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2962
정몽주가 이성계 꺾었다면, 고려는 지속됐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드라마 <정도전>, 여섯 번째 이야기
14.05.19 17:54 l 최종 업데이트 14.05.19 17:54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정도전>의 주요 인물들. 왼쪽부터 정도전(조재현 분), 이성계(유동근 분), 이인임(박영규 분), 최영(서인석 분), 정몽주(임호 분). ⓒ KBS
지난 주말 방영된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일시적으로 권력을 획득한 정몽주는 이성계를 상대로 고강도의 압박을 단행했다. 이성계가 일신상의 사유로 조정을 비운 사이에 이성계의 최측근 참모들인 정도전·남은·조준 등을 탄핵하고 유배지로 보낸 것이다.
실제로도 고려 멸망 몇 달 전에 정몽주는 이성계를 상대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고려사> 공양왕 세가(공양왕 편)에 따르면, 문하시중(총리)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조정에 출근할 수 없게 되자, 수문하시중(부총리) 정몽주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이성계의 참모들에 대한 숙청 작업에 돌입했다.
이때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개경 선죽교에서 정몽주에게 테러를 가하는 돌발 행동을 벌이지 않았다면, 정몽주가 이성계를 꺾고 정권을 장악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성계는 정권을 잡은 뒤 토지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수파는 물론이고 신진사대부(개혁파 관료그룹)의 상당수를 적으로 만들었다. 일반 백성들은 토지개혁을 찬성했지만, 고려 멸망 직전에는 이들의 지지가 이성계에게 결정적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성계는 민중의 지지 하에 혁명을 통해 정권을 획득하지 않고, 지배층의 일원인 개혁파의 지지 하에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획득했다. 그렇기 때문에 토지개혁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를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민중의 동향보다는 지배층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토지개혁에 대한 지배층 다수의 거부감은 이성계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토지개혁을 명확히 찬성하지 않는 정몽주가 와병 중인 이성계를 대신했으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정몽주가 토지개혁 반대 여론의 지지를 업고 이성계를 꺾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따라서 이방원이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이성계 진영은 그대로 와해됐을지도 모른다.
정몽주가 이성계 축출하고 새로운 정권 창출했다면?
▲ 낙마 사고를 당하는 이성계. ⓒ KBS
그렇다면, 만약에 정몽주가 이성계를 축출하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했을 경우에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라지만, 이리저리 두뇌를 움직여 역사의 가정을 해보지 않으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인식의 폭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가정은 의미 있는 것이다.
정몽주가 역사의 승자가 됐을 경우에 나타날 수 있었던 첫째 시나리오는, 그가 단심가에서 읊은 대로 붉은 충심을 지키면서 고려왕조를 끝까지 사수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당연히 고려왕조가 1392년에 멸망하지 않고 계속 수명을 연장했을 것이다. 그럼, 이 경우에 고려는 얼마나 더 존속했을까?
중국이 지역 최강국으로 떠오른 기원전 3세기 이래로, 동아시아에서는 길게는 200~300년마다, 짧게는 100년마다 국제질서가 바뀌었다. 국제질서가 바뀔 때마다 중국의 최강 왕조는 어김없이 교체됐고, 한국 왕조는 교체되거나 위기를 겪었다. 한국이 왕조 교체를 피하고 위기만 겪는 선에서 넘어간 경우는, 기본적인 군사적 방어 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새로운 패권국과 신속히 동맹을 체결한 경우였다.
그런데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서기 7세기 이후로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정치적 연동성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한반도의 흥망성쇠와 중국의 흥망성쇠가 거의 같은 시점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패턴은 1910년 및 1912년에 대한제국과 청나라가 연이어 멸망하고 1948년 및 1949년에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연이어 건국될 때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 같은 역사적 패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지난 2천 년간 한국 왕조가 오로지 내부적 요인만으로 교체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 질서가 전반적으로 위기에 봉착하는 경우에만 한국 왕조가 살아남느냐 망하느냐 하는 존폐 문제가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동아시아 질서가 흔들리거나 동아시아 패권국과의 동맹관계가 흔들리지 않는 한, 한국 왕조가 내부적 요인만으로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게 지난 2천 년간의 역사의 패턴이었다.
17세기 전반에 조선이 망하지 않은 이유
▲ 이성계를 대신해서 권력을 장악한 정몽주. ⓒ KBS
이런 점을 고려하면, 정몽주가 이성계의 왕조 창업을 저지했다면, 고려가 적어도 차기 국제질서 교체기까지는 계속 존속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1368년에 명나라가 몽골(원나라)을 내쫓고 수립한 국제질서는 1644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할 때까지 유지됐다. 1368년에 세워진 질서는 임진왜란(1592~1599년)을 계기로 휘청거리기 시작하다가 1644년에 새로운 질서로 대체됐다.
1368년 질서가 타격을 입은 임진왜란 이후로, 동아시아에서는 왕조교체 내지는 그에 준하는 변화가 발생했다.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했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도쿠가와 가문이 지배하는 군사정권)가 새롭게 등장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왕조 교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양반 지배층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타격을 입자 서민층이 양반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각계각층에서 성장하는 현상이 출현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과 이후의 조선은, 왕조는 동일하지만 사회적 성격은 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7세기 전반에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은 동아시아 패권국과의 관계를 신속히 재정립했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약해지고 여진족(훗날의 청나라)이 흥기하자 광해군은 명나라에 대한 미련을 버렸고, 광해군의 외교가 잘못됐다며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 역시 결국엔 청나라를 선택했다. 이런 외교적 선택 덕분에 조선왕조는 17세기 전반의 위기를 극복하고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국의 왕조교체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상호 연동된 점을 볼 때, 고려왕조가 1392년에 멸망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17세기 전반까지는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됐다면, 임진왜란 때 일본의 상대방은 조선왕조가 아니라 고려왕조였을 것이다. 정몽주가 이성계를 꺾었다면, 조선군이 아닌 고려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상대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 이성계·정도전·정몽주
▲ 귀양 가는 정도전. ⓒ KBS
반대로, 만약 정몽주가 이성계를 꺾은 뒤 욕심을 부렸다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설마 정몽주가 그런 짓을?' 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외치기 직전까지만 해도 정몽주가 충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몽주는 1388년에 이성계의 쿠데타(위화도회군)를 지지했다. 그는 쿠데타 세력이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할 때도 함께했고,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도 함께했다. 쿠데타를 지지한 것은 물론이고 임금을 두 번이나 폐위시키는 데 가담했던 것이다. 만약 고려왕조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었다면,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정몽주가 막판에 이성계와 정면 대결을 벌인 것은 무엇보다도 이성계가 그의 마지막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위화도회군-창왕옹립-공양왕옹립을 거치면서 정몽주는 이성계와 힘을 합쳐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그런 뒤에 맨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이 이성계·정도전·정몽주였다.
힘을 합쳐 정적들과 싸우던 사람들이 승리를 거둔 뒤 상호 분열에 돌입하는 것은 정치투쟁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정권을 획득하면 승자 내부에서 분파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성계·정도전·정몽주가 정권을 잡은 뒤에 나타난 이성계·정도전 대 정몽주의 대결도 이런 법칙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정몽주가 이성계와 대결한 것은 고려에 대한 충성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정몽주가 그런 욕심을 가진 상태에서 이성계를 꺾었다면, 정몽주 역시 이왕에 약해진 고려왕조를 되살리기보다는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정몽주가 정씨의 나라를 세웠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정몽주에게는 독자적인 사병부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창업한 결정적 원동력은 그의 사병부대였다. 고려 정부군이 약해진 당시의 상황에서 사병 부대 없이 독자적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병이 없는 정몽주가 직접 왕이 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그의 입장에서는 사병을 보유한 제3의 무인 권세가를 왕으로 옹립할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이 그러했듯 정몽주 역시 킹메이커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정몽주가 이성계를 꺾었을 경우에 나타날 수 있었던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고려왕조가 정몽주의 공로에 힘입어 최소한 200년 이상 더 살아남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몽주가 제3의 무장과 손잡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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