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42255.html?_fr=mt2

문창극이 인용했다는 윤치호는 누구?
등록 : 2014.06.13 17:07 



윤치호

“고국 선택할 수 있다면 일본 선택…
일본 집 정결, 우리나라는 똥 뒷간”

문창극 총리 후보자는 “우리 민족이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다” 같은 강연 내용이 윤치호(1865~1945)의 말을 인용한 것뿐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윤치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일까? 윤치호는 일제 시기 시국강연 등을 통해 전시 동원에 적극협력했던 인물. 한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신민회 활동 등으로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던 그의 ‘전향’ 또는 ‘변절’ 아래에는 조선이 미개하다는 일제의 인식이 그대로 깔려있다.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1890년 5월18일 일기)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1893년 11월1일 일기)

윤치호는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조선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동화됐듯이 일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1885년 스무살 나이에 상하이 중서서원에 유학할 때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청인(중국인)의 집은 음침하기 짝이 없어 일본 사람의 정결하고 명랑한 집에 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똥뒷간 같은 집이야 어찌 청인의 2층집에 비하겠는가.”

충청도 아산에서 병조판서 윤웅렬의 자식으로 태어난 윤치호는 16살 때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조선의 첫 일본 유학생이 됐다. 그때부터 일본어와 영어 공부에 몰두한 그는 자신이 따랐던 김옥균과 가까웠던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사귀며 조국의 남루와 낙후를 뼈저리게 느꼈고 일본에 대한 선망을 키웠다. 조선 500년 역사를 “허송 세월”이라고 한 문창극 후보자가 인용했다는 윤치호는 조선을 음침한 중국보다도 못한 ‘똥뒷간’으로 인식했던 윤치호다.

1888년 말에 미국으로 건너간 윤치호는 밴더빌트 대학에서 신학과 영어를 공부한 뒤 에모리대에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그때 기독교도가 된 그는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더러운 중국, 악마같은 정부가 다스리는 조국이 아니라 일본을 “동방의 낙원”으로 점찍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적극적 ‘친일파’는 아니었다. 그가 친일파로 ‘전향’한 것은 나라가 망한 그 다음해인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조선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대거 잡아들인 ‘105인 사건’으로 3년 징역을 살면서였다. 1915년 3월14일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 조선 민족은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상호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노력할 필요가 있다…앞으로는 일본의 여러 유신 신사들과 사귀면서 일선 민족의 행복을 위해 양 민족 동화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3·1운동 때 국민대표로 서명하라는 권유를 뿌리쳤고 독립운동가들을 “자신이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순진한 사람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저주받을 악마와 같은 존재”라고 혐오했으며, 임시정부 참가 요청도 거부했다. 그는 반대 이유로 파리 강화회의에서 조선 문제는 상정도 되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조선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들고, “약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라고 밝혔다.(1919년 3월 6일)

이후 그는 독립운동을 ‘맹목’적이라 비판하고, 조선 민족의 실력 양성만이 해법이라고 얘기했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그의 친일 행각은 본격화했다.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창립식’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1940년 창씨개명(伊東致昊·이토 지코)을 했다. 흥아보국단·임전보국단을 조직했으며, 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돼 시국강연을 다니며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했다.

광복 직전 제국의회 귀족원의 조선칙선위원이 됐고 내부대신과 경찰부원까지 맡았다.

광복 직후 김구와 이승만, 미 군정청에 ‘한 노인의 명상록’이란 이름으로 보낸 편지에서 윤치호는 “일본의 신민으로서 ‘조선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들에게 일본 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는 어떤 대안이 있었겠”느냐고 했다. 그는 또 친일파 단죄를 반대하면서 조선 민중의 무지를 질타하고, “‘해방’이란, 단지 연합군의 승리의 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온 것뿐”이라며 독립운동가들을 “허세와 자만에 찬 저 ‘애국자’들”이라며 비아냥댔다.

계몽주의와 다윈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속류 사회진화론자로, 강자가 약자를 가르치고 지배하는 ‘힘에 의한 정의’를 믿었던 윤치호, 그는 결국 철저한 패배주의자요 대세 순응주의자로 전락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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