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76268.html


백제 땅 함평서 나온 토기에 왜 백인 얼굴이?

등록 :2018-12-30 09:34 수정 :2018-12-31 09:49


〔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 ④고대 다문화사회


고대 한반도에 외국인 정착 많아, 경주엔 아랍인, 함평엔 백인 흔적

남해안 야요이계 토기·왜계 고분은 일본인들도 많이 거주했다는 증거

순수한 단일민족이란 주장은 허구, 민족 있은 뒤 역사 진행된 게 아니라 역사 진전되면서 한민족도 형성돼


전남 함평의 백제시대 마을 유적지에서 나온 토기에는 큰 코에 주걱턱을 가진 승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백인 계통의 승려로 추정된다. 권오영 교수 제공


기원전 109년 위만조선을 공격하기 위한 한의 대군이 출진하였다. 해군 총사령관 격인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5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황해를 건넜다. 그는 3년 전에도 누선장군으로서 해군을 지휘하여, 육군인 복파장군 노박덕(路博德)과 함께 남월국(현재의 중국 광둥성, 광시성, 베트남 북부에 해당)을 공격하였다. 기원전 112년에 시작된 침략전쟁은 기원전 111년에 남월국의 멸망으로 종료되고, 그 땅에는 훗날 영남칠군이라 불리는 7개의 군이 설치되면서 한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누선장군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복파장군과의 경쟁 과정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한 무제의 큰 책망을 받은 터였다. 게다가 산둥(산동)반도를 출발할 때 5만명에 이르던 수군은 중도에 대부분 도주하여 7천명밖에 남지 않았다. 왕검성 공방 과정에서 또다시 육군 사령관 좌장군 순체와 알력이 생겨 누선장군은 죄인 신분으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남월국과 위만조선은 쌍둥이 운명


한의 동방에 위치한 위만조선과 남방에 위치한 남월국은 역사의 시작과 종말이 쌍둥이와 같은 동일운명체였다. 한의 지방관리였던 조타(趙?)가 재지인(현지인)들과 힘을 합쳐 남월국을 세운 것이 기원전 203년, 역시 한의 지방관리로 기록된 위만이 재지인들과 힘을 합쳐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것이 기원전 194년이었다. 한과의 사이에서 우호적인 관계와 적대적인 관계가 교차되면서, 결국 한 무제의 대군에 의해 왕성이 함락되고 군현이 설치된 것도 동일하다. 침략의 선봉에 선 누선장군도 동일한 인물이었고, 그의 운명마저 동일하였다.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위만조선의 역사는 가장 연구가 미흡한 분야이다. 그렇다면 남월국을 통해 위만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유추할 수는 없을까? 중국 광둥(광동)성 광저우(광주)시에서 발견된 남월국의 왕궁과 정원, 관청, 왕릉은 ‘남월국의 유적’이란 명칭으로 2008년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잠정 등재된 상태이다. 현지에 보존된 남월국 궁궐과 관청의 위용을 보면서 아직 찾지 못한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그려본다.


베트남의 뿌리인 남월국은 고대 중국에 항거하다가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멸망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대국가인 위만조선과 닮은꼴이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갔다. 현재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에 있는 남월국의 궁궐과 관청 터. 권오영 교수 제공


중국 한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기 전 남월왕이었던 조말의 무덤에서 나온 옥의. 권오영 교수 제공


위만의 손자이자 위만조선 마지막 왕인 우거왕의 무덤은 소재불명이지만, 조타의 손자이면서 남월국 2대 왕인 조말(趙?)의 무덤은 이미 발견되었다. 잘 다듬은 돌로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에서는 옥의(玉衣)를 입은 남월왕의 시신이 많은 부장품과 함께 발견되었다. ‘문제지새’(文帝之璽)라는 글자가 새겨진 도장도 발견되었다. 문제의 ‘제’(帝)는 황제를 의미하며, ‘새’(璽)는 황제의 도장을 뜻한다. 문헌기록에는 남월국이 한의 외신(外臣)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남월왕릉의 발견으로 인해,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이른바 ‘외왕내제’(外王內帝)의 국가였음이 밝혀졌다. 우리 역사에서 발해와 고려가 ‘외왕내제’를 표방하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남월국의 사례를 통해 위만조선도 ‘외왕내제’의 국가체제였을 가능성을 그려본다.


남월 문제의 무덤에 대한 중국의 공식 명칭은 ‘서한남월왕묘’(西漢南越王墓)이다. 서한의 외신이었던 남월왕, 그것도 왕릉이 아니라 왕묘로 격하되어 있다. 이는 남월국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작동하였기 때문이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사의 귀속 문제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갈등을 연상시킨다. 남월국의 영토는 현재 중국과 베트남에 걸쳐 있었으며, 월남이란 국명이 남월에서 유래하였음을 고려한다면 그 역사의 귀속에서 현재의 베트남을 빼는 것은 곤란하다.


남월국의 고토에 세워진 7개의 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성이던 광둥성 광저우시에 세워진 남해군, 광시(광서)성 베이하이(북해)시의 합포군, 그리고 베트남 하노이의 교지군이다. 위만조선의 고토에 세워진 4군을 놓고서는 위치와 성격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남월국을 통해 위만조선을 보듯이, 영남칠군을 통해 한사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교지-합포-남해-낙랑-김해-북부 규슈로 이어지는 경로는 고대 동아시아 해상실크로드의 간선이다. 이 길을 통하여 동남아시아의 물품이 동북아시아에 유통되었다.


내년 1월4일이면 베트남 하노이의 루이라우 토성 발굴조사단이 출국한다. 이 성은 교지군의 유력한 후보이다. 낙랑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하여 이 유적을 주목하던 필자는 마침내 고려대학교 문화유산융합연구소, 가경고고학연구소와 함께 발굴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15년간 진행될 장기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 학계의 시각은 훨씬 넓어질 것이며, 조사에 참여하는 젊은 학문후속세대의 앞으로의 활동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경주 구정동 방형분(네모무덤)에 있던 부조. 터번을 두르고 폴로 채를 든 서역인이 조각돼 있다. 권오영 교수 제공


신라 원성왕릉일 가능성이 큰 경주 괘릉의 무인상. 터번을 두르고 수염이 난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권오영 교수 제공


항시와 항시국가


남월국과 교지군, 합포군, 남해군, 임읍(참파), 부남(푸난), 낭아수(랑카수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해상교역이다. 남월왕릉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베트남, 인도, 파르티아(현재의 이라크와 이란)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섞여 있다. 교지군과 합포군, 남해군은 모두 항시(항만도시, 항구도시)에 해당되며, 임읍과 부남, 낭아수는 항시가 발전한 항시국가이다. 항시와 항시를 연결하는 해로를 통해 유럽과 아랍, 인도와 동남아시아가 중국과 연결되었다.


우리는 흔히 백제와 가야에 대해 해상왕국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해상교역은 바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항로 위에서 번성한 항시를 무대로 진행되었다.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에는 크고 작은 포구가 있다. 사천의 늑도는 작은 섬이지만 섬 전체에 걸쳐 낙랑, 제주도, 일본의 유물이 발견되어 이곳이 해상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나주, 가야의 김해, 일본의 쓰시마(對馬), 이키(壹岐), 후쿠오카(福岡)와 가라쓰(唐津)도 대표적인 항시였다. 백제와 가야의 국가적 성격을 항시국가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동남아시아의 항시와 항시국가에 대한 이해가 백제사와 가야사 연구를 더욱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고대 해상실크로드의 복원을 위해서도 동남아시아 항시와 항시국가 연구는 필수적이다.


경남 사천의 늑도에서 나온 일본 야요이계통의 토기. 늑도는 낙랑과 제주, 일본 물건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이곳이 고대 해상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권오영 교수 제공


그런데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이해는 다문화사회로 급속히 진입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웃과 공존하는 방법,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비 방안을 알려준다.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물들이 한국 사회에 들어와 정착하는 사건은 고대에도 비일비재하였다. 김해와 부산의 고대 마을 유적에서는 야요이계 토기가 다량 출토되어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을 알게 해주는 경우가 많다. 남해안에 점점이 분포하는 왜계 고분은 해상활동에 종사하던 왜인 중 일부가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여 묻힌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의 취락인 함평의 한 마을 유적에서는 승려의 얼굴을 그린 토기가 한 점 출토되었다. 삭발한 머리, 큰 코에 주걱턱을 한 이 인물은 승려, 그리고 백인종이었음에 틀림없다.


중국-한반도-일본열도를 오가며 정치외교적인 업무나 교역에 종사하던 인물 중에는 출생한 지역과 자신이 복무하는 대상이 다른 경우가 흔하였고 부모의 국적이 다른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고구려 사회에는 수많은 말갈인과 돌궐인이 고구려 국민으로 존재하였으며, 중국의 격변기에 난을 피해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도 많았다. 통일신라 왕릉 앞에는 서역인의 모습을 묘사한 무인석이 서 있고, 경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흙인형(토용) 중에는 서역인의 복식과 얼굴을 한 경우도 있다. 한창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경주 월성에서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을 무대로 동서교역에 종사하던 소그드인의 복장을 한 작은 흙인형(토우)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고대의 한국이 이미 다문화사회를 경험하였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한국사의 시작부터 한민족이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서 민족사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며 한민족이 순수한 단일민족이라는 주장도 허구이다. 민족이 먼저 출현하고 역사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역사가 진행되면서 현재의 한민족이 형성되었다. 민족은 역사의 산물이고 현재도 미래에도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는 평창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던 남자 아이스하키팀의 백인 선수들을 기억한다. 그들은 캐나다와 미국에서 나고 자랐으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택하였다. 반대로 국민적 영웅인 쇼트트랙 선수가 러시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하는 모습도 이미 보았다. 국민과 민족이 반드시 동일한 실체가 아니란 점, 민족은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만 인정한다면 한국인의 인종적 스펙트럼이 다양해지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순수하고 단일한 우리민족”의 역사가 이웃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점철된 항쟁의 역사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이웃에 대한 경계와 적대감은 극대화된다. 단지 어머니의 국적이 대한민국이 아니고, 생김새가 약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친구 사이가 파탄나는 요즘 현실을 보면, 민족의 순수성과 단일성을 강조하였던 한국 고대사 교육의 현재를 반성하게 된다.


예로부터 해상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는 인도와 아랍, 중국 상인 등이 함께 어울려 살았다. 이들 외지 상인들은 현지 사람들과 결혼해 가정을 이뤘으며, 페라나칸이라고 불리는 그 후손들은 오늘날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독특한 다문화사회의 바탕이 되고 있다. 교역을 위해 말라카를 방문한 중국 상인들의 모습이 말라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권오영 교수 제공


싱가포르는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공존하는 다문화사회다. 싱가포르 페라나칸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페라나칸 혼혈인의 다양한 얼굴들. 권오영 교수 제공


공존의 페라나칸 문화


이 점에서 다양한 인종의 혼혈과 문화의 접촉을 일찍부터 경험한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동남아시아의 고대 항시국가들은 교역을 위해 내방한 인도 상인과 재지인의 결합을 통해 발전하였다. 인도 상인의 역할은 훗날 중국, 일본, 타이, 유럽인들이 대신하였다. 외지의 남성과 현지의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일컫는 페라나칸(Peranakan·프라나칸)은 말레이어로서 “현지에서 태어난 아이”란 뜻이다. 처음에는 다양한 외국인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모든 혼혈인을 의미하였으나, 15세기 이후 중국 남부의 남성 노동자들이 동서 교섭의 최대 거점인 말라카(믈라카)로 몰려들면서 중국계 페라나칸의 수가 압도적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인도계, 중국계와 함께 페라나칸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각자의 고유한 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페라나칸 남성은 바바(Baba), 여성은 논야(Nonya)라고 부른다.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피낭,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맛볼 수 있는 논야 요리는 중국과 말레이의 음식문화가 결합되어 탄생한 새로운 음식문화이다. 페라나칸 문화는 주방용 도자기, 지갑과 신발 등의 장신구, 복식 등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휘하면서 동남아시아 문화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상징하고, 문화상품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고대 한반도에도 중국계, 일본계, 북아시아계, 중앙아시아계 페라나칸이 존재하였고, 현재는 동남아시아계 페라나칸이 급증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기회를 주지 않고, 한국 문화에 동화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보다 훨씬 먼저 다문화사회를 경험한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보면서,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문화가 절묘하게 버무려진 한국판 페라나칸 문화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이웃에 대한 폐쇄적 마음을 버리고 사회 구성원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한국 고대사 연구와 교육이 절실한 때이다.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직접 유적을 발굴하는 고대사 학자로, 역사학과 고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공학적 연구를 역사 탐구에 활용하는 학제 간 융복합 연구에 관심이 많다. 최근 연구 성과를 토대로 고대 한반도가 주변국들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대사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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