일이었다.


이렇게 당군의 기습적인 공격과 첫 전투에서 개모성, 비사성은 함락되었지만 고구려는 중진인 신성, 건안성을 지켜냈다. 따라서 신성과 건안성의 고구려군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이후 당군의 요동 작전은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4월 10일 유주를 출발한 당 태종의 본군이 5월 3일에 요하 일대의 저습지대인 요택(遼澤)에 도착하였다. 뻘밭이 200여 리에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하기 쉽지 않은 지형이었다. 하지만 이미 당군은 요택 통과를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장검이 이미 지형을 상세하게 살펴서 보고한 바 있으며, 일종의 공병 부대를 이끌던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펼치고 다리를 놓아 길을 확보하였다. 그래서 5월 5일 이틀 만에 요택을 지났다. 요하를 건너면 바로 요동성이었다.


5월 2일에는 이적의 군대가 요동성에 도착하여 당 태종의 본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요동성을 놓고 고구려군과 당군 사이에 벌어질 최대 격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고구려와 당 전쟁 과정에서 등장하는 고구려 성의 현재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차회에서 설명드리도록 하겠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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