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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기획 - 친일파 후손의 70년]일제에 특혜 받아 막대한 재산 챙겨… 손자는 호텔 사업가로 성공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입력 : 2015-01-01 22:12:31ㅣ수정 : 2015-01-01 22:19:54


‘황실’ 대표적 친일파 이해승과 손자 이우영 회장


▲ 조선인 최고 ‘후작’ 작위… 일제강점 내내 적극 협력

손자는 그랜드힐튼 회장… ‘부당이득 반환’ 결정에 국가 상대로 끈질긴 소송


이재성(1887~1925)은 충북 괴산에서 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와 함께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1년 반의 징역을 살았다. 출옥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지만 가세는 날로 기울었다. 집세조차 없어 재종손인 이해승(1890~?)에게 누동궁의 10여호 별채 중 한 채를 빌려 들어갔다. 서울 익선동에 있었던 누동궁은 철종의 친아버지 전계대원군가의 종택이다. 이해승은 이 집안에 양자로 들어간 5대 사손(嗣孫·대를 잇는 손자)으로 대한제국 황실 후예 중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혔다.


당시 이재성의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이해승의 집에서는 직계가 아니면 궁에서 아이를 낳거나 죽을 수 없다며 나가라고 재촉했다. 이재성의 부인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해산했으나 결국 아기는 죽었다. 이재성 역시 폐결핵이 심해져 드러누웠으나 이해승은 집에서 죽을까봐 두려워 무당을 불러 점을 치고는 그날 바로 내쫓았다. 이재성은 쫓겨날 때 한겨울 찬바람을 쏘인 탓에 병세가 악화돼 이틀 만에 사망했다.


당시 동아일보가 전한 이 사건에서 서류상 행적만 남아 있는 친일파 이해승의 인물됨됨이를 엿볼 수 있다. 비록 먼 친척이지만 자신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죽어가는 사람을 내쫓을 정도의 냉정함을 보인 셈이다.


이해승은 조선왕조에서 3명뿐이었던 대원군가의 사손이라는 지위 덕에 12살 때부터 관직에 올라 일제강점 직전에는 정2품 자헌대부가 돼 있었다. 이해승은 일제강점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일제가 한일병합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서는 이해승 같은 황실 사람들의 협조가 중요했다. 작위를 받은 이해승은 같은 해 조선귀족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귀족을 대표해 일왕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안중근 의사가 저격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다.


1911년 이해승은 일제로부터 16만8000엔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현재 가치로 수십억원에 해당하는 액수다. 1912년에는 ‘종전(한일병합 전) 한·일관계의 공적이 있는 자’로 한국병합기념장도 받았다. 이후 이해승은 채무보증을 잘못 서 큰 빚을 떠안게 됐지만 일제의 도움으로 재산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신탁하는 조건으로 채무를 변제했다. 이해승은 은사공채를 주식에 투자해 배당금을 받았고, 조선총독부로부터 토지를 대부받거나 금은광의 광업권을 받아 경제력을 키워나갔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이해승의 친일재산을 조사해 2007~2009년 3차례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는데 그 규모가 토지·임야 합계 197만㎡, 시가 322억여원으로 환수 대상자 중 최고 액수를 기록했다.


이해승은 1940~1941년 사이 전시 최대의 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과 전시체제기 최대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조선귀족회 회장이 된 이해승은 일제 육·해군에 각각 1만원씩의 국방헌금을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을 방문해 전달했다.


이해승이 조선 귀족을 대표해 ‘미영(米英)과 장제스(蔣介石) 격멸을 결의·앙양하기 위해’ 조선신궁에서 열린 중·일전쟁 5주년 기념제에 참석했다는 ‘매일신보’ 1942년 7월8일자 기사.


이해승이 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 이임 당시 조선귀족회 회장 명의로 ‘내선일체에 큰 공적’이라는 담화를 발표한 ‘매일신보’ 1942년 5월30일자 기사.


해방 후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이해승을 체포해 기소했지만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풀려났다. 이해승은 6·25 전쟁 중 납북돼 행방불명됐고, 1958년 실종 선고가 내려졌다. 이해승의 장남은 이미 1943년 사망한 상태여서 손자인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75)이 할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이 회장 측은 1957년부터 옛 황실재산총국에 소송을 제기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신탁돼 있던 재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까지 신탁재산의 75%인 890만㎡를 되찾았고 이 중 절반가량인 435만㎡를 매각했다.


1988년 이 회장은 반환받은 토지 중 전계대원군의 처 용성부대부인의 묘가 있었던 서울 홍은동 땅에 스위스그랜드호텔을 지었다. 이후 이 호텔은 그랜드힐튼호텔로 바뀐다. 특1급인 이 호텔을 소유하고 있는 곳은 동원아이엔씨로 이 회장의 아들이 대표로 있다. 이 회장은 1983년 서울 성북동에 949㎡의 땅을 사서 2층짜리 저택도 지었다.


호텔 부지와 성북동 자택 등은 재산조사위의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으로 한때 몰수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에 이 회장은 2008년 국가귀속 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귀족 작위 수여만으로는 이해승을 친일파로 단정할 수 없고, 해당 재산은 조선왕실로부터 받은 것으로 친일의 대가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이 회장은 1심에서 패소했다. 이 회장의 패색이 짙어지는 듯했으나 2심 재판부는 1심을 뒤집고 국가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작위 수여만으로는 한일병합의 공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은 ‘한일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자’를 재산 귀속 대상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 회장 측은 이를 교묘히 이용해 ‘한일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므로 재산 귀속 대상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재판관은 현 법원행정처장인 박병대 대법관이다. 이 회장은 이 소송에서 최종 승소해 320억원 상당의 재산을 지켜냈다.


판결 이후 국회는 특별법에서 ‘한일병합의 공으로’라는 문구를 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회장은 개정된 특별법이 너무 과도하고 특정인을 노린 것이므로 헌법에 위반된다며 소송 담당 재판부에 위헌법률 심판 제청을 신청했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2월 정부는 이 회장이 특별법 발효 이후 친일재산을 제3자에게 매각해 얻은 부당이득 220억여원을 반환하라는 1심 소송에서도 승소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소송을 포기하지 않았다. 부당이득 반환 소송도 2심이 진행 중이고, 친일재산 확인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도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경향신문은 이 회장 측 입장을 듣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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