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위의 시행령’ 정부가 법치주의 흔든다
등록 : 2013.11.03 19:56수정 : 2013.11.03 22:36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에서 전교조 법외노조화까지
시행령으로 대체해 ‘법률 무력화’…초월적 내용 담기도
MB정부 이후 시행령 헌소 급증…“행정 권위주의” 지적

“가습기 살균제로 127명이 죽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는데도, 정부가 2년 동안 방치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국회에서 피해자 구제 법안을 만들려고 하니까 정부가 갑자기 피해자 의료비 지원안을 발표했어요.”

지난달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만난 백승목(40)씨는 흐린 날씨만큼이나 답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백씨는 2006년 시중에서 파는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 멀쩡하던 세살배기 딸을 잃었다. 백씨 같은 피해자들의 아우성 속에 올해 들어 야당 의원 발의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법’이 추진되자 기획재정부가 반대하고 나섰다. ‘국민의 건강 피해를 예방·관리하기 위해 정부가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의 환경보건법 20조에 따라 관련 시행령을 바꿔 피해 지원에 나서겠다는 논리다. 피해자 가족으로서는 무게감이나 지속성 측면에서 별도로 ‘법률’을 만드는 것과 정부가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시행령’으로 대체하는 것이 같을 수 없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화나게 하는 건 또 있다. 각종 화학물질로 인한 사고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올해 국회가 제정한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이 정부의 시행령에 의해 무력화될 처지에 놓였다. 이 법은 위반 사업자에 영업정지 대신 해당 사업장 매출액의 5% 한도에서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는데, 정부는 시행령에서 ‘중대한 과실을 연속적·고의적으로 내는 경우’에 한해 법을 적용하도록 제한했다. 상위법인 법률이 하위법인 시행령에 의해 힘을 잃은 셈이다. 기업들 반발이 작용한 탓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족모임’의 강찬호 대표는 3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국민의 건강 문제가 직결돼 있는데, 당연히 규제가 강화돼야 하는 것 아니냐. 업계가 정부에 로비를 해서 국회가 만든 법률이 무력화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불거진 전교조 법외노조화 사태는 ‘노조 아님 통보’ 규정을 담고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시행령이 불씨가 됐다. 모법에는 관련 조항이 없다. 학교폭력 사건의 학교생활기록부 기록 논란도 초중등교육법에 열거된 기록 대상 목록에도 없는 내용을 교육부가 자체 훈령에 담았다가 진보 교육감들과 부딪치면서 벌어졌다. 영유아 보육비의 국가-지방자치단체 분담비율 갈등은 국고보조율을 20%포인트 올리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중인 상황에서 기획재정부가 보조금관리법 시행령을 개정해 국고보조율을 10%포인트만 올리기로 해 야당의 격한 반발을 부른 경우다.

이처럼 온갖 사회문제의 배경에 ‘법 위의 시행령’이라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문제는 국회가 만든 상위 법령인 법률의 규정을 넘어서거나 이와 모순되는 내용을 행정부가 하위 법령인 시행령에 담는 데서 비롯한다. 이른바 ‘위임입법의 한계 일탈’이다.

이명박 정부 최대의 문제적 사업인 4대강 사업도 국가재정법 시행령 개정으로 보 설치와 준설 등의 예비타당성조사를 실시하지 않도록 해 3년 만에 사업을 마무리했다. 이에 대해 부산고등법원은 지난해 “(시행령은) 모법인 국가재정법의 입법 목적에 정면으로 반하여 그 위임 범위를 벗어난 해석으로,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런 현상은 이명박 정부 이후 심해지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작동원리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3일 헌법재판소가 집계한 ‘각 행정부처가 제정한 시행령과 지침을 대상으로 헌법재판소에 제기된 헌법소원 현황’을 보면, 노무현 정부 시절(2002~2007년)에는 한 해 평균 48.8건이 접수된 반면, 이명박 정부(2008~2012년) 때는 평균 65.4건으로 크게 늘었다. 올해 들어서는 9월 말까지만 해도 모두 73건이나 접수돼 앞으로 ‘법 위의 시행령’ 문제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오를 것임을 보여준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이를 두고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법의 지배’를 위협하는 것이다. 국회가 입법권자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행정부가 권위주의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이런 모순이 빚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은 ‘행정 민주주의’란 형용모순의 표현을 썼는데, 정치는 낭비이고 시끄럽기만 하니까 국익을 위해 행정부가 권한을 갖고 일하겠다는 의미였다. 지금 이 표현이 떠오르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음성원 기자 esw@hani.co.kr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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