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77676

강제 이혼 당한 중종, 조광조를 농락하다
[참모열전 16회: 조광조 3부] 불도저 조광조의 전성기와 쇠락
14.04.07 11:50 l 최종 업데이트 14.04.07 11:50 l 김종성(qqqkim2000) 

     [1부] 급진적이었지만, 현실적인 목표 갖고 개혁 추진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3
     [2부] 혁명 꿈꾸다 개혁파 된 조광조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2
     [3부] 불도저 조광조의 전성기와 쇠락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1
     [4부] 조광조, 참모였기 때문에 실패했다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0  

▲  드라마 <조광조>. 배우 유동근이 조광조를 연기했다. ⓒ KBS

건국 90주년이 된 조선왕조가 삐걱거리던 1482년, 조광조는 한양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과거시험보다는 정치변혁에 관심이 더 컸던 그는 26세 때였던 1507년에 서얼들과 함께 혁명을 모의했다가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훈방되었다. 동지들은 사형을 당했지만, 그는 명문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1507년은 쿠데타군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 임금을 옹립한 중종반정(1506년)이 벌어진 이듬해였다. 조광조는 시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새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 뒤 혁명보다는 개혁으로 선회한 조광조는 과거시험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그는 29세 때인 1510년에 과거시험 소과(小科)에 장원급제하여 진사 자격을 취득한 뒤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입학한다. 입학하자마자 학내 개혁운동을 벌이다가 징계를 받을 뻔했지만, 이마저도 잘 피해나간 그는 서른네 살 때인 1515년에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발을 디디게 된다. 

급제 직후의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관직을 거친 조광조는 적성에 맞는 관직인 사간원(지금의 감사원 기능을 부분적으로 보유) 정언에 임명된다. 임금을 상대로 국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 자리는 언변이 탁월한 그에게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사간원에 들어간 지 이틀 뒤, 조광조는 가슴속에 숨겨둔 개혁의 칼날을 꺼내든다. 자신이 속한 사간원 관료들뿐만 아니라 사헌부(지금의 검찰청 기능 보유) 관료들까지 전원 교체해줄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린 것이다. 신입 관료가 올린 이 상소는 조정 전체에 메가톤급 충격을 가한다. 조정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중종 부부를 강제로 이혼시킨 쿠데타 주역들

그로부터 9년 전, 연산군의 12세 연하 이복동생인 중종은 쿠데타 주역들의 추대로 임금이 되었다. 그런데 훈구파로 불리는 이 쿠데타 주역들은 중종 부부를 강제로 이혼시켰다. 중종의 부인인 신씨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중종의 부인은 연산군의 인척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씨와 이혼하게 된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궁에서 쫓겨난 신씨는 무언의 1인 시위를 되풀이했다. 남편과 세상에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자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어놓곤 했던 것이다. 피켓 대신 치마를 1인 시위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이런 사연 때문에, 이 바위는 그 후 치마바위라고 불리게 되었다. 

중종은 신씨와 재결합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 연산군을 부정하고 훈구파를 긍정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 연산군의 인척이자 훈구파의 적인 신씨와의 재결합은 정치적으로 손실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중종반정을 성사시킨 주역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면서 훈구파의 힘이 조금씩 약해졌다. 이런 상태에서 반정 9년 뒤인 1515년에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개혁세력인 사림파는 중종과 신씨의 재결합을 촉구하고 나섰다. 사림파의 진짜 목적은, 신씨를 왕비로 만드는 것보다는 훈구파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총대를 멘 사림파 관료가 전라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었다. 이들은 신씨를 왕비로 맞이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런 상소는 중종반정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종반정 덕분에 출세한 사람들은 박상·김정을 위험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훈구파를 대표해서 총대를 멘 인물이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 이행이었다. 이행은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권민수를 움직였다. 이행과 권민수는 각자 자기 조직을 움직여 박상·김정에 대한 탄핵과 처벌을 주도했다. 사간원과 사헌부가 박상·김정에 대한 집중 포화를 개시한 것이다. 결국 박상·김정은 관직을 빼앗기고 유배를 당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사간원에 입성한 '괴물'


▲  사간원 터를 알려주는 표지석. 서울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맞은편에 있다. ⓒ 김종성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사간원에 입성한 '괴물'이 바로 조광조다. 사림파를 향해 권총 사격을 가하는 사간원·사헌부를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그는 '박격포' 하나를 들고 나왔다. 사간원·사헌부의 전원 해임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린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정부 관료들뿐만 아니라 상소를 받은 중종도 당혹스러워했다.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하는 분위기였다. 

중종은 처음에는 조광조의 요청을 거부했다. 하지만 조광조가 뜻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중종은 조광조라는 인물의 효용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훈구파에 둘러싸여 허수아비로 살아온 중종은 '조광조라는 인물을 잘만 이용하면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중종은 결국 조광조의 상소를 수용했다. 조광조가 그런 상소를 올린 것도 황당한 일이었지만, 중종이 그런 상소를 수용한 것은 더욱 더 황당한 일이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상소에 따라 사간원·사헌부를 물갈이한 뒤 조광조를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발탁했다. 과거에 갓 급제한 신입 관료가 권력 핵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게 있다. 박상·김정은 신씨를 왕비로 만들라고 요구했고, 이행·권민수는 그런 박상·김정을 공격했다. 뒤이어 조광조는 이행·권민수를 공격했고, 중종은 조광조의 편을 들어주었다. 따라서 조광조의 상소를 수용한 중종의 태도는 신씨와 재결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종은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주면서도 신씨와의 재결합은 추진하지 않았다. 억울하게 이혼당한 전처를 끝내 외면했던 것이다. 중종의 비정한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만약 이때 조광조가 중종의 비정함에 주목했다면, 그는 몇 년 뒤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광조는 임금이 자기 손을 들어주었다는 점에만 주목하고 그 이외의 측면에는 제대로 주목하지 못한 듯하다. 

노골적으로 권력욕을 표출했던 조광조

중종의 전폭적 후원을 받은 조광조는 훈구파에 대한 정치 공세와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추진했다. 훈구파가 어느 정도 약해진 상태인 데다가 중종이 전폭 지원을 한 덕분에 조광조의 정치공세는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권력을 차지한 훈구파의 뿌리가 보일 듯 말 듯 할 정도로, 조광조는 훈구파라는 거목을 있는 힘껏 들어올렸다. 

이 과정을 통해 중종은 사림파를 이용해 훈구파를 약화시킴으로써 왕권을 상당 정도 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조광조는 개혁을 위해서 싸웠지만, 중종은 왕권을 위해서 싸웠던 것이다. 하지만 훈구파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이런 차이는 얼른 드러나지 않았다. 

개혁에 대한 조광조의 의지는 노골적이면서도 불도저 같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등장했던 몇몇 개혁 정권들은 권력기구들을 과감히 장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광조는 달랐다. 그는 아주 노골적으로 권력욕을 표출했다. 

이 점은 조광조가 만든 현량과라는 관료 선발제도에서도 드러난다. 현량과는 사림파의 추천을 받아야만 시험에 응시할 수 있고 사림파의 의중에 맞는 논술 답안지를 제출해야만 합격할 수 있는 제도였다. 사림파의 눈 밖에 난 선비는 응시 기회도 얻기 힘들었다. 

1518년에 열린 최초의 현량과 시험에서 출제된 문제가 조광조가 평소에 좋아하던 주제인 '어떻게 하면 중국 요순시대의 이상적인 정치를 구현할 수 있을까'였고, 이 시험의 장원급제자가 조광조의 친구인 김식이었다는 점은 현량과의 공정성에 대한 의혹을 초래할 만한 것이었다. 

누가 봐도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이런 제도를 만든 것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단기간에 개혁파들로 조정을 채우고 구세력에 대한 최종 공세를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광조는 이런 노골적인 방식을 통해 단 몇 년 내에 개혁파의 천하를 만들어냈다.

조광조 사후 500년, 많은 이들이 그에 열광하는 이유


▲  조선시대 특권층의 가옥. 서울 남산한옥마을에 재현되어 있다. ⓒ 김종성

조광조는 개혁의 대상인 구세력이 양심적으로 개혁에 동참해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구세력의 숨통을 조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구세력의 지위·명예·재산을 박탈하고자 했던 것이다. 

중종반정을 성사시킨 훈구파는 117명의 자파 조직원들을 공신으로 만들었다. 이 117명은 중종반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중종반정 주역들과 친한 사람들이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자기 편 사람들이 공신 자격을 획득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통해 훈구파는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공신이 되면 지위와 명예뿐만 아니라 토지와 노비까지 획득했다. 조선시대 노비의 대다수는 주인의 토지를 경영했다. 따라서 노비는 농업회사의 직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토지는 공업사회로 치면 공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신들은 이런 공장과 직원들을 무료로 획득했다.  

다른 경우에도 똑같지만, 지위·명예·재산은 훈구파가 사회를 지배하는 무기였다. 조광조는 이 무기를 빼앗아버렸다. 집권 4년 만인 1519년에 조광조는 애초에 117명이었던 훈구파 공신을 29명으로 축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공신들의 자격을 빼앗은 것은 그들의 지위·명예·재산을 박탈하기 위해서였다. 구세력을 굶겨놓아야 개혁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정국공신 개정작업이라고 부른다.  

조광조의 무자비한 개혁 드라이브 앞에서 훈구파는 넋을 잃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조광조가 여론의 추이를 보아 가며 일을 추진했다면, 훈구파는 그 틈을 타서 반격의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광조는 구세력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렇게 구세력을 꺾음으로써 조광조는 일약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무자비하면서도 시원스럽게 개혁을 추진하는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광조가 죽은 지 근 500년이 되도록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것은 그가 보여준 놀라운 추진력 때문이다. 

그런데 정국공신 개정작업을 완수한 지 4일 뒤인 중종 14년 11월 11일(양력 1519년 12월 2일)이었다. 이 날 새벽, 조광조의 집 앞에 무장한 사람들이 출현했다. 중종의 명령을 받고 출동한 조광조 체포조였다. 중종이 조광조 체포를 명령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제4부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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