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52N5Ed (문서파일)
* "박물관역사문화교실 ⑧ 구지가(龜旨歌)가 말하는 가야사 - 이영식"에서 "4. 가야사의 전개" 에서 "
1) 전기가야(前期加耶) - 해상왕국 & 철의 왕국"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전기가야(前期加耶) - 해상왕국 & 철의 왕국
2014년 5월 21일, 이영식
 
해상왕국 전기가야에는 남해안의 거제(瀆盧國), 김해(狗邪國), 창원(古淳國,卓淳國),  함안(安邪國),고성(古自國) 등이 번성하였고, 후기가야는 고령(大加耶), 합천(多羅國), 창녕(不斯國,比斯國), 의령(爾赦國), 거창(居烈國), 남원(己汶國), 하동(多沙國), 사천(史勿國) 등이 가야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기원전후의 시기에 김해를 비롯한 창원, 마산, 함안, 고성, 사천, 진주 등의 지역에서는 소규모의 정치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가야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중국청동솥(김해양동322호분)>                                  <중국청동거울(김해대성동23호분)>

대개는 3천∼3천5백명 가량의 ‘소국(小國)’들이었으나, 김해의 구야국(狗邪國)과 함안의 아야국(安邪國)은 2만∼2만5천명 정도의 ‘대국(大國)’이었습니다. 가야사가 남해안에서 시작된 것은 낙랑군(樂浪郡), 대방군(帶方郡)과 같은 선진지역과 바닷길을 통해 교섭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는 3세기경에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해상교통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남해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향하다가, 김해의 구야국에 정박한 다음,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큐슈(九州)에 도착하는 항로였습니다. 이는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던 한(漢)의 선진문물이 이동하던 경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남해에 인접해 있던 가야의 소국들은 이러한 선진문물 이동로의 관문과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 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김해의 대성동고분군, 양동고분군, 창원의 다호리유적, 고성의 동외동패총, 울산의 하대고분군 등에서는 이러한 경로로 수입되었던 중국제 문물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기가야 소국들의 발전에는 중국군현과의 외교와 교역이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였습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전하는 ‘포상팔국(浦上八國)(201∼212년)의 난’은 사천, 고성, 칠원, 마산 등의 가야가 김해의 해상교역권을 빼앗기 위해 가락국을 공격했던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야의 건국신화를 바탕으로 형제와 같이 이해하고 있지만, 같은 가야문화권이라도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전쟁도 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철의 왕국

“나라(國)에서 철(鐵)이 생산되어 한(韓)과 예(濊), 그리고 왜(倭)까지 수출되었다. 여러 시장에서 사는 데 모두 철을 사용하여 중국에서 화폐를 쓰는 것과 같았다. 또한 이군(二郡)에도 공급되었다” 

이것은 '삼국지(三國志)'가 한(韓)의 종족 중에서 변진(弁辰)사회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는 아주 유명한 철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보여 주는 철의 생산과 유통이 언제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편찬자인 진수(陳壽)가 서기 297년에 사망하였던 것과 관련 기술 중에 기원전후 변진사회의 고고학 자료들과 일치하는 것이 많다는 점들을 고려한다면, 기원전후에서 3세기 말 사이의 변진사회에서 철이 생산되고 수출되던 소식들이 서북한에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거쳐, 중국의 낙양(洛陽)까지 전해졌고, 진수(陳壽)에 의해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덩이쇠(板狀鐵斧), 김해 양동 162호분 출토>             <덩이쇠(鐵鋌) 출토 모습, 김해 대성동 2호분>

해상왕국의 가락국이 중개무역만 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겁니다. 철이 많이 생산되어 가깝게는 마한과 진한의 여러 나라에, 멀리는 서북한의 낙랑군과 대방군,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왜인들의 나라에까지 수출되고 있었던 겁니다. 가락국은 철을 수출하던 철의 왕국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김해의 많은 가야 고분들이 조사되고 있습니다. 3세기까지 김해와 경주에서 출토되는 철기를 비교해 보면, 김해의 가야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기가 질과 양에 있어서 경주 신라고분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양은 출토되었던 철기의 근수를 달아보면 될 것이지만, 질은 바로 강철사용의 빈도를 말합니다. 무기와 농공구의 날에 얼마나 많은 비중으로 강철이 구사되었는지의 비교입니다. 물론 김해의 철기가 월등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수출품의 일부가 김해, 동래, 함안, 고령, 합천 등의 가야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신라와 일본의 고분에서는 수입품의 일부가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기가야의 판상철부(板狀鐵斧)와 후기가야의 철정(鐵鋌)과 같은 덩이쇠가 그러한 유물들입니다. 판상철부와 철정은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져 가치에 따라 물물교환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화폐와 같은 역할도 하였고, 수입한 쪽에서는 필요한 철기를 만드는 소재로 활용하였던 것입니다. 

김해 봉황대유적의 송풍관


<송풍관, 김해 봉황대유적 출토>

현재 김해에서 철이 생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 조업했던 김해시 대동면의 상동광산은 조선시대에 많은 양의 철을 왕실에 공납하였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또 김해시 생림면에는 생철리(生鐵里)(철이 나는 마을)라는 지명도 남아 있고, 근년까지 쇠부리(製鐵)를 업으로 했다는 노인들의 증언도 채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야시대의 제철유적이 어떻게 확인되느냐 하는 점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조사는 아직까지 불충분합니다.


<김해 진영하계리농공단지유적 전경>

그러나 최근 시내 봉황대유적의 발굴조사에서 제철의 용광로의 벽면에 꼽혀 있던 송풍관(送風管)의 파편과 쇠똥(鐵滓, slag)이 출토되었고, 진영 하계리농공단지유적에서는 본격적인 가야의 용광로와 제사와 폐기장, 그리고 생산을 담당했던 가야인들의 집자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송풍구는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넣는데 사용하는 흙으로 만든 관으로 강한 불에 맞아 까맣게 그을린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쇠똥은 제철할 때 나오는 쇳물 찌꺼기가 굳은 것입니다. 하계리농공단지유적은 현장사진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지만, 2005년 가야세계문화축전에서 재현되었던 쇠부리, 곧 제철의 과정은 ‘철의 왕국, 가야’를 다시 보여주려는 후손들의 노력입니다.

금관은 머리에 쓰는 관이 아니다 

가락국의 옛 서울 김해(金海)의 땅 이름이 ‘쇠 바다’입니다. 쇠金는 철의 왕국의 특징에서 비롯되었고, 바다(海)는 해양왕국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수로왕은 철을 다루는 능력으로 왕위에 올랐고, 대장장이를 천명하며 도전해 왔던 신라의 탈해왕의 도전을 물리쳤으며, 철의 생산과 수출을 통해 가락국을 고대왕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수로왕의 후손 김해 김씨의 쇠(金)도 이러한 전통과 무관하지는 않을 거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금관가야의 금관은 머리에 쓰는 금관(金冠)이 아니라, 김해를 통합한 신라가 가락국의 금(金)=쇠를 관(官)리하겠다면서 부쳤던 ‘금관군(金官郡)’에서 비롯된 이름이었습니다.

* 고성의 고자국(固自國)(鐵城郡)은 ‘소(小)가야’가 아닌 ‘쇠가야’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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