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513153608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15)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 울란바토르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5.13 15:36 수정 : 2009.08.19 11:37 


현대화의 상징 매연, 초원도시 뒤덮다


매연이 자욱한 울란바토르시.


우리의 초원 실크로드 답사는 크게 대흥안령과 몽골, 그리고 시베리아의 3대 초원로 답사를 망라한다. 워낙 긴 노정이라서 한꺼번에는 답파할 수가 없어 지난 3년간 몇 구간으로 나눠 진행했다. 그 시기도 들쭉날쭉하거니와 길벗도 매번 달랐다. 몽골 초원로 답사만 해도 여름과 겨울 두 번 나눠 진행했다. 필자로서는 이 길에 첫 발을 내디딘 지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한 뒤의 일이라서 실로 감개무량했다.


2008년 1월11일(월요일) 오후 1시20분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EK(대한항공) 867편은 곧바로 기수를 북쪽으로 향한다. 서해의 만경창파가 너울거린다. 지상의 날씨는 꽤 화창하지만 하늘에서는 구름떼가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고비사막 언저리에 들어설 무렵에는 난류(亂流) 때문에 기체가 심하게 요동친다. 내내 안전띠를 풀지 못한 채 비행기는 가까스로 시속 650㎞를 유지하면서 고도 1000피트를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런 속에서도 기내 점심 한끼는 그럴싸했다. 5㎝의 길이로 네모반듯하게 자른 두부는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정도로 맛깔스러웠다. 전통음식의 국제화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약 2시간45분 동안 날아서 현지시간 오후 3시5분에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전번 OM(몽골항공) 302편보다는 약 30분 앞당긴 셈이다. 울란바토르와 서울 간의 시차는 여름엔 없으나, 겨울엔 서울이 1시간 이르다. 바깥 기온은 영하 20도를 웃돈다고 하지만 개인 날씨에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그런지 별로 추운 느낌이 안 든다.


그런데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숨 막힐 듯 매연이 엄습한다. 시내에 들어서니 길 좌측에 있는 화력발전소 굴뚝에서는 뿌연 연기가 타래타래 솟구친다. 이런 발전소가 이곳에 3개가 더 있다고 한다. 우측에 있는 가죽공장이며 빵공장에서도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난다. 공장은 물론, 겨울철 난방도 모두 연탄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창 공장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다니, 이 맑디맑은 초원에서 매연을 마구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도시의 생태적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시름이 가는 대목이다.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란 뜻의 울란바토르는 몽골인민공화국의 수도로서 몽골고원의 중부 헨티산 남쪽 기슭의 툴라강가에 자리하고 있다. 고도 1350m의 초원풍이 짙은 현대도시다. 남북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고 동서로 흐르는 툴루강을 따라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에 속한 이곳 연 평균기온은 영하 2.9도로서 겨울 최저기온이 영하 40도에 육박하며 여름 최고기온은 35도에 달한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정치·경제 문화의 심장이다. 공업생산액이 전국 공업 총생산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니 그 높은 비중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인구는 몽골 전체 인구 280만명 중 약 47%에 해당한 13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가운데 70%는 젊은이들이라고 하니 활기찰 법도 한 도시다. 4명 중 한 명이 학생일 정도로 향학열도 높은 편이다. 현대화로 치닫는 전통사회의 상례(常例)라고나 할까 이 도시에도 개혁·개방의 열풍이 바야흐로 밀려오고는 있지만,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의지와 자부심도 함께 실감하게 된다.


칭기즈칸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날 아침, 우선 앞으로 있을 긴 시베리아 여정에 대비한 채비로 칭기즈칸 백화점에 들렀다. 이름난 몽골 소시지며 빵, 김치(한국) 등 먹거리를 구입했다. 상품의 60%는 중국산이고 30%는 한국산이다. 한국산치고 없는 것이 없다. 그런데 한국산 가운데 60%는 ‘나쁜 사람’(불법 밀수꾼)들에 의해 거래되는 것이라고 4년간 한국에서 일하다 돌아온 현지 안내원이 귀띔한다.


간단한 쇼핑을 마치고 수하바타르 광장을 찾았다. 광장 한가운데 1946년에 세운 수하바타르 기마동상이 웅비하고 있다. 수하바타르는 1921년 몽골혁명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1923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영웅적 인물이다. 동상의 좌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 인민이 하나의 방향에서, 하나의 의지로 단결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지 못할 것이란 하나도 없고, 우리가 알지 못할 것도 없으며 불가능한 일도 없을 것이다.” 가슴 깊이 파고들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있는 말이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 울란바토르시.


이어 광장에서 남쪽으로 3㎞쯤 떨어진 자이산 언덕에 자리한 승전기념탑에 올랐다. 영하 20도를 훨씬 넘는 한겨울에 100개쯤 되는 돌계단을 조심조심 밟고 올라가니 저마다의 입가에는 성에가 희부옇게 끼었다. 1971년에 세운 이 기념비 정상의 한가운데는 전통적 몽골 등(燈)이 놓여 있으며, 그 주위는 폭 3m에 길이 60m나 되는 둥근 철근 콘크리트 벽이 에워싸여 있다. 벽의 외측에는 몽골의 전통 문양을 배경으로 소련과 몽골의 각종 훈장과 메달이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내측에는 두 나라의 우의와 상호원조를 상징하는 모자이크 벽화가 쭉 그러져 있다. 그중에는 일제와 나치 독일의 깃발을 밟아 찢는 인상적인 장면도 눈에 띈다. 이 기념탑 곁 산정에는 하늘 높이 휘날리는 깃발을 배경으로 하고 한 손에 무기를 굳게 잡은 한 병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흥미 있는 것은 이 기념탑과 나란히 파란 천 조각이 나팔거리는 오보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 탑의 수호신 역할을 기대해서일 것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울란바토르시가 한눈에 안겨 온다. 시 전체가 자욱한 연기 속에 묻혀 있다. 그리고 왼편으로 눈을 돌리니 한국 조계종이 선사한 커다란 금불상이 빛을 발하고 있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몽골에서 가장 큰 불상의 높이가 26m로서 그 이상을 초과할 수 없다는 불문율 때문에 저 금불상의 높이는 25m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보면, 무엇이나 최대 최고가 으뜸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으뜸은 실속에 있다.


이 기념비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우리의 애국지사 대암 이태준(大岩 李泰俊) 선생의 기념공원과 묘가 자리하고 있다. 선생은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07년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해 1911년에 제2회로 졸업한다. 안창호 선생이 만든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2년 중국 난징(南京)으로 망명해 ‘기독교의원’에서 의사로 활동한다. 그러던 중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몽골 후레로 가서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차려 당시 몽골에 유행하던 화류병 퇴치에 앞장서면서 몽골 마지막 황제의 주치의가 된다. 그 공로로 1919년 몽골정부로부터 ‘에르데닌 오치르’라는 최고 훈장을 받는다. 그러다가 1921년 2월 일본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러시아 백군(白軍)에게 피살된다. 향년 38세의 젊은 나이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열사의 숭고한 얼은 영생불멸할 것이다.


다음으로 발길을 옮긴 곳은 복트칸 궁전박물관이다. 원래 이곳은 혁명 전에는 제8대 활불(活佛)의 동궁이었다. 만청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금의 건물은 1919년에 지은 것으로서 못 하나 안 쓰고 순 나무로 지었다는 특징이 있어 보존가치가 높다. 최근에는 중국 측의 원조로 말끔히 복원되어 가고 있다. 관내에는 제8대 활불이 쓰던 생활용품과 티베트 불교의 만다라(曼茶羅)와 불상, 그리고 독일 황제가 보내온 조류 박제품을 비롯해 각국에서 헌납한 각종 동물 박제품이 눈길을 끈다. 많은 그림도 걸려 있는데, 그중 한 점이 웃음을 자아낸다. 모임에 지각하는 자는 벌주로 큰 대야에 담은 마유주를 마시게 한 다음 억지로 토하게 하고는 모임에 참석하도록 하는 해학적인 장면의 그림이다.


반년 전 울란바토르를 찾았을 때도 여러 박물관과 유적들을 둘러봤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연사박물관은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다. 1924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에는 각종 광물자원과 동식물 표본, 그리고 신·구석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고비사막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출토된 대형 공룡의 골격 표본은 이 박물관의 백미로서 일찍부터 고생물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왔다. 기괴한 운석이나 공룡 알 화석은 신비감마저 자아낸다. 그 밖에 1838년 제5대 활불이 세운 간단 사원은 티베트식 불교사원으로서 작금 민족문화 부흥운동의 상징으로 중시되고 있다. 한때 사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가 1940년에 회복된 후 1970년에는 사내에 종교대학이 문을 열어 불교 진흥에 기여하고 있다. 경내에는 라마교식으로 오체투지하는 모습도 보인다. 관음당에는 높이 25m의 대형 관음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 상은 맹인인 제8대 활불(1911~1924 재위)이 치유를 기원해 세운 ‘개안(開眼)관음’이다. 이러한 유적지 말고도 가볼 만 곳으로는 몽골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민족역사박물관이나 자나바자르 미술관 등이 있다. 그리고 근교에는 전통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산 중턱에 칭기즈칸 초상이 그려진 울란바토르시.


울란바토르 시내를 거닐다 보면, 이 도시가 발달해 온 연혁과 현재의 모습에서 세계 도시사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원래 도시는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도읍이나 상업적 중심지로서의 시장으로부터 싹터서 형성 발달하는 것이 통칙이다. 그러나 울란바토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애초부터 줄곧 이동이 상습화된 유목공간에서 태어난 초원도시로서 정착에 의한 도읍이나 시장으로 출발할 수는 없었다. 대신 이 도시의 맹아는 1639년 첫 활불이 헨티산에 이동사원인 게르사원(‘오르고’)을 세운데서 싹트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약 140년간 그 부근을 ‘오르고’라고 불러왔다. 활불이 운영하는 이 이동사원이 번성함에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자 시장이 생겨나고 사람들을 관리할 행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급기야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게르사원이 점차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정주 도시화의 단초가 되었다. 이렇게 도시화의 정초(定礎)가 마련되어 가다가 드디어 18세기 말엽에 오늘의 울란바토르 동편에 시가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곳을 ‘쿠룬’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울란바토르로 개명하고 정식 국도로 삼았다. 이렇듯 370년의 역사를 지닌 울란바토르는 세계 도시사에서 하나의 특이한 전범을 만들어냈다. 도시사 중심의 역사연구가 하나의 방법론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범과 더불어 오늘날 울란바토르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색다른 도시의 면모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몽골 친구의 말에 의하면, 현대적 시설을 갖춘 도시의 아파트에서 사는 젊은이들은 아파트가 사는 데 편리하기는 하지만 통풍이 되지 않아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래서 주말은 근교에 사는 부모 집에서 보내고, 여름휴가 때는 조부모가 사는 초원에 가서 보낸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늙은이들은 탁 트인 초원공간에서 살고 싶어 밀폐된 아파트를 기피하니 울란바토르 인구의 70%는 젊은이들일 수밖에 없다. 도심의 아파트와 근교에 널려있는 게르, 도시의 정주와 초원의 유목은 분명 전통과 현대의 아우름이다. 우리네 성황당에 맞먹는 오보가 전승기념탑을 지켜주듯, 어디를 가나 지천에 깔려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전통과 현대의 엄연한 공존이다. 그밖에 일상의 행위나 예의범절, 가치관이나 도덕관 등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얼마든지 감지하게 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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