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206152100940


당태종 군대의 전력은 어느 정도였나?

[고구려사 명장면 89] 

임기환 입력 2020.02.06. 15:21 


645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하기 위해 편성한 군대의 규모나 전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런 기본적인 질문에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중국 역사서 어디에도 당시 당태종이 이끈 군대의 총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양제의 대군에 대해서는 시시콜콜하게 24군의 편성과 병력의 총수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사관들이 갑자기 당 태종의 군대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 아무래도 여기에는 당 태종의 패배를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덮어보려는 혐의가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일단 역사서에 나와 있는 몇몇 기록을 종합하여 추정해보자.


'신당서' 등에 의하면 645년 1월, 당태종은 육군 총사령관 이적(李勣)으로 하여금 보·기병 6만과 거란·말갈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유주에서 요동으로 진격하고, 또 수군 총사령관 장량(張亮)으로 하여금 500여 척의 전함과 4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동반도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을 향하게 명령하고, 3월에는 자신도 정주를 출발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적 휘하에 행군총관이 14명에 군사가 6만명이었다고 하였다. 행군총관은 일종의 단위부대 지휘관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총관 1명이 4000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렸다고 볼 수 있다.


다음 당 태종이 직접 거느린 본대의 병력 수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지만, 한 가지 유추가 가능한 단서는 당 태종의 본대에서 장손무기가 26명의 총관을 통령하였다는 기록이다. 앞서 이적의 선봉 부대 사례를 통해 총관 1인당 4000명 정도의 병력으로 계산하였는데, 이를 적용하여 계산하면 대략 10만명이 넘는 병력 수가 된다. 여기에 그리 많은 수는 아니겠지만 당 태종의 친위군을 따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손무기가 태종의 시종이 10명에 불과한 점에 대해 천자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간언하자, 태종이 "군사들이 10만명이나 집을 떠나 요하를 건너왔는데" 운운하는 기사가 '신당서' 고구려전에 있는데, 여기의 10만 병력이 곧 당태종이 거느린 본대를 가리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군의 행렬도 (막고굴 벽화) / 사진=바이두


다음 장량이 거느린 수군은 병력 수가 4만명이라는 기록과 7만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4만명이란 기록이 다소 신빙성이 높다고 보인다. 애초에 수군에게 부과된 임무는 육군이 요동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평양으로 직공하는 전략이었고, 처음에는 이도종(李道宗)을 수군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런데 막상 당 태종이 원정길에 나서면서 전략을 바꾸어 이도종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행군대총관인 이적과 더불어 육군을 통솔케 하고, 수군의 행군대총관으로 장량을 임명한 것이다. 즉 4만명 혹은 7만명이라는 수군 병력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은 이와 같은 수군의 전략 변화에 따른 결과가 아닐까 싶다.


4만명이든 7만명이든 이 정도의 병력으로 평양 공격이 가능하다고 당 태종이나 당군의 수뇌부가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평양을 직공하는 수군의 목적은 고구려 중앙군 병력이 요동지역으로 지원할 수 없게끔 압록강 이남이나 평양 일대에 묶어두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략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수군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원정길에서는 육군과 더불어 같은 전선에서 수군을 운용하기로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 결과 장량의 수군은 고구려 비사성 공격을 1차 목표로 하되, 더 이상을 독자적인 진격은 없었다.


이렇게 보면 이적의 육군 선발대가 6만명, 장량의 수군이 4만명, 당 태종이 거느린 본대가 10여만명 등 도합 20여만명 정도의 병력이 된다. 그런데 아직 계산하지 않은 군대가 더 있다.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거느린 부대이다. 당시 장검은 영주도독부 소속의 군사와 이외에 거란, 해 등 유목민의 군대를 별도로 거느렸다. 혹자는 이 장검의 군대를 이적의 선발대 6만 병력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645년 전쟁 이전부터 장검의 동태를 보면, 상당수의 병력을 따로 거느린 듯하다. 장검은 644년에 영주와 유주의 군사 및 거란, 해, 말갈 군사를 이끌고 먼저 요하 방면으로 진군하였다가 요하가 범람하면서 멈춘 적이 있다. 또 645년 전쟁 직전에도 연개소문이 요동에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연개소문과 겨루기 위해 신성쪽으로 진군하려다가, 연개소문이 나타나지 않자 경로를 바꾸어 건안성으로 공격 루트를 바꾸었던 것이다.


이처럼 장검이 거란이나 해의 군사를 포함하여 독자적인 군대를 통솔하여 이적의 군대와는 별도의 진공 작전을 수행하고 있음이 유의된다. 다만 장검이 대총관이 아니었음을 고려하면 이적의 군대 6만명, 장량의 군대 4만명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독자적으로 고구려 건안성 공격이 가능한 병력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안시성 전투를 벌이기 전에 당군의 수뇌부가 작전회의 하는 과정에서 "신성과 건안성의 군사가 10만명"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다소 과장되었다고 하더라고 건안성의 군사 규모 역시 그리 적지 않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요동성의 군사가 2만명 이상이었음을 고려하면 건안성 역시 최소한 2만명 정도의 군사력을 갖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2만명이 지키는 건안성을 공격하려는 장검의 군대 역시 그 이상 수만명이 되었으리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645년 전쟁에서 당태종이 동원한 병력은 대략 25만명 전후의 규모였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수양제가 2차 원정에서 요동성을 공격할 때 동원한 병력이 30만명 정도라는 점과 비교하면 그리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그런데 수양제의 2차 원정 때에는 평양 공격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고 요동성 공격 자체가 목표였던 듯하다. 그런데 645년에 당 태종은 최종적으로는 평양 공격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때 동원된 당군의 25만명 내외의 군사는 수양제가 동원한 군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 태종을 비롯한 당군의 지휘부는 수 왕조 멸망 이후 할거하던 중국 대륙의 군웅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한 주역들이며, 중국 통일 이후에는 주변의 돌궐이나 설연타, 고창 등을 모두 굴복시키며 승승장구한 지휘관들이다. 이들의 전투 경험이나 능력은 수양제의 군대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수양제의 요동성 공격 실패를 잘 아는 당 태종은 염림덕과 강행본에게 명하여 갖가지 공성기구를 제작하도록 준비하였다. 고구려의 수성전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만큼 공성을 위한 준비에 있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는 철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645년에 동원된 당군의 전력은 아마도 당대 최강의 전투력을 갖춘 군대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여러 해 동안 만반의 전쟁 준비까지 마친 상태이니, 원정 길에 나선 당 태종이 고구려 정복을 당연한 결과라고 자신할 만했다. 그러나 이 무패의 상승군도 고구려 땅에서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가장 강력한 반격에 직면해야 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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