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5/04/021075000200504200556051.html

한-일 수구파들의 공동 ‘성폭행’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5년04월20일 제556호
 
군위안부는 역사에 유례없는 ‘제도적 강간’…망언으로 피해자를 두번 죽이는 자들이여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고 ‘국내’ 최초로 커밍아웃한 직후에 <여명의 눈동자>란 드라마가 방영됐다. 일본군 ‘위안부’가 돼버린 주인공 여옥의 불행한 운명에 온 나라가 눈물을 흘리고 분노했다. 그리고 드라마는 끝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 이전 4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2004년 2월 ‘종군위안부 누드화보’ 사건이 터지자 또다시 한국 사회는 끓어넘쳤다. 끓어넘친 물이 불을 끈 것일까? 그 여배우가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을 찾아와 사죄하고 한달쯤 지난 뒤 학생들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요즘 어때요?”라는 내 말에 안신권 사무국장은 “딱 일주일이더라고요”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이제 13년이 된 ‘수요시위’가 650회를 넘겨 진행 중이다.

△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시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사건이 생길 때만 끓어넘치다가 쉽게 식어버린다. (사진/ 한겨레 황석주 기자) 

김두한도 정신대였다? 용어정리합시다

그리고 2005년 들어 한승조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할머니들과 진실규명운동에 대해 “성의 문제”를 “왜 돈의 문제와 결부해서 자기 망신을 계속하느냐”며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대표적인 사례”이자 “수준 이하의 좌파적 심성”이라고 망언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일본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단체의 부회장인 후지오카 노부카쓰는 수요시위에 나오는 할머니들이 북한 공작원이라고 주장했다. 한승조 망언 당시 한승조 일병 구하기에 나섰던 그 지만원은 후지오카의 망언을 발전시켜 수요시위 등에 참여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가짜’라는 의문이 든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1944년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이라면 현재 최소한 78살 이상의 고령으로 건강이 너무 상해 거동이 불편할 것”이라며 “최근 TV에 보이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건강도 좋아 보이고 목소리에도 활기가 있는 분이 많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대한민국이 부끄럽다. 위안부 놀음, 이제는 접어라”라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 나눔의 집이 “몇명 안 되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앵벌이로 삼아 국제 망신을 시키고 다닌다”라고 비난했다. 지만원의 주장은 그동안 한-일을 넘나들며 나온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망언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일까?

일본군 ‘위안부’ 또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용어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를 지칭하는 용어로 가장 먼저 쓰인 말은 ‘정신대’(挺身隊)다. 그런데 정신대에는 일본군에 끌려가 성노예로 착취당한 분들도 포함되지만, 공장에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린 여성들뿐 아니라 남자도 포함될 수 있다. 한 예로 김두한은 일제 말기에 반도의용정신대의 부단장을 지냈다. 요컨대 정신대란 말은 일본군 ‘위안부’를 포함하고 있지만, 훨씬 범위가 넓은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정대협이나 정신대연구소 같은 단체들은 굳이 단체 이름을 바꾸진 않았지만, 일본군 ‘위안부’만을 가리킬 때는 정신대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위안부란 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서 ‘위안’이 누구의 위안이냐는 점이다. 일본군의 성욕 발산은 일본군 입장에서 위안이었을지 몰라도 피해자인 여성들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위안부는 당연히 일본군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 ‘위안부’란 말에는 좀 번거롭기는 해도 꼭 작은따옴표를 붙여서 쓴다. 일본에서 널리 쓰이고 있고, 또 한때 북에서도 사용했던 용어가 ‘종군위안부’이다. 이 말은 위안부란 말의 문제점을 그대로 갖고 있는데다 ‘종군’이란 표현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종군작가, 종군기자, 종군화가 등은 누구에게 억지로 끌려간 사람들이 아니라 제 발로 군대를 따라간 사람들이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도 스스로 한 것이지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일본군 성노예는 작은따옴표를 쳐도 잘 지워지지 않는 위안부란 용어의 문제점을 없앤 말로 연구자들이나 활동가들 사이에 최근 들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는 용어다. 그러나 당사자인 할머니들께서 이 말을 좋아하시지는 않는 것 같다.

△ 한승조씨(왼쪽)는 일본군 위안부 진실규명운동을 “좌파적 심성”이라고 공격했다. 이어 지만원씨는 할머니들이 ‘가짜’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매독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 막으려 했다

일본의 극우파나 한국의 친일·수구 세력은 왜 일본만 갖고 난리냐는 투로 이야기한다. 한 예로 한승조는 “전쟁 중에 군인들이 여성들을 성적 위안물로 이용하는 것은 일본만의 일이 아니다”라고 강변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의 참화 앞에서 여성들이 총칼 든 사람들의 성적 만행의 대상이 됐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역사가 대일본제국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제도’로서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모든 전쟁에서 발생하는 전시 강간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 국가기구의 주도에 의해 식민지·피점령지 여성을 동원하여 군인들에게 성적 노예로 공급한 제도적인 강간이며, 이는 명백한 전쟁범죄로서 파시즘과 결합한 성폭력이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의 일본처럼 국가의 조직적 개입 아래 군인들을 위해 ‘성적 노예’를 끌고 다니고 성적 노예의 공급을 위해 제도화된 강제 동원을 일삼은 예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일본군 위안소가 최초로 설치된 것은 1932년 ‘상해사변’ 전후의 일로 알려졌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 지휘부는 병사들의 강간 사건이 빈발하자, 일본 본토에서 위안부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상해파견군 참모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중장은 위안부가 파송돼온 뒤 강간 사건이 줄어들어 기뻐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김완섭 같은 현대판 친일파는 “해외 원정군에 위안부를 딸려 보내 군인과 현지 주민을 배려”한 것은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일본군의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증거”라고 일본 극우파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단순히 강간을 방지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20세기 일본 군부의 ‘총력전’ 사상에 따른 전략적 사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제국 일본은 러시아 내전에 백군 편에 서서 개입하여 7만5천명의 대병력을 시베리아에 파견했다. 그런데 이 당시 일본군에게 큰 병력 손실을 입힌 것은 적군이나 게릴라들의 공격보다도 시베리아 매독의 공격이었다. 일본군은 이 당시 전투로 인한 병력 손실보다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의 손실이 더 컸던 것이다. 매독이 도져서 보행 능력을 상실할 경우, 그냥 버리고 갈 수도 없어 성한 병사 2∼4명이 붙어 들것에 싣고 가야 하니 실제 전투력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성병에 의한 피해는 전투력의 15∼20%에 해당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에 가담한 일본의 군부는 한편으로는 유럽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군이 모델로 삼았던 독일군(프러시아군)이 얼마나 잘 싸우는지를 주시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패배는 일본군에는 차라리 충격이었다. 근대의 전쟁은 이제 군대만 강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총체적이고 장기적인 전쟁수행 능력이 승패를 결정하는 총력전이 된 것이다.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절대절명의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주변국과 평화롭게 지내기에 일본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이웃 중국이나 소련을 정복하기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미국과 벌이게 될 ‘세계 최종전’에서 승리하기에 일본은 너무나 작은 나라였다.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한 일본이 세계제국 건설의 야망 속에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키자, 군부는 부족한 자원을 총동원하여 군사력의 극대화를 이뤄야 했다. 만약 러일전쟁 때나 시베리아 출병 당시 일본군의 큰 문제로 대두된 성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일본은 병력 동원 면에서 15∼20%의 증대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과 제국일본이라는 국가는 일반 병사 개개인에 의한 강간과 약탈을 국가가 묵인, 방조하는 선을 넘어서 국가가 조직적으로 “깨끗한 성”을 보급하는 ‘관리매춘제도’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분명 ‘깨끗한 성’을 공급하여 성병을 예방할 수 있다면 전투력의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이고, 이는 세계대전을 치르기에 인적 자원이 부족한 일본에 큰 도움을 주는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특히 효율성을 종교처럼 숭상하는 ‘합리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이여, 효율성이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릴 때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지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바로 처리되지 못한 데에는 미국의 책임도 크다. 여러 가지 악독한 인체실험을 한 일본군 731부대 문제를 미국이 덮어버린 것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미국이 덮어버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지금 보면 엄청난 전쟁범죄, 반인륜 범죄이지만 당시 미국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군의 심리전 당국이 일본군 패전 지역에서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들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이 문제는 일본 전범을 단죄한 동경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100% 덮어진 것은 또 아니다.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네덜란드 출신 등 백인 여성들을 강제로 ‘위안부’로 삼은 일본군들은 전후에 전범으로 처벌됐다. 이는 미국 등 연합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엄청난 전쟁범죄임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 입장에서 볼 때 백인 피해자의 인권과 조선인 등 아시아인 피해자의 인권이 같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권은 보편성이란 머나먼 훗날을 기약해야 할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다만, 그 당시 미군이 모아놓은 자료가 현재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의 진상을 밝히는 데 요긴한 자료로 쓰이게 된 것을 차라리 고맙게 여겨야 할까?

△ 일본군이 한국인 위안부들을 학살한 뒤 매장하는 처참한 장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국가기구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제도적 강간’이었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박정희도 베트남 파병 때 ‘위안부’ 생각

한국 사회에서는 친일이나 민간인 학살 문제가 지난 수십년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묻혀 있었듯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199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동년배인 윤정옥·이효재 교수 등과 1970·80년대 학생운동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연구자들이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때였는지 모른다. 한편 일본의 양심세력들도 과거 일본이 행한 잘못에 대해 반성하면서 과거와 직면하기 시작했다.

민족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벽은 높았다. 모진 고생 끝에 살아 돌아온 피해 여성들을 한국 사회는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청에 끌려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이라 불렀는데, ‘화냥년’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는 것이 아닌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은 차라리 죄였다. 그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몸을 더럽힌 여인들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더구나 끌려간 여성들의 대부분은 배우지 못한 가난한 농민의 딸이었다. 꼭 유교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더라도 한국 사회의 계급구조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여성 문제를 축으로 하면서도 민족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계급·인권 문제, 국가와 민주주의 문제 등이 바닥에 깔려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순간 폭발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지는 것은 이 복잡한 문제에서 오로지 민족 문제만 대중적으로 부각됐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민족 문제만이 부각된다는 것은 좀 단순화해 설명하면 “일본놈들이 조선 여자를 군위안부로 끌고 갔다”는 사실에서 ‘일본’과 ‘조선’에만 방점이 찍한 경우를 말한다. 물론 민족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이 모두 적게는 8만, 많게는 2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80%가 조선 여자였다는 점만으로도 민족 문제를 제쳐두고 여성 문제의 프리즘만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사이의 민족 문제가 과도하게 부각될 경우, 다른 민족 소속의 피해 여성 문제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민족 문제가 과도하게 부각될 경우, 우리 민족 내부의 성(젠더)이나 인권 문제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일본’놈만을 탓할 경우 “한국 남자들은 어땠는데?”라는 질문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일제의 잔재를 전혀 청산하지 못한 우리가 전쟁범죄를 청소하다가 말아버린 (비록 미국에 의한 것이지만) 일본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손가락질만 할 처지는 아니다. 우리 민족의 탈을 쓴 친일파들의 허물이 일본이 전쟁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해방 이후의 몇 장면을 되살려보자. 일본군·만주군 출신이 득세한 한국군은 한국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같이 대규모는 아니었다 해도 이른바 ‘모포부대’를 운영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이 문제를 회고록에 적었던 모 장군은 한동안 선후배들에게 시달렸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일협정 체결 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며 박정희 등의 역사의식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분노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박정희를 너무 높이 평가해주셨다. 한-일협정과 동전의 앞뒷면 관계에 있는 베트남 파병에서 박정희는 한국군이 해외로 출병하는 데 전투력 고양을 위해서는 ‘위안부’를 딸려 보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참모들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멀리 남양의 전장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몰랐던 일본군과는 달리 한국군은 1년 주기로 병사들이 교체된다는 점, 그리고 만약 ‘위안부’를 보냈을 경우 야기될 국제적 조롱과 김일성이 펄펄 뛸 것 등이 고려돼 천만다행으로 ‘위안부’를 안 보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한-일 극우파, 위기 맞자 내선일체형 연대

일본군·만주군에서의 교육과 복무 경험을 통해 박정희의 머릿속에는 전투력 향상을 위한 ‘국가관리 매춘’이라는 구상이 꽉 박혀버린 것 같았다. 1970년대 초반 박정희는 기지촌정화운동을 통해 주한미군에게 ‘깨끗한 성’을 공급했다. 기지촌정화운동의 주무부서는 경기도도 보건사회부도 내무부도 아니고, 하필이면 외무부였다.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들에게는 청와대 비서관 등 고위관리들이 나와 안보역군으로 치켜세웠고,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기생관광’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외화벌이의 전선에 나선 산업전사가 됐다. 왜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이 필요했으며, 오늘날 친일 잔재 청산과 군사독재 잔재 청산이 별개일 수 없는 이유도 이런 쓸쓸한 장면에 잘 나타난다.

한승조·지만원 등의 부류는 지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성을 혁명의 무기-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터지자 군사독재 정권이 했던 말인데, 한승조가 되풀이하고 있다- 로 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승조·지만원을 비롯해 국내에서 요즘 친일 망언을 일삼는 사람들,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키려는 것은 국가보안법으로 대표되는 ‘수구질서’다. 이 질서가 안전하게 지탱되던 시절에는 이렇게 그들의 정체가 노출될 일도 없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국가보안법에 의해 지탱되던 수구질서가 위기에 몰리게 됐고, 또 한국의 민주화는 일본 극우세력에게도 위기감으로 작용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극우파와 한국의 친일·수구 세력간에 자학사관 비판에 기초한 내선일체형 한-일 연대가 공고해지는 셈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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