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계좌로 수십억 세탁…사채업자들도 전방위 활용
등록 : 2013.07.18 20:00수정 : 2013.07.18 21:55


전두환 전 대통령, 수천억 비자금 어떻게 관리했나
금융전문가가 차명계좌·대여금고 등 치밀하게 디자인

2004년 불법 대선자금을 추적하던 검찰은 서울 명동의 한 사채업자 계좌에 2001년 9월~2002년 3월 수표가 분산 입금된 걸 발견했다. 한빛은행(현 우리은행) 여의도 중앙기업금융지점에서 발행된 1억원 수표 등 모두 65억여원어치였다. 돈의 흐름을 수상히 여긴 검찰이 수표들의 출처를 보니 놀랍게도 모두 이트레이드증권 영업부에 개설된 ‘김철수’씨의 계좌로 이어졌다. 김씨는 노숙자였다. 1995년 뇌물죄 수사 이후 10년간 잊혀졌던 전두환(82) 전 대통령 비자금의 꼬리가 잡힌 순간이었다.

노숙자 김철수씨의 계좌는 지난한 ‘전두환 계좌’ 추적의 시작이기도 했다. 1994~2000년 발행된 국민주택채권이 김씨의 증권 계좌에 들어갔다 즉시 매도되는 방식으로 모두 137억500만원어치가 수표로 출금됐다. 이 채권들은 어디서 왔을까. 계좌 추적 결과 모두 사채업자들의 계좌에서 출고됐고, 그들의 계좌에 입금된 돈들을 추적하니 1991~1993년 산업은행과 장기신용은행(현 국민은행)에서 나온 채권들이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계좌추적은 이 지점에서 벽에 부딪혔다. 관련 장부·전표들의 보존기한이 지나 모두 폐기됐기 때문이다. 애초 보존기간은 10년이었으나 1995년 상법이 개정되면서 5년으로 축소됐다.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일지 모른다고 의심한 수사팀은 1995년 그의 뇌물죄 수사기록을 모조리 뒤진 뒤에야 안도했다. 1995년 포착했던 비자금 차명 계좌와 2004년 사채업자들 계좌가 연결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10년 전 수사 기록이 없었다면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채 접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07년 법원은 이 가운데 73억5500만원을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인정했고, 차남 재용(49)씨에게 증여세를 내게 했다. 수백건의 차명 계좌를 추적한 결과였다.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압수수색을 사흘째 이어가고 있는 18일 오전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시가 운영하는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 파주출판단지 시공사 사옥에서 관계자들이 압수한 미술품을 옮기고 있다. 파주/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004년 추적의 어려움은 1995년 수사 관계자들에게는 예견된 일이었다. 1995년 수사팀이 전 전 대통령의 은닉재산을 추적한 결과, “700~800개의 차명 계좌에 3억~5억원씩 돈이 나뉘어 있었고, 평균 3개월에 한번씩 돈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수백개의 차명 계좌를 동원해 계획적으로 관리됐다는 것이다. 이 자금 중 일부는 2000년까지 채권 구매 대금으로 흘러들어갔고, 노숙자 김철수씨의 계좌로까지 이어졌다. 이때는 자금 추적이 어려운 사채시장까지 활용됐다.

이런 치밀한 비자금 세탁은 ‘금융 전문가’의 조력 없이 불가능하다는 게 수사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실제로 검찰은 1995년 윤광순(79) 한국투자신탁 전 사장 등 금융권 유력인사들을 소환 조사했다. 전 전 대통령의 사돈이었던 윤 전 사장은 1983~1995년 그의 비자금 1020억원을 관리한 혐의를 받았다. 직원들에게 차명 계좌 개설을 지시한 유병국(55) 전 국두파이낸스 사장도 있었다. 이들은 당시 기소되지 않았다. 2004년 어렵사리 찾아낸 73억5500만원은 1997년 법원에서 추징금으로 인정한 2205억원의 3%에 불과하다.

검찰은 남은 97%의 세탁 과정을 규명할 수 있을까. 2004년 수사로부터 10년이 흘러 자금 추적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검찰은 다시 10년 전 수사 기록을 들여다보고 있다. 16~17일 전 전 대통령의 친인척은 물론 2004년 당시 수사 대상이었던 재용씨의 사업 조력자와 명의 제공자 등에 대해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최근 계좌와 부동산의 흐름을 추적해 이들의 관련 진술을 확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전방위적인 압수수색과 압류는 이를 위한 압박으로 해석된다.

송경화 김원철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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