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한중 역사전쟁] (상) “난하 현장조사·자료 재분석…고조선 강역설 재검토해야” - 한겨레

civ2 2025. 7. 5. 22:27
 
“난하 현장조사·자료 재분석…고조선 강역설 재검토해야”
[기획르포, 한중 역사전쟁 현장을 가다] (상) 고조선의 강역은 어디까지인가
노형석 기자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15-08-05 19:03

한-중 역사전쟁 현장 답사 지역
 
<한겨레>는 국사편찬위원회·동북아역사재단 답사단과 한-중 역사분쟁과 고조선 강역 논란의 현장인 산해관과 갈석산, 랴오닝성·네이멍구 일대의 홍산유적 등을 돌아봤다. 7월13일부터 18일까지 이어진 답사 여정을 3차례 소개한다.
 
역사의 강 ‘난하’가 눈앞에 흘러간다. 고조선, 고구려, 고려, 조선의 사신, 상인, 병사들이 중원으로 건너갔던 물길이다. 강 양쪽 기슭엔 미루나무 숲이 무성하고 물가에선 아이들이 멱을 감는다. 600~700년 전 큰 배들이 올라왔던 난하는 상류의 취수 때문에 지금은 바닥이 곳곳에 드러날 정도로 물이 말랐다.
 
고조선
 
지난달 13일 여정을 시작한 국사편찬위·동북아역사재단 답사단은 40도 넘는 폭염과 먼지 속에 난하를 만났다. 많은 지류가 겹친 강은 조망할 곳을 찾기 어려웠다. 난하를 낀 허베이성 루룽(노룡)현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께. 옥수수밭 길과 먼지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 20여분 만에 난하에 이르러 강줄기를 바라본다.
 
조영광 국사편찬위 연구사는 난하를 “고조선 강역 논란의 주된 무대”라고 했다. 재야사학자들은 난하를 고조선 서쪽 경계로 추정한다. 고조선의 특징적 유물인 비파형 동검 출토 영역의 서쪽 경계가 대체로 난하 일대이며, 강 동쪽 루룽현이 주 왕조가 기자를 조선 제후에 봉한 옛 땅이란 일부 중국 문헌기록이 전하기 때문이다. 반면, 주류 학계는 난하 유역에서 은주대 청동제기가 다수 출토되며, 난하 등 요서 일대의 비파형 동검은 요동·한반도 동검과 특징이 다소 달라 고조선 강역과 밀접한 관계가 없다는 입장이다. 역사학자 천관우도 1977년 ‘난하 하류의 조선’이란 논문에서 고조선 강역설은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강가를 응시한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20년 전 얼어붙은 난하를 둘러본 기억이 난다”며 “치밀한 현장조사와 사료 재분석으로 고조선 강역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소견을 내놨다.
 
재야학자들, 고조선 서쪽 경계로 난하 추정하지만 주류학계 ‘회의적’
김정배 국편위원장 “사료 재분석 필요”
고대 한중 역사의 랜드마크 갈석산
산기슭에 절집·주택단지 들어서

한사군 강역 논쟁의 주된 배경인 창리현의 갈석산. 산 아래에 최근 큰 사찰이 들어섰다. 노형석 기자

산해관 누각 아래로 옛 청나라 관리들의 가장 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노형석 기자
 
영평부성 서문. 노형석 기자
 
난하 부근의 영평부성은 기자조선과 연관된 옛 고죽국의 터란 설이 나오는 곳이다. 성 남쪽에 조선성이 있다는 기록이 명대 지리지 <대명일통지>에 전해져 일부에서 이를 근거로 기자조선 유적이란 견해를 내놓고 있지만, 실제 유적은 찾을 길이 없다. 18세기 중국행 사신단을 수행한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집과 시장 점포가 다른 지역보다 곱절 번화하고 부유하다’고 기록했던 것처럼, 명청시대 번영한 자취만 뚜렷하다. 도읍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경’(望京) 편액을 붙이고 벽돌로 쌓은 명청대의 서문과 옹성만 남았다. 성내 마을에는 금나라 때 쌓은 북방 양식 불탑도 보였다. 답답해진 답사단은 루룽현 시내를 지나다 고죽국 사람 백이숙제의 고사를 기린 공원에 들러 기념비도 살펴봤다. ‘중국문화고죽지향’ 명문을 새긴 대리석비다. 은을 멸망시킨 주 왕조를 거부하고 고사리 캐어 먹으며 수양산에 숨어 살다 죽은 그들의 고사와 역대 왕조의 치적 외에 고조선 대목은 없었다. 비석 옆 단에는 중년 남녀들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고조선 강역 논란은 우리의 현안일 뿐일까.
 
발길을 돌려 창리(창려)현 갈석산으로 향했다. 요서 길목에 뾰족하게 솟은 갈석산은 기골 장대한 명산으로, 고대 한-중 관계사의 랜드마크다. 낙랑·고조선 강역을 표기한 옛 문헌에 중요한 지리적 기점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름의 산이 산둥, 바오둥 등 다른 곳들에도 있어 강단·재야 학자들 사이에서는 산 위치를 놓고 이설들이 제기돼왔다. 고대 중국의 <상서>에는 “오랑캐가 갈석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와 공물을 바친다”고 했고, 3세기 서진의 <태강지리지>에는 “낙랑군이 수성현 갈석산 부근에 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를 토대로 일부 재야 학자들은 베이징 남쪽 바오딩시 일대의 산을 갈석산으로 비정해 고조선 강역이 베이징 아래까지 뻗쳤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산기슭을 오른 답사단은 새 유적들이 없는지 주시했지만, 최근 들어선 절집과 고급주택가 등의 변화한 풍광만 확인했다.
 
중국 고죽문화지향 기념비 앞에서 널브러져 자거나 놀이를 즐기고 있는 노륭현 주민들. 노형석 기자

 

노룡두 성곽 옆에 있는 덩샤오핑의 ‘애아중화’ 친필비. 노형석 기자
 
인근 휴양도시 친황다오(진황도)에 여장을 푼 답사단은 다음날 아침 시 외곽의 만리장성 동쪽 끝 산해관, 노룡두를 찾았다. 노룡두 성곽은 장성이 용처럼 꿈틀거리며 산을 타고 오다 황해로 입수해 들어가는 모양새여서 용머리란 뜻의 이름이 붙었다. 1900년 의화단의 난 당시 서양 군대의 침공으로 파괴됐다가 80년대 복원돼 고풍스런 느낌은 찾기 힘들다. 고광의 동북아재단 역사연구실 팀장은 “노룡두란 이름 자체가 성곽을 장성의 머리끝이라고 생각한 관념을 드러내는 것으로, 장성공정이 무리수임을 증거하는 유적”이라고 했다. 천하의 통로 산해관까지 한달음에 돌아보고 다시 길을 떠난다. 북쪽의 각산 봉우리를 휘감는 장성 성벽들의 대열이 눈에 들어왔다.
 
친황다오/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