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gik.ac.kr/~kayakim/openlec/Gimhae/Gimhae2-3.htm

김해 가락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의 발전 과정


현재까지의 유적 상태를 토대로 한다면, 3세기 전반 이전의 김해 지방 문화 중심은 주촌면 양동리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김해 가락국은 12개국으로 이루어진 변한 소국연맹, 즉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 대두하여 있었습니다. 가락국이 낙동강 방면의 대표 세력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낙랑과 왜를 연결하는 해운 요충에 위치하고 풍부한 철생산 능력을 소유한 것에 기인합니다.

3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김해의 문화 중심이 현재의 시내 쪽에 있었던 것이 확인됩니다. 대성동 고분군의 대형 목곽묘, 봉황대 및 부원동 패총과 같은 생활 유적 등은 그 주요한 증거 자료들입니다. 이 시기의 가락국은 낙동강 유역의 대표로서 신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2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옹관묘,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은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말에 이르는 목곽묘들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형 무덤인 대성동 2호분은 김해 지방을 통틀어 가장 대형의 것이고, 출토유물의 수준도 매우 높아서, 4세기 후반 당시 김해 지방 최고 지배자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세기 전반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하여 북방의 교역 중심이 사라지자, 가락국은 해운 교역상의 비교 우위를 상실하여 서부경남 해안의 포상팔국(浦上八國)으로부터 도전을 받았으나, 가락국은 신라의 도움을 얻어 막아냈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 중엽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중국 남조의 선진문물을 가지고 창원의 임나국(任那國, 즉 卓淳國)을 통하여 왜로 연결되는 교역로를 개척하자, 김해의 가락국은 이 교역권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세기 후반에 가야연맹은 김해의 임나가라(任那加羅)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신라와 대립하면서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金泰植>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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