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url.jsp?ID=tc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38871http://ko.wikipedia.org/wiki/%EB%AC%B4%EB%A0%B9%EC%99%95

온조왕 [溫祚王]

백제 제1대 국왕
생몰 : ?∼28년(다루왕 1)
재위: 기원전 18년~기원후 28년
이름 :
해온조 
가계
    부왕 : 미상 - 고구려 동명성왕(高句麗 東明聖王)이라는 설도 있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의 전남편 동부여(東夫餘) 해부루왕(解夫婁王) 서손 우태(優台)의 소생이라는
                      설도 있다.
    모후 : 소서노(召西奴) - 현재 정설로 인정 받는 온조(溫祚)중심의 백제(百濟) 건국 설화에 따르면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졸본(卒本) 부여왕(夫餘王)의 둘째 딸이라고만 기록 되어 있다.
             졸본(卒本) 부여(扶餘) 공주(公主) :  또 다른 설인 비류(沸流) 중심의 백제(百濟) 건국 설화에 따르면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라는 설도 있다.
    형 : 비류(沸流)
    왕후 : ?
         장남 : 백제 2대 임금 다루왕(多婁王,)
         차남 : ?
         셋째 아들(?) : 덕좌왕


기원전 18년 5월 [온조왕 1년 5월] 동명왕묘를 세움. 
기원전 18년 [온조왕 1년] 비류 온조 졸본부여에서 남하 
기원전 17년 1월 [온조왕 2년 1월] 말갈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방비를 강화함. 
기원전 17년 3월 [온조왕 2년 3월] 을음(乙音)을 우보(右輔)로 삼음. 
기원전 16년 9월 [온조왕 3년 9월] 북쪽 경계를 습격한 말갈을 격파함. 
기원전 15년 10월 [온조왕 4년 10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우호를 닦음. 
기원전 15년 [온조왕 4년] 봄과 가을에 가뭄과 전염병이 발생함. 
기원전 14년 10월 [온조왕 5년 10월]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며 사냥 
기원전 13년 7월 [온조왕 6년 7월] 일식이 있었음 
기원전 12년 2월 [온조왕 8년 2월] 위례성을 포위한 말갈을 대부현(大斧峴)에서 격파함.  
기원전 12년 7월 [온조왕 8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음. 낙랑과의 화친 깨짐. 
기원전 9년 9월 [온조왕 10년 9월]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로운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냄. 
기원전 9년 10월 [온조왕 10년 10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 
기원전 8년 4월 [온조왕 11년 4월] 낙랑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게 함. 
기원전 8년 7월 [온조왕 11년 7월]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 
기원전 6년 2월 [온조왕 13년 2월] 왕의 어머니가 죽음. 
기원전 6년 5월 [온조왕 13년 5월] 한산에 도읍을 세우고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함. 
기원전 6년 7월 [온조왕 13년 7월] 한산(漢山)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 
기원전 6년 8월 [온조왕 13년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한과의 경계 
기원전 6년 9월 [온조왕 13년 9월] 궁성과 대궐을 세움.  
기원전 5년 1월 [온조왕 14년 1월] 도읍을 옮김. 
기원전 5년 2월 [온조왕 14년 2월] 왕이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장려함. 
기원전 5년 7월 [온조왕 14년 7월]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함. 
기원전 5년 [혁거세왕 53년] 동옥저의 사신 신라에 좋은 말 20필을 바침. 
기원전 4년 1월 [온조왕 15년 1월] 궁실을 세움. 
기원전 2년 4월 [온조왕 17년 4월] 국모의 사당(廟)을 세움. 
기원전 2년 [온조왕 17년] 낙랑이 쳐들어와 위례성에 불질렀음. 
기원전 1년 10월 [온조왕 18년 10월] 말갈을 칠중하에서 격퇴시키고 추장 소모 
기원전 1년 11월 [온조왕 18년 11월]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 
1년 음2월 [온조왕 20년 2월] 왕이 큰 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냄.  
4년 음8월 [온조왕 22년 8월] 석두성과 고목성을 쌓음. 
4년 음9월 [온조왕 22년 9월] 왕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부현 동쪽에서 사냥 
6년 음7월 [온조왕 24년 7월] 웅천책(熊川柵)을 세웠으나 마한왕이 책망 
7년 음2월 [온조왕 25년 2월] 진한과 마한을 병합할 뜻을 가짐. 
8년 음7월 [온조왕 26년 7월] 마한을 병합할 계획을 말함. 
8년 음10월 [온조왕 26년 10월] 마한을 습격하여 국읍을 병합함. 
9년 음4월 [온조왕 27년 4월] 마한의 원산성(圓山城)· 
9년 음7월 [온조왕 27년 7월] 대두산성(大豆山城) 쌓음. 
10년 음2월 [온조왕 28년 2월]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사업무를 맡김. 
10년 음4월 [온조왕 28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침.  
13년 음1월 [온조왕 31년 1월] 국내 민호를 남·북의 2부(部)로 나눔. 
13년 음5월 [온조왕 31년 5월] 지진 발생함. 
13년 음6월 [온조왕 31년 6월] 지진 발생함. 
15년 음8월 [온조왕 33년 8월] 봄과 여름에 큰 가뭄 발생함. 
16년 음10월 [온조왕 34년 10월] 옛 마한의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서 반란 
18년 음7월 [온조왕 36년 7월] 탕정성(湯井城) 쌓음. 
18년 음8월 [온조왕 36년 8월]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축조 
20년 음2월 [온조왕 38년 2월] 주양(走壤)·패하(浿河) 등 북쪽 경계를 순행함. 
22년 음11월 [온조왕 40년 11월] 말갈이 술천성(述川城)·부현(斧峴)을 습격. 
23년 음1월 [온조왕 41년 1월] 해루(解婁)를 우보(右輔)에 삼음.  
23년 음2월 [온조왕 41년 2월] 위례성(慰禮城) 개축. 
25년 음8월 [온조왕 43년 8월] 아산(牙山)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함. 
25년 음9월 [온조왕 43년 9월] 큰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임. 
25년 음10월 [온조왕 43년 10월] 남옥저 구파해(仇頗解) 등 
27년 음10월 [온조왕 45년 10월] 지진으로 민가가 재난을 입음. 
28년 음3월 [온조왕 46년 3월 : 다루왕] 온조왕 죽음, 다루왕 즉위함 


[개설]

온조(溫祚)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위례성(慰禮城)에 토대를 둔 백제 왕실의 시조이다. 현존 문헌들에는 백제의 시조로 전하는 인물들이 온조, 비류(沸流), 구태(仇台) 등 여러 명이며, 온조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백제 초기에는 북쪽에서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남하한 부여족의 여러 집단들이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들 중 연맹체를 주도한 대세력으로는 먼저 미추홀(彌鄒忽: 현재의 인천 부근으로 추정)에 웅거한 집단이며, 뒤이어 패권을 잡은 것이 위례성(현재의 서울 風納土城 또는 경기도 廣州 부근으로 추정)의 집단이었다. 미추홀에서 일어난 집단의 시조로 전하는 것이 비류이고, 그 뒤에 권력을 장악한 위례성집단의 시조가 바로 온조이다.

[생애 / 활동사항]

『삼국사기(三國史記)』등에는 온조의 아버지를 동명(東明)이라 하는 한편, 동명을 백제의 시조라고도 하였다. 현존 문헌들에 의하면, 북부여(北扶餘)·고구려(卒本扶餘라고도 함)·백제(南扶餘라고도 함) 등 부여족 사회들은 모두 동명을 시조라 하고, 그를 숭배하는 제전(祭典)을 각기 가지고 있었다. 온조의 아버지가 동명이라 하는 것도 그러한 부여족 일반의 상황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건국설화가 다양하고 그 건국시조에 대한 이견(異見)이 많은 것은 그만큼 백제를 형성한 지배집단의 계통이 복잡하다는 방증이다. 또한 온조와 비류가 형제라고도 하였다. 이는 두 집단의 연맹관계를 형제의 관계로 강조하기 위해 만든 연맹설화(聯盟說話)의 구성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비류가 형으로 기록된 것은 초기 에는 온조계 집단보다 비류계 집단의 세력이 우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위례의 온조계 세력이 위례지역의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후기에 와서는 비류계 집단을 포섭하여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온조계 집단이 비류계 집단을 아울렀던 시점은 서기전 18년이었다는 견해와 온조왕 치세 어느 시기였다는 견해, 온조왕대가 아니라 한참 후대의 시기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온조왕은 백제의 성장을 위협하는 낙랑군(樂浪郡)의 사주를 받은 말갈(靺鞨)의 침공을 수 차례 막아냈다. 또한 마한(馬韓) 영역의 일부를 복속시켜서 일련의 정복사업을 마무리했고 낙랑군 침공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백제는 주변의 낙랑·말갈·마한 등 외부 세력의 압력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새로 편입된 지역을 원활하게 통제하기 위한 지방통치구획으로 부(部)를 설치했다.

하지만,『삼국사기』등에 온조왕 치세(治世)의 일이라고 한 것들의 상당한 부분은 실제로는 백제의 발전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일들을 소급해놓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를테면, 온조왕대에 마한지역 전체를 통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마한 전체를 정복한 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의 일이다. 또한 백제연맹체의 주도권이 미추홀 왕족으로부터 위례성 왕족에게 넘어간 것이 온조왕대였다는 것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연맹장의 역할을 넘어서는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는 것도 온조왕대에서 훨씬 후대인 고이왕(古爾王)대에나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러한 견해에 반하여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 성과에 힘입어 온조왕 치세의 업적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한성백제사(漢城百濟史)』(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8)
『백제 역사(百濟 歷史)와 문화(文化)』(노중국,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8)
『백제(百濟)의 왕권(王權)』(문안식, 주류성, 2008)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노중국·정재윤·김영심·김기섭, 서경문화사, 2007)
「백제의 건국 시기와 주체세력」(김기섭, 『선사(先史)와 고대(古代)』27, 한국고대학회, 2007)
「백제(百濟)의 동명신화(東明神話)와 동명묘(東明廟)」(노명호, 『역사학연구(歷史學硏究)』Ⅹ, 1981)
『한국사(韓國史)-고대편(古代篇)-』(이병도,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959)
위례성(慰禮城)|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미추홀(彌鄒忽)|비류(沸流)|동명(東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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