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연쇄살인범 순화군(順和君) (?∼1607, ?∼선조 40) 

순화군 이보는 순빈김씨(順嬪金氏)의 소생이며,  서열상 여섯째 왕자이긴 하지만  나이로 보면 1574년에 출생한 임해군(臨海君)과 그 다음해 태어난 광해군에 이어 세번째 정도는 될 것으로 추측된다. 임란 당시 장인 황혁등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기 위해 강원도로 갔던 점을 볼 때 16세 보다 더 적다고는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왜군이 강원도로 진입하자 임해군이 있던 함경도로 피난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재산강탈과 군민폭행이 매우심해, 국경인등에 잡혀 왜장 가토에게 포로로넘겨지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왜군과의 협상에의해 포로로 풀려난 후 신계(新溪) 라는 곳에 한동안 머룰게 된다. 하지만 순화군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임의로 형벌을 가하여, 1597년 정언 이이이첨이 선조(宣祖)임금에게  파직을요청하기에 이른다.

순화군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괴팍하였다는 기록등을 고려 할 때, 개인적인 견해로  그의 행동은 단지 심리현상에서 오는 일탈행동뿐 아니라  뇌 계통의 이상증상에 의해 오는 병리현상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의 의료수준상 그런 판단을 내리긴 힘들겠지만, 어려서 부터 이상증상을 보인만큼 각별한 관심과, 초기에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조치가 취해졌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선조임금은 순화군을 무조건 감싸주었고, 순화군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보여주기라도 하듯, 임란이 끝난 1599년 부터 무차별적인 살인를 일삼기 시작한다.
 
만약 순화군의 보통 사람이었거나 설령 정승판서의 아들이었더라도 잘못나가는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1599년 3월  이필영(李必榮)은 좀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순화군에 대한 파직을 요청하였다. 내용은 순화군이 강가에 나가 살면서 이웃 사람을 타살(打殺)하였는데 피살자의 연고자가 위세에 눌려 소장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비망록에는 살인을 여러차례 하였다고 나와있어, 그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한두명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조는 모든것을 자기탓으로 돌리며, 순화군의 파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순화는 어머니인 순빈김씨를 모시던 궁인을 겁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번에는 아무리 선조임금이라도 그를 옹호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살인보다도 오히려 폐륜과 강상죄를 더 중대범죄로 치급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화군은 왕이 총애하는 왕자라는 이유만으로 수원으로 유배하는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순화군은 수원으로 내려가서도 여전히 위세를 부리며, 각종 패악질을 부렸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이유로 그 곳 향리 두명에게 직접 형장을 가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순화군의 패악질을 막기 위해서는 유배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 가택연금으로 처벌을 강화시켰다.

연쇄살인을 가능케 한 권력의 힘

그런데 순화군은 가택연금을 당하였지만 수문(水門)을 부수고 나와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직접 형장을 치기를 수차례나 하였다. 그의 범죄행위가 얼마나 심하였는지 1601년 2월에 있었던  한 사건을 살펴 보자.

당신 맹인을 남편으로 두고 있던 무녀는,  장석을시라는 사람의 집에서 역병을 쫓기 위한 굿을 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도 술에잔뜩 취한 순화군은 우연히 장석을시의 집에 들리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묻지마 식의 잔혹한 살인 행위가 시작된다.

순화군은 먼저 무녀의 위아래 이빨 각 1개를 뽑고, 이어 장석을시 의 위아래 이빨 9개를 작은 쇠뭉치로 때려 깨고 또 집게로 잡아 뺐다. 곧 무녀는 유혈이 얼굴에 낭자하였으며 피가 목구멍에 차 숨을 쉬지 못하여 즉사하고 말았다. 장석을시는 이튿날이 되어서야 구조되었지만, 목숨이 위급하여 곧 죽을 상황이었다. 조선시대 의료사정으로 보았을 때 장석을시라는 사람도 사망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순화군의 범죄는 점점더 흉폭해져 갔지만, 1601년 순화군의 군호(君號)를 박탈하여 더이상 위세 부리지 못하는 정도에 그쳤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순화군의 하옥및 단죄를 거듭 요청하였지만, 선조임금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선조는 모두 종들과 무뢰한 무리들이 종용했거나 유도한 탓일 것이라 며 여전히 순화군을 두둔하였다. 아버지로써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쩔 수 없지만, 국가 최고 통수권자로 그 같은 범법행위를 옹호한 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로부터도 순화군의 무차별적인 살인행위는 그치질 않았는데, 실록에는 순화군을 남대문(南大門) 밖에 있는 인가(人家)에 안치했는데, 그 인가는 사통 팔달한 큰길 가운데 있어서 사람들이 감히 그곳으로 다닐 수 없게 되었다고 나온다.

1604년 5월에도 길가던 두 여인을 아무 의유없이 살해하여 조정의 의견이 들끓었지만, 선조는 여전히 비호하여 재상들조차 더이상 말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사헌부가 6월 말까지 집중적인  탄핵을 한 끝에 선조로부터 순화군에 대한 처결을 위임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순화군이 문앞에서 연좌농성하는탓에 봉쇄조치는 몇달이나 미뤄졌다.
 
또  10월 들어 날씨가 추워지자 좀 더 따뜻한 가옥으로 옮겨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에 순화군의 부탁을 들어주는 척 다른 가옥으로 옮긴 후 재빨리 문을 폐하고 담장을 높이 치는 봉쇄조치를 단행하였다.그러나 그때에도 순화군은 화를 참지못하여 가옥봉쇄작업을 하고 있던 군관을 살해하겠다고 위협 할 정도였다. 

이렇듯 살인과 패악질을 일삼던 순화군도 1607년 3월  30대를 전후한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졸기에는 성질이 패망(悖妄)하여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부렸으며,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하였다고 나와있다.
 
1599년부터 순화군에 대한 파직상소가 올라와 1603년까지 절정을 이루었으니, 그의 손에 의해 직접 살해된 희생자만 해도 40여 명에 이른 것이다.

덧붙여 말해두자면 왕실의 범죄행위는 결코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다. 또 민중에 대한 생명과 재산 존중의식에 대해서는 오히려 조선이 그시대의 다른국가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그러한 조선에서조차 이처럼 생명존중 열악하였으니, 그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는가? 

어릴때 부터 분명한 이상행동을 보인만큼, 선조는 어쩌면 아버지로서 자식을 지나치게 방치하고 방관하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울러  법 적용과 집행은 만인에게 절대평등해야 됨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