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vop.co.kr/A00000806404.html

사라진 5만원권은 어디로 갔을까?
“지하경제 양성화” 정부 정책 비웃는 화폐 퇴장
이완배 기자  발행시간 2014-10-23 11:04:26 최종수정 2014-10-23 11:56:51

때는 원시 시대. 사냥을 주로 하던 부족 A와 물고기 잡이를 주로 하던 부족 B가 먹을 것을 교환한다. 돼지 뒷다리 하나에 꽁치 두 마리…. 뭐 이런 식의 교환이 이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물물교환 방식에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낸다. 무거운 돼지 뒷다리를 끙끙대고 옮길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수단, 즉 ‘화폐’를 만드는 것이다. 화폐가 생기자 사람들은 더 이상 생선을 사기 위해 무거운 돼지 뒷다리를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원래 화폐는 이처럼 거래를 보다 편하게 하기 위해 생긴 수단이었다.

그런데 화폐가 생긴 이후 인류 사회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화폐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욕심이 없었다. 돼지고기나 생선은 저축을 할 수가 없다. 저축이 불가능하니 자본을 축적해 부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는 사람도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원시시대 사람들은 꼭 필요한 만큼만 먹을 것을 잡아 그때그때 먹거나 바꿨다.

하지만 화폐가 생긴 이후 모든 이야기가 달라졌다. 화폐는 생선과 달리 저축이 가능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달은 것이다. 인류는 더 많은 화폐를 축적하기 위해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그 욕심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으로까지 번진다. 단순히 교환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화폐가 급기야 인간 세상을 뿌리부터 바꾼 것이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화폐에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가르친다. 첫째, 돈을 가져가면 필요한 물건을 내어주는 기능, 즉 교환의 기능이다. 둘째, 화폐를 모아두고 미래를 대비하는 기능, 즉 가치 저장의 기능이다. 마지막이 물건의 가치를 화폐 단위로 측정토록 하는 가치 척도의 기능이다.

원래 인류가 화폐를 만들 때에는 교환의 기능을 얻기 위한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교환의 기능은 점차 퇴색하고 가치 저장의 기능이 주요 기능의 자리를 차지했다. 본질은 잊히고 현상이 새로운 본질의 역할을 한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이른 바 ‘왝 더 독(Wag the dog)’ 현상이 화폐의 역사를 지배한 것이다.

지난 추석 명절을 맞아 한국은행에서 방출된 5만원권
지난 추석 명절을 맞아 한국은행에서 방출된 5만원권ⓒ민중의소리
 
5만원권, 자취를 감추다

5만원권이 시중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사라지는 속도가 눈이 부시다. 이 정도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학 공식 용어인 ‘화폐의 퇴장(hoarding of money)’으로 부르기에도 손색이 없다.

사태가 어느 정도인지 한국은행의 공식 발표를 따라가 보자. 2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3분기(7∼9월)에 발행한 5만원권은 4조 9,410억 원인데, 환수된 돈은 9,820억 원이다. 환수율이 19.9%에 그쳤다. 쉽게 말해 이 기간에 발행된 5만원권 100장 중 한은에 돌아온 돈은 20장이 채 안 됐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은 화폐를 발행하기도 하지만 수명을 다한 화폐를 수거해 폐기처분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환수율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상식적으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환수율은 100%에 육박하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찍는 돈이 걷는 돈보다 많기 때문에 100%를 다 채우긴 어렵겠지만, 정부가 심하게 돈줄을 풀지 않는 한 발행하는 돈이나 수명이 다해 돌아오는 돈이나 엇비슷한 게 정상이다.

실제 다른 지폐의 환수율을 보면 이해가 쉽다. 올해 8월 기준으로 1만원권의 환수율은 100.8%다. 5,000원권은 74.2%, 1,000원권은 80.3%에 이른다. 그런데 유난히 5만원권의 회수율이 저조하다. 게다가 더 특이한 점은 이런 현상이 올 들어 부쩍 심해졌다는 사실이다.

5만원권이 발행된 첫해인 2009년 환수율은 7.3%였다. 첫해였기 때문에 수명이 다 한 돈이 거의 없어 벌어진 당연한 현상이다. 이듬해인 2010년 환수율은 41.4%로 올랐고, 2011년 59.7%, 2012년 61.7%까지 상승하며 정상을 되찾는가 싶었다. 그런데 지난해 이 수치가 48.6%로 크게 하락하더니 급기야 올해 20% 미만으로 폭락한 것이다.

덩달아 생긴 특이한 현상들

도대체 이 많은 5만원권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 사실을 짐작하기 전에 사라진 5만원권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말 기준으로 시중에 돌고 있는 화폐는 총 71조 6,413억 원에 이른다. 그런데 이 중 5만원권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68.3%다. 5만원권의 총액만 대략 50조 원에 육박한다.

20%를 밑도는 환수율을 감안하면 대략 이 중 40조 원이 사라졌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환수율이 다시 높아진다면 모를까,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40조 원은 어디론가 증발됐다고 추리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의 집계도 비슷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5만원권이 처음 등장한 2009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시중에 발행한 5만원권은 모두 85조 9,095억 원이었다. 그런데 이 중 회수되지 않은 5만원권은 47조 8,289억 원이다. 약 10억 장에 이르는 5만원권이 시중에 나돌고 있거나, 아니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 사라진 셈이다.

사라진 5만원권의 진실을 추정하기 위해 최근 나타난 특이한 현상과 사례들을 몇 가지만 더 확인하자. 5만원권의 증발과 함께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가정용 금고의 판매가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국내 금고 시장에서 50% 가량의 점유율을 보이는 선일금고는 지난해 상반기 매출이 80% 이상 늘었다고 알려졌다. 실제 금고 판매업체가 몰려있는 서울 중구 을지로4가에서 장사를 하는 한 상인은 “지난해부터 가정용 금고 판매가 갑절 이상 늘어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전체적으로 가정용 금고 시장이 30% 이상 성장했다고 추정한다.

또 한 가지. 5만원권으로도 모자랐는지 30만 원 이상 고액 상품권의 증가세도 눈이 부실 지경이다. 조폐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백화점 등의 위탁을 받아 찍은 액면가 30만 원과 50만 원 상품권은 무려 478만 장이었다. 2012년 227만 장에 비해 갑절 이상으로 늘어난 수치다. 액면가 50만 원짜리 고액 상품권은 2009년만 해도 연간 42만 장 정도가 발행됐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발행 숫자가 365만 장을 넘어서며 9년 사이에 거의 아홉 배로 늘어났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11년 4월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엉뚱하게도 마늘이 아닌 현금다발 110억 8,000만 원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마늘밭 안 곳곳에는 김치통과 플라스틱 페인트 통 24개가 묻혀 있었고 그 안에는 5만원권 지폐가 수북이 채워졌다. 불법 도박으로 돈을 번 밭주인이 돈을 맡길 곳을 찾지 못해 이를 묻어둔 것이다. 하필 나무를 옮기기 위한 포클레인 작업이 그 밭에서 실시되는 바람에 ‘노다지’가 발견됐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마늘밭의 진실은 영원히 묻힐 뻔 했다.

지하경제 양성화? 비웃는 탈세자들

박근혜 정부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지하경제 활성…, 아니 지하경제 양성화를 모토로 내세웠다. 지하경제는 과세 당국의 레이더를 피하려는 돈의 움직임을 총체적으로 일컫는다. 범죄 조직의 검은 돈이나 각종 뇌물처럼 형법 처리 대상이 되는 돈도 물론 여기에 포함이 되고, 상속세나 증여세, 소득세 등 각종 세금을 피하기 위해 숨어드는 돈도 포함된다.

사라진 5만원권의 진실은 바로 이 지하경제에 있다. 지하경제라는 것이 워낙 비공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어서 그 규모를 쉽게 추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체 국민소득에서 과세 대상 소득을 제하는 방식 등으로 대략적인 추정은 가능하다. 2013년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교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2010년 기준)는 약 300조 원으로 그 크기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24.7%에 이른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8.3%를 무려 6.4%포인트나 웃도는 수치다. 주요 선진국과 비교를 해 보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미국의 지하경제 규모는 GDP의 9.1%에 불과하다. 일본은 11.0%, 영국은 12.0%, 프랑스는 14.6%, 독일은 15.1%다. 한국보다 지하경제의 규모가 큰 OECD 국가는 멕시코, 그리스, 이탈리아 3개국뿐이다.

세금은 소득이 이전(移轉)되는 곳에 부과된다. 이것이 과세의 원칙이다. 최근에는 조세 행정망이 워낙 발달해 어지간한 소득의 이전은 대부분 과세 당국의 레이더에 걸린다. 은행 통장에서 돈이 이동하는 것은 거의 잡힌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레이더망에 안 걸리기 위해서는 은행의 전산망을 이용하지 않으면 된다. 이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현찰을 직접 들고 옮기는 것이다. 5만원권이 증발되고 고액 상품권이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높이 60cm인 작은 금고에 돈을 가득 넣으면 만원권일 때는 5억 원 정도가 들어가지만 5만원권일 때는 25억 원이 들어간다. 사과상자 하나에 만원권을 가득 채워도 5억 원이지만 5만원권을 이용하면 역시 25억 원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금괴로 불리는 골드바(gold bar)를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금은 시세가 유동적이다. 게다가 환금성 면에서 현찰과 비교가 안 된다. 환금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물을 현금화한다는 뜻이다. 고액권 화폐의 환금확률은 100%다.

최근 형성된 금융 환경도 5만원권의 증발을 부추긴다. 요즘 시중의 예금 금리는 2%대로 추락했다. 은행에 맡겨봐야 별 이득이 없다. 보관만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세금을 탈루할 수 있다면 이자 소득을 포기하고 직접 보관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 현행 증여세법에 따르면 과세표준은 △1억 원 이하 10% △1억 원 초과~5억 원 이하 20%, △5억 원 초과~10억 원 이하 30% △10억 원 초과~30억 원 이하 40% △30억 원 초과 50%이다.

질문을 하나 해 보자. 25억 원을 보유한 자산가가 이 돈을 자녀에게 물려주려 한다. 은행 이체로 과세 당국에게 증여 사실이 걸려 40%의 세금을 낼 것인가, 아니면 현찰로 사과상자에 담아 직접 건네줄 것인가? 답이 너무 쉽게 나온다. 그 돈을 증여받은 자녀도 마찬가지다. 25억 원을 은행에 예금하면 과세당국에게 돈의 출처를 밝혀야 한다. 당연히 이들도 사과상자로 받은 돈을 그냥 사과상자에 보관할 것이다. 어차피 은행 금리는 2%밖에 안 된다. 5만원권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이유다.

정부는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고 한다. 이들의 진심만은 인정해 줘야 한다. 비록 가진 자들을 위한 정부이긴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지하경제까지 감쌀 정도로 여유가 많지는 않다. 부자 감세로 국고는 이미 바닥을 보인다. 지하경제를 탈탈 털어서라도 박근혜 정부는 국고를 채우고 싶어 할 것이다.

문제는 정부의 능력이다. 5만원권의 증발은 박근혜 정부의 국고가 텅 비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난해부터 본격화됐다. 정부의 과세 의지가 강해질수록 돈은 더 꼭꼭 숨어버린다. 올 들어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정부의 노력 중 성과를 거뒀다는 소식은 단 하나도 없었다. 우연히 포클레인 작업을 하다 마늘밭에서 110억 원을 건진 것을 성과로 부를 수 없다면 말이다. 물론 이마저 이명박 정부 때의 성과(!)였지만.

한국은행의 해법은 '설문조사'(!)

한국은행은 5만원권을 둘러싼 지하경제 논란이 거세지자 올해 처음으로 “일반인과 기업을 상대로 화폐 수요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여 연내 공표하겠다”고 밝혔다. 쉽게 말하면 “도대체 왜 5만원권을 안 쓰고 가지고 계세요?”라고 묻겠다는 것인데, 개그도 이런 개그가 없다. 과세를 피해 돈을 숨기기로 작심한 지하경제 주체들에게 이런 걸 물어서 도대체 뭘 얻겠다는 것인가?

정부는 지하경제를 파헤칠 능력이 부족하고, 부자들은 자발적으로 세금을 낼 의지가 없다. 한국에는 “내 비서가 나보다 높은 소득세율을 적용받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부자 증세를 주장한 워런 버핏 같은 ‘양심 있는’ 부자도 없다.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것이 고작 설문조사라는 한국은행이나, 지하경제 양성화는 흉내도 못 내고 담뱃값이나 올려 국고를 채우려는 정부 덕에 애꿎은 신사임당만 시중에서 사라진다. 꼬박꼬박 세금 내는 월급쟁이 국민들만 사라진 5만원권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 할 뿐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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