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0320.22032202132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50> 흉노가 좋아했던 옥저인의 온돌

왕녀 왕소군도 온돌에서 몽골 겨울을 났을지도

옥저 기원 온돌, 버러성지에서 대량 출토

포로·망명으로 유입된 극동 주민들의 북방초원의 추위 적응에 필수품으로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9-03-19 20:23:17 |  본지 32면


몽골 버러 성지에서 발견된 흉노의 온돌 유적.


우리 민족 최대의 발명품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온돌은 최근 연해주지역이 조사되면서 그 기원이 옥저였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옥저인들은 현재의 함경도, 간도, 그리고 연해주에서 정착생활을 하며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온돌이 있었다. 온돌의 편리함은 곧 고구려, 발해로 계승되었고 현재 우리나라의 구들장은 통일신라~고려시대에 형성되었다. 그런데 온돌은 한반도뿐 아니라 기원전 후한 시기에 유라시아를 제패한 흉노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흉노의 유적에서 온돌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50년대였다. 바이칼 근처의 이볼가라고 하는 흉노 성지를 발굴한 상트-페테르부르그 출신의 다브이도바 여사는 이 유적의 한 주거지에서 완벽한 온돌을 발견했다. 극동에서 수천 ㎞ 떨어진 곳에서 온돌이 나왔으니 우연히 자바이칼지역으로 흘러간 극동지역의 주민일 것이라는 의문만 제기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옥저와 흉노는 직접적인 관련이 전혀 없다는 것이 당시까지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몽골에서 다양한 흉노 유적이 발견되며 온돌이 흉노사회에서 크게 유행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예컨대 2002~2007년에 몽골-스위스 팀이 공동발굴한 버러 성지에서도 온돌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버러 성지의 온돌은 따로 떼어서 옥저의 것과 섞어놓아도 모를 지경이다.


평생을 집도 없이 유목을 했던 흉노인이 정착해서 성을 만들어 살았다면 조금 의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목생활을 한 사람들은 무사와 귀족들이며, 아무리 유목민이어도 탄수화물을 섭취할 곡물이 필요하다. 또 국가 체제를 이루려면 그에 소용되는 여러 물건이 필요하니, 흉노는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성지를 만들어서 지속적으로 공급받았다. 중국 역사기록에 흉노의 땅에 많은 중국인들이 포로로, 또 망명객으로 유입되었다고 기록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온돌을 통해서 역사기록은 없지만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흉노 세력으로 극동의 주민들도 유입되었음이 밝혀진 셈이다. 흉노로 이주해온 주민들이 추운 북방의 초원지대에서 농사를 하고 정착생활을 하려면 당장 추운 겨울을 지내는 것이 큰 난관이었을 것이고, 바로 옥저의 온돌은 그들이 겨울을 나는 데 필요했다.


흉노와 한의 관계를 이야기하면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기원전 1세기에 호한사선우의 알씨(부인)가 된 왕녀 왕소군(王昭君)이다. 한나라의 궁녀였던 그녀가 오랑캐 흉노의 부인이 되어 추운 북쪽 사막의 천막 속에서 지냈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중국 시인들의 동정과 회한의 주제가 되었다. 지금도 왕소군 이야기는 중국 북방 여러 지역에서 관광 상품화 되어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굴을 보면 흉노인은 그렇게 야만적이지도 않았고 왕인 선우의 무덤은 웬만한 중국의 무덤 못지 않게 화려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러니 왕소군도 한나라 궁정의 이름 모를 궁녀로 사느니 흉노의 애첩이 된 것이 훨씬 나았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왕소군에게 몽골의 겨울을 꽤 추웠을 것이고, 유목생활에도 익숙하지 않았으니 온돌 달린 주거지에서 추운 몸을 녹이지 않았을까?


서기 1세기경 흉노는 추격하는 한나라의 공격에 쫓겨 중앙아시아로 도망갔으며, 그 와중에 자신들의 흔적을 곳곳에 남겼다. 카자흐스탄의 흉노 유적에서도 온돌이 나왔다고 한다. 아마도 중앙아시아로 이동하던 흉노인을 따라서 온돌도 같이 전파되었을 것 같다. 이제 몽골의 온돌은 증명되었으니 앞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우리 민족의 발명품 온돌이 본격적으로 발견될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사마르칸드의 아프라시압 벽화에 기록된 고구려의 사신보다도 훨씬 이른 흉노시대에 이미 중앙아시아와 극동의 문화적 교류를 증명할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온돌과 같은 주거문화가 전파되었다면 혼인과 같은 인적 교류도 당연히 있었을 테니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몽골·우즈벡여자와 결혼하세요'라는 다소 낮 뜨거운 플래카드를 걸고 광고하는 결혼대행사들도 자신들의 사업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이라고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초원의 온돌에는 주변의 선진기술과 발명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활용했던 유목민의 지혜가 숨겨져있다. 흉노가 말 위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주변의 여러 민족들과 다양한 창조품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데 있다. 요즘 한국의 온돌이 다시 세계로 수출되고 우리도 빠르게 국제화된다. 우리에게도 유목민족 흉노의 국제적인 감각과 열린 마음이 필요한 시점이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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