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4_0010_0020_0020
* "2) 독립군의 국내작전과 그 활약의 양상"에서 중간 부분인 "(2) 주요 국내작전과 그 활약"만 가져왔습니다.
* 아래 지명들은 행정구역 변경으로 검색이 쉽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후에 확인하겠음.
(2) 주요 국내작전과 그 활약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Ⅰ.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2.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작전 > 2) 독립군의 국내작전과 그 활약의 양상
3·1운동 후 압록강·두만강 국경 지대에서는 상술한 바와 같이 항일무장독립군의 국내로의 진격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일제군경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독립군의 국내로의 진격과 활약을 전하는 우리나라측 기록과 일제측 기록 사이에는 날짜와 전과기록 들에 많은 차이와 문제점을 남기고 있어 앞으로는 이러한 점을 엄밀하게 고증하여 민족적인 입장에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고려하면서 1919년부터 1925년에 이르는 수 많은 독립군의 국내로의 진격과 활약가운데, 격렬하였고 또 두드러진 성과를 거둔 항전만을 들어 보고자 한다.
○ 홍범도부대의 만포진(滿浦鎭)·자성(慈城)으로의 진격과 항전(1919년 9·10월)
3·1운동 후 만주·노령에서 형성된 수많은 항일무장독립군단 가운데 최초로 국내 진격 작전을 감행한 군단은 홍범도부대였다. 홍범도는 상해 임시정부의 연기 권고에도 듣지 않고 9월부터 국내 진격작전을 감행하였다. 9월에는 함남 갑산(甲山)군으로 진격하여 금정(金井)주재소를 기습공격하고 10월에는 평북 강계(江界)군 만포진으로 진격하여 이를 점령하여 개가를 올리고 다시 자성군으로 진격하여 일본군과의 교전 끝에 일본군 70명을 사살하는 대첩을 올렸다. 이 대첩은 일본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또 해외 항일무장독립전선에 새로운 용기를 북돋우게 되었다. 대첩의 소식을 전해 듣고 놀란 상해 임시정부는 10월 26일에 오동식(吳東植)·김응식(金應植)을 이곳에 파견하여 공식적으로 이를 확인하기까지 하였다. 이같이 하여 항일무장독립군부대의 국내로의 진격 작전은 ‘스타아트’ 하였다.註 024
○ 홍범도부대의 온성(穩城)으로의 진격과 항전(1920년 3월 15·17·18일)
홍범도가 거느리는 대한독립군 200명은 1920년 3월 15일 두만강을 건너 이날 오후 9시에 함북 풍리(豊利)동 주재소를 기습 공격하여 순사 1명을 사살하고, 3월 17일에는 다시 함북 월파(月坡)·풍교로 진격하여 군자금 600엔을 모금하였다. 다시 3월 18일 오전 1시에는 함북 장덕(長德)동으로 들어가 군자금 30엔을 모금하고, 이날 월파·풍교·장덕동으로 진격해 온 독립군이 합류하여 50명이 되었다. 이들 1대는 오전 6시경에 미점(美占)등 헌병감시소를 기습공격하여 일본 헌병 2명을 사살하고 권총 7정을 노획하였다. 또 이날 오전 9시경에는 함북 향당(香棠)동 대안에서 기습공격하고, 다시 이날 오후 5시에는 온성 대안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타격을 주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발표에 의하면 이때 홍범도부대가 온성·무산(茂山) 등지를 기습공격한 것은 전후 8회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註 025
○ 대한독립단원의 의주(義州)로의 진격과 주구배 숙청(1920년 3월 15일)
한말 이래 평북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해 오던 박장호·조맹선·백삼규 등이 만주 유하현 삼원보로 이동하여 1919년 3월 말에 조직한 강력한 항일무장독립군단이 대한독립단이다. 이들은 국내에 비밀로 지하 지단을 설치하여 3·4명씩의 편의복 결사대를 조직한 후 주구배를 숙청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국내로 들어왔다.
1920년 3월 15일 먼저 수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의 행동을 밀고하던 평북 태산(台山)면장 김병준(金炳駿)과 서기 김은기(金殷基)를 살해 처단하였다. 즉 이날 편의복 차림의 결사대원 3명은 태산면사무소를 기습하여 이들을 살해 처단하고 그곳 공금 800엔을 군자금으로 몰수하였다.
또한 같은날 저녁 7시에는 결사대 3명이 다시 일본군 헌병 보조원 출신으로 의주경찰서의 순사로 재직중이던 김명익(金明翼)을 그의 집에서 처단하고 그 처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김명익은 그의 동생 김경륜(金敬崙)이 의주우편국에 근무하는 것을 이용하여 독립군의 비밀문서를 내사 한 후에 그 정보를 경찰에 제공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을 검거 투옥케 하 고 많은 독립군 가족들을 박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대한독립단원들은 때때로 국내로 잠입하여 주구배 숙청에 노력하여 많은 성과를 올려 일제 주구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註 026
○ 대한독립단원의 삭주(朔州)로의 진격과 주구배 숙청(1920년 6월4일)
평북 삭주군 신안(新安)동에는 일찌기 금광이 개광되어 광부 300여명이 살고 있었다. 지난해 이래 이곳 주재경찰과 그 주구 고병근(高秉根)·김태영(金泰永) 등의 횡포로 이곳 광부 주민들의 원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 갔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대한독립 단원들은 이들을 숙청하기로 합의하고 1920년 6월 4일 밤에 6인 3대로 나뉘어 1대는 마을 주점으로 1대는 고병근의 집으로 1대는 주재소로 향하도록 하였다.
주점에는 고병근과 김태영이 술을 마시고 있어 즉석에서 살해 처단하였다. 주점에서의 총성과 함께 고병근의 집으로 간 1대는 그의 처·첩 양인과 여아 2명까지 살해해 버렸다. 주점과 고병근의 집에서 나온 4인은 주재소로 가기로 한 2인과 합세하여 주재소를 기습하였다. 겁을 먹은 순사들은 도주해 버렸다. 주재소를 점령한 대한독립단원 6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3창하고 유유히 월강하여 본단으로 돌아갔다.註 027
○ 독립군이 의주군으로 진격하여 옥상(玉尙) 면사무소와 주재소 습격(1920년 8월 13일)
장총·권총으로 무장한 항일무장독립군 30명이 8월 13일에 옥상면 사무소와 주재소를 기습공격하여 일본인 순사를 비롯한 2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동월 15일에는 부근 소좌(小佐)동에서 일본경찰대와 격전을 벌였다.註 028
○ 독립군(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소속)이 서울로 진입하여 활약(1920년 8월 21일)
광복군총영 소속의 결사단 단장 김영철(金榮哲)외 10여 명이 국내로 진격하여 8월 3일에는 평남도청, 8월 15일에는 신의주역에 각각 폭탄을 던지고 다시 서울로 진입하여 시민들에게「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을 산포하고 미국 의원단이 서울에 입성하는 날과 때를 맞추어 남대문·총독부·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하였다가 사전에 탄로되어 체포되는 바람에 폭탄 3개, 권총 3정, 탄환 160발이 경찰에 압수되어 버렸다.註 029
* 산포 : 흩어져 퍼지거나 흩어 퍼뜨림
○ 독립군(대한독립군/大韓獨立團소속)이 황해도(黃海道) 은율(殷栗)·신천(信川)으로 진입하여 활약(1920년 8·9월)
대한독립단에 속하는 항일무장독립군 30여 명이 1919년 5월 중순에 국내로 진입하여 7월까지 평북 구성(龜城)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8월 8일에는 평양(平壤) 부근에서 일본인 순사를 살해하고 곧 황해도로 들어가 8월 15일 오후 11시 반경에 은율군수 최병혁(崔丙赫)집을 기습하여 군수 최병혁을 처형하였다. 그리고 신천군으로 진입하였을 때 이들을 추격하여 달려 온 일본 경찰 50명과 격전을 벌려 독립군 5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명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권총 10정과 탄환 500발을 빼앗겼다.註 030
○ 독립군이 철산(鐵山)군으로 진격하여 도참사(道參事)집을 습격(1920년 9월 30일)
9월 30일 항일무장독립군 20명이 평북 철산군으로 진격하여 부일배인 도참사 오기현(吳基鉉)의 집을 습격하고 그곳 무기를 압수하였다. 그리고 10월 2일에는 선천(宜川)군 산면(山面)에서 일본경찰과 조우하여 그들과 격전을 벌이고 후퇴하였다.註 031
* 도참사 : 도지사 자문기관
○ 독립군(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김규면/金圭冕에 소속)이 함북으로 진격하여 활약하고 다시 서울로 진입하였다가 체포당함(1920년 10월 10일)
1919년 8월 7일 두만강을 건너 함북 무산으로 진격한 대한신민단소속의 독립군 6명이 무산·부령(富寧)·경성(鏡城)·길주(吉州) 등지와 함남·단천(端川)·북청(北靑)·풍산(豊山) 등지에서 독립군 185명을 모병하고 또 많은 군자금(계약한 것과 합하여 3만 5천 900엔)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10월 10일에 서울로 진입하여 대사를 계획하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註 032
○ 독립군(광한단/光韓團소속)이 평안남·북도로 진입하여 군자금을 모금(1921년 11월)
광한단 소속의 독립군 10명이 1920년 11월(날짜 미상)에 평안남북도에 진입하여 그곳 부호 유지들로부터 약 1만원의 군자를 모금하고 계속 활약하다가 1921년 1월(날짜 미상)에 경찰에 체포되었다.註 033
○ 독립군(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소속) 2명이 대동(大同)군에 진입하여 폭탄을 제조(1921년 2월 14일)
대한군정서 소속의 독립군 이명하(李明夏)외 1명이 대동군으로 진입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 또 일제의 관공서를 파괴하기 위해 원료를 밀수입하여 폭탄 2개를 제조하였다가 발각되어 대동경찰서에 검거되었다.註 034
○ 독립군이 영변(寧邊)지방으로 진격하여 경찰과 대격전을 벌임(1921년 3월 1일)
16명의 항일무장독립군이 영변지방으로 진격하여 1921년 3월 1일에 그곳 길성(吉城)면에서 일본경찰과 4시간에 걸찬 격전을 벌이고 오리(吾里)면 산곡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일본경찰이 24명의 응원을 얻어 다시 독립군에게 도전해 옴으로 독립군은 다시 이들과 4시간에 걸쳐 격전을 하고 타처로 이동하였다. 이 격렬했던 전투에서 독립군 2명이 전사하였다. 독립군의 굳센 저항을 보인 전투였다.註 035
○ 독립군(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소속)이 의주로 진격하여 광평(廣坪)면에서 격전(1921년 6월)
대한광목군총영 소속의 독립군 5명이 군자금 모금의 임무를 띠고 평남지방으로 진입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군 광평면 하광(下廣)동의 백봉집(白鳳揖)의 집에 투숙하던 중 불량배 윤용섭(尹鏞燮)의 밀고로 일본 경찰 10여명이 야음을 틈타 공격해 왔다. 독립군은 그들과 맞서 3시간에 걸친 대격전을 벌였다. 독립군의 굳센 저항에 견디다 못하여 일본경찰은 일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군은 이 틈을 타 그곳을 빠져나와 강을 건너 무사히 본영으로 돌아왔다.註 036
○ 독립군(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소속)이 창성(昌城)으로 진격하여 대유(大楡)동 주재소와 면사무소 점령(1921년 8월 21일)
대한광복군총영에 소속된 독립군 대장 최시흥(崔時興) 이하 20명은 1921년 8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창성 대유동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은 이곳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기습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4대로 나누어 대오를 정비한 후 나팔소리를 신호로 함성을 지르며 주재소와 면사무소로 돌진해 들어갔다. 주재소의 경찰 10여 명과 면사무소·우편소 직원들은 혼비백산하여 뒷편 퇴피호(退避壕)로 도망하여 인적이 없었다. 주재소에 돌입한 독립군은 총기 20정, 탄환 수천 발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주재소·면사무소를 소각해 버리려다가 재건시의 민중들의 고역을 생각하여 그냥 두고, 서류만을 압수하여 소각해 버렸다.
* 퇴피호(退避壕) : 재해 등 위험 피난처
독립군은 이곳 민중들의 환호성 가운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치고 점령 4시간 후에 노획 무기를 거두어 강을 건너 본영으로 돌아갔다.註 037
○ 독립군이 초산(楚山)으로 진격하여 도원(桃原)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점령 소각(1921년 10월 7일)
독립군 22명이 1921년 10월 7일 저녁에 압록강을 건너 진격하여 그 날 오후 8시30분에 3대로 나뉘어 도원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기습공격하여 주재소의 총기 5정, 탄환 수백 발, 군도 4자루를 노획한 후 순사 부처를 처형하고 면장 형제를 부상을 입혔다. 또한 전주(電柱) 4개를 베어 넘어뜨리고 주재소·면사무소의 서류를 소각한 후 강을 건너 본대로 귀환하였다.註 038
○ 독립군이 삭주로 진격하여 원풍(院豊)동에서 격전(1921년11월21일)
독립군 6명이 1921년 11월 21일 삭주군으로 진격하여 양산(兩山)면 원풍동에서 삭주 경찰수색대 6명과 치열함 격전을 벌인 끝에 독립군 3명이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경찰에게도 피해를 입혔다.註 039
○ 독립군이 함북으로 진격하여 신건원(新乾源)의 일군수비대와 주재소를 습격(1922년 1월 4일)
최경천(崔慶天)·김광(金光)이 거느리는 약 30명의 항일무장독립군이 1922년 1월 4일의 야음을 틈 타 함북으로 진격하여 신건원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수비대와 그곳 주재소에 약 30분간에 걸쳐 총탄을 퍼부어 손해를 입히고 물러섰다. 독립군의 대담한 행동으로 일본군경은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註 040
* 동림면 + 신건원면 = 경원군 동원면(東原面)
○ 독립군이 강계·위원(渭原)으로 진격하여 면사무소의 공금을 군자금으로 압수(1922년 1월 28·29일)
항일무장독립군 6명이 1922년 1월 28일 강계군으로 진격하여 그곳 고산(高山)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그곳 공금을 군자금으로 압수하고, 다음날인 29일에는 다시 위원군으로 진격하여 그곳 봉산(鳳山)면사무소를 습격 하고 그곳 공금을 군자금으로 압수하였다.註 041
○ 독립군이 의주군으로 진격하여 옥상주재소를 습격(1922년 3월 5일)
항일 무장독립군 10명이 1922년 3월 5일에 의주군으로 진격하여 오후 8시에 그곳 옥상주재소에 총탄 300발을 퍼부어 일본 경찰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물러났다.註 042
○ 독립군이 강계군으로 진격하여 입관(立館)면의 영림창(營林廠)출장소를 기습 소각(1922년 6월 13일)
항일무장독립군 6명이 1922년 6월 13일 밤 강계군 입관면 덕전(德田)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있는 영림창출장소를 기습하여 이를 점령한 후 소각하였다. 밤이었으므로 경비원은 도망하였고 직원들은 부재중이어서 화를 면하였다.註 043
* 영림창(營林廠) : 1907년(광무 11) 평안도의 압록강, 함경도의 두만강 연안의 삼림을 보호, 관리, 이용하기 위해 설치한 삼림 경영기관.
○ 독립군이 갑산군으로 진격하여 함정(含井)주재소를 기습공격하여 무기를 노획(1922년 6월 14일)
항일무장독립군 3명이 1922년 6월 14일에 갑산군으로 진격하여 오후 12시에 함정주재소를 기습공격하였다. 이 공격에서 순사 1명이 사살되고 다른 1명은 중상을 입었다. 독립군은 이곳에서 총기 4정 권총 1정을 노획한 후 전선을 절단하고 철수하였다.註 044
○ 독립군이 갑산군으로 진격하여 포태산(胞胎山)주재소를 기습(1922년 7월 28일)
항일무장독립군 28명이 1922년 7월 28일 함남 갑산군 보혜(普惠)면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있는 포태산주재소를 기습공격하였는데 3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순사 2명을 사살하였다.註 045
○ 독립군이 삭주군으로 진격하여 외남(外南)주재소를 습격하고 무기를 노획(1922년 9월 7일)
무장독립군 20명이 1922년 9월 7일 평북 삭주군으로 진격하여 외남주재소를 기습공격하였다.
이들은 먼저 주재소 실내에 폭탄을 던져 순사 2명에게 부상을 입혀 꼼짝못하게 하고, 때마침 그곳에 와 있던 토목공사의 감독 장강(長岡 ; 나가오까)을 사살한 후 주재소의 총기 5정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무장독립군은 곧 주재소에 방화하여 이를 소각한 후 마을 주민들로부터 763엔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그곳을 철수하였다.註 046
○ 독립군이 평남 성천(成天)으로 진격하여 묘삼(卯三)리주재소와 면 사무소 습격(1922년 9월 11일)
무장독립군 10명이 1922년 9월 11일 평남 성천군 삼흥면으로 진격하여 그곳 유삼리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기습공격하였다. 이 기습공격에서 순사 1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註 047
○ 독립군이 평남 강계로 진격하여 고산(高山)주재소를 습격(1922년 10월 3일)
독립군 10여 명(일본경찰 기록에는 35명)이 1922년 10월 3일에 평북 강계군으로 진격하여 고산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때 일본경찰들이 대항하여 격전이 벌어졌고, 이 격전으로 민가에 화재가 일어나 촌민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립군은 격전을 끝내고 물러섰으나 일본경찰 기록을 보면 독립군 1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註 048
○ 독립군이 위원으로 진격하여 문명(文明)리에서 일본 경찰을 생포·사살(1922년 월일 미상)
무장독립군 5명이 1922년에 평북 위원군화창(和昌)면 문명리로 진격하여 그곳 송학선(宋學善 ; 19세)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동군 대덕(大德)면 하진평(下津坪)으로부터 일본 순사가 한국인 순사 1명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고 숨어 있다가 달려 들어 모두 생포하여 총살하고 소지하고 있던 5연발 총 1정과 탄환을 압수하여 귀환하였다.
그 후 송학선은 독립군을 유숙시키고 접대하였다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년형을 받았다.註 049
○ 독립군이 평북 창평(昌平)으로 진격하여 경찰 출장소 습격(1923년 1월 5일)
독립군 7명(일본 경찰 기록은 10명)이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창성군 창평으로 들어갔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곳 경찰 출장소를 습격하지 않을 수 없어 1월 5일 밤에 먼저 이곳 출장소를 습격하여 순사 1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때 이를 응원하기 위해 일본 경찰 20명이 공격해 오므로 독립군은 후퇴하였다.註 050
○ 독립군이 위원으로 진격하여 서태(西泰)주재소를 기습(1923년 1월 15일)
독립군 약 30명이 평북 위원으로 진격하여 1월 15일에 돌연히 서태주재소를 기습공격하였다. 이때 3명의 순사는 부근을 순회하고, 2명만이 남아 있었는데 독립군은 이들에게 맹사격을 가하여 이들을 혼비백산케 한 후 대안(對岸)으로 물러났다.註 051
* 대안(對岸) : 강, 호수, 바다 따위의 건너편에 있는 언덕이나 기슭
○ 독립군이 위원으로 진격하여 구읍(舊邑)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기습공격(1923년 1월 22일)
독립군 40명이 평북 위원군으로 진격하여 1월 22일 오전 4시 10분에 구읍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기습공격하였다. 이때 주재소에는 3명의 순사가 있었는데 본서의 순사 2명이 합세하여 5명이 되었다. 이들은 필사의 저항을 하였다. 독립군은 주재소로 육박하여 순사부장과 그의 처를 사살하였다. 다시 2명의 순사가 합세하여 6명이 되어 필사의 저항을 하였다. 이 격전에서 독립군의 대장 이성엽(李成燁)이 전사하고 수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주민 1명도 희생되고 민가 한 채가 소실되었다. 독립군은 후속하여 많은 일본경찰이 합세할 우려가 있어 후퇴하였다.註 052
○ 독립군(大韓光復軍總營소속)이 의주로 진격하여 옥상면 주재소 습격(1923년 2월 3일)
대한광복군총영 소속 박윤식(朴允植)이 의주 옥상면으로 진격하였다가 주구인 박모와 최모의 밀고로 순국하였다.
대한광복군총영에서는 두 주구배를 숙청 처단하기 위해 무장독립군 7명을 파견하였다. 이들 7명은 이러한 사명을 띠고 1923년 2월 3일 이곳으로 진격하여 먼저 옥상 주재소를 기습공격하였다. 순사는 야음을 틈타 도주해 버렸다. 7명은 주재소를 파괴한 후 두 주구배의 집을 습격하였으나 두 주구배 또한 피신하여 찾을 길이 없어 독립군 7명은 분을 이기지 못한 채 본영으로 귀환하였다.註 053
○ 독립군(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소속)이 벽동(碧潼)으로 진격하여 태평(太平)면 양구천(楊口川)에서 경찰과 격전(1923년 2월 6일)
대한광복군총영소속 무장 독립군 3명이 국내로 들어와 중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2월 6일에 벽동군 태평면 양구천에서 일본 경찰 10여 명과 조우하게 되었다. 무장 독립군 3명은 1시간에 걸쳐 이들과 격렬한 항전을 벌여 경찰 1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혀 이들을 공포에 떨게 한 후 강을 건너 귀영하였다. 이 격전에서는 독립군 1명이 경상을 입었을 뿐이었다.註 054
○ 독립군이 위원군으로 진격하여 일본경찰과 격전(1923년 1월 31일)
의용군 제2중대장 홍모가 부하 독립군 5명을 거느리고 위원으로 진입하였다가 1월 31일 오후 7시경에 위원군 밀산(密山)면 남파(南坡)동에서 일본경찰 20명으로 부터 포위를 당하였다. 독립군은 즉시 이들과 맞서 1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이들 5명을 넘어뜨리고 포위망을 무사히 탈출하였다. 그러나 오후 12시경에 동군 구읍면에서 경찰의 비상선을 돌파하다가 또 다시 격전이 벌어져 경찰 2명을 넘어뜨린 후 압록강을 넘어 무사히 귀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 격전에서는 독립군 1명이 전사하고 1명이 또한 부상을 입었다.註 055
○ 독립군이 의주군으로 진격하여 영산시(永山市)주재소를 습격 소각하고 무기를 노획(1923년 6월 20일)
항일 무장 독립군 10명은 2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국내로 진격하여 활약하다가 6월 20일에 의주 천마산(天馬山)에 모여 영산시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일몰을 기다려 영산시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경찰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주방으로 피신하였다. 독립군은 주방을 목표로 총탄을 퍼부었으나 기척이 없었다. 독립군이 주방으로 접근하자 그제서야 사격을 가해와 독립군 1명이 쓰러졌다. 독립군은 분을 참지 못하여 계속 싸우다가 또 1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립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2시간 동안 계속 총탄을 퍼부어 주재소는 전소되고 말았다. 전소에 앞서 독립군은 주재소 내로부터 44식 총 2정과 실탄 70발, 권총 2정과 실탄 20발, 군도 4자루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註 056
○ 독립군이 벽동군으로 진격하여 운시(雲時) 주재소·면사무소를 습격소각(1923년 8월 14일)
의용군 제2 중대부 참사 정원일(鄭元日)·이선호(李先浩) 등 30여명은 군자금을 모금하고 적의 기관을 파괴할 목적으로 각각 부하 5명씩을 거느리고 벽동군으로 진격하였다. 이리하여 8월 14일에 먼저 동군 운시주재소를 기습 공격하여 순사 3명을 사살하고 44식총 6정, 군도 6자루 수통 6개와 기타 탄환·군수품 등을 압수한 후 주재소를 소각하였다. 그리고 면사무소를 점령하여 면장의 반민족 행위를 문책하고 그를 처단한 후 면사무소를 소각해 버렸다.
그리고 민중들을 모아 광복사업의 시급함을 설유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본대로 귀환하였다.註 057
○ 독립군이 의주군으로 진격하여 청성진(清城鎭)주재소·면사무소·우편국·세관출장소를 기습 공격하여 소각(1923년 8월 8일)
무장 독립군 30여 명이 의주군으로 진격하여 8월 8일에 몇조로 나뉘어 청성진주재소·면사무소·우편국·세관출장소를 기습 공격하고 그 가운데 청성진주재소를 소각해 버렸다.
이 전투에서 순사 2명에게 사상을 입고 민간인 1명이 사망하였다. 또한 독립군측도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중상을 입게 되었으며 1명이 체포당하였다.註 058
○ 독립군이 초산으로 진격하여 연담(蓮潭)리에서 격전(1923년 6월 28일)
의용대 제2중대 심도경이 거느리는 무장 독립군 5명이 초산군으로 진격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돌아오는 중에 6월 28일 밤 초산군 서(西)면 연담리에서 일본 경찰 10여명과 조우하였다. 무장독립군은 곧 공격태세를 갖추어 1시간에 걸쳐 이들을 공격하여 경찰 3명을 사살하고 많은 부상자를 냈다. 이에 대하여 독립군은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전원 본영으로 귀환하였다.註 059
○ 독립군이 초산으로 진격하여 활약하다가 서면에서 격전(1923년 월 일 미정)
의용대 제2중대 정경탁(鄭敬淖)이 거느리는 무장독립군 8명이 일본 경찰의 비상경비선을 뚫고 초산군 방면으로 진격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서면 무학(舞鶴)동에서 일본경찰 10여 명으로부터 포위를 당하였다. 무장독립군은 곧 이들과 격전을 벌여 경찰 2명을 사살하고 3명에게 부상을 입혀 포위망을 벗어나 전진하다가 밤 12시 동면 중단(中段)촌에서 또 다시 경찰 20여명의 경비선에 걸렸다. 무장독립군은 약 1시간에 걸쳐 이들과 격전 끝에 경찰 2명을 사살하고 경비선을 돌파하여 무사히 귀환하였다.註 060
○ 독립군이 위원군으로 진격하여 용문(龍門)동에서 격전(1923년 6월 1일)
의용군 유격대장 홍석호(洪碩浩)가 거느리는 무장독립군 3명이 위원 방면으로 진출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6월1일 하오 6시에 서태면 용문동 삼거(三巨)리에서 일본경찰 3명과 조우하였다. 독립군은 즉시 이들과 1시간에 걸친 항전을 전개하여 경찰을 물리치고 전원 무사히 본대로 귀환하였다.註 061
○ 독립군이 위원으로 진출하여 남파동에서 격전(1923년 6월 29일)
의용군 유격대장 홍석호가 부하 1명을 거느리고 위원 지방으로 진출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6월 29일 밀산면 남파동 부근에서 일본 경찰 5명과 조우하여 격전을 벌인 끝에 경찰 2명을 사살하고 이들을 물리친 후 부하와 더불어 무사히 본대로 귀환하였다.註 062
○ 독립군이 강계 지방으로 진격하여 하청(河清)주재소를 점령하여 소각(1923년 월 일 미상)
독립군 전용규는 부하 약간 명을 거느리고 강계 방면으로 진격하여 어뢰(漁雷)동 하청주재소를 기습점령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고 이를 점령한 후 소각해 버렸다. 또 같은 곳에 있는 주구 불량배의 가옥도 소각하였다.註 063
* 어뢰(漁雷)동 : 현재 어뢰면
○ 독립군의 비호용장(飛虎勇將) 김종호(金宗浩)의 국내로의 진격 활약(1923년, 이른봄)
남만 의용군 제1중대 제2소대 제2분대장 김종호는 부하 수 명을 거느리고 일본 국경경비대의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강계·위원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민족 독립의 시급함을 역설하고 민중들을 고무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해 갔다. 일본 경찰들은 이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김종호의 위용을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는 위원군 위송(渭松)면 석포(石浦)리에 이르러 주구인 송의봉(宋義鳳)을 처단하고 또 강계군 성간(城干)면 별하(別下)동의 주구 불량배 장명후(張明後)의 집를 소각한 후 귀로에 올랐다. 이때 같은 소대 제1분대장 한용구(韓龍口)의 부하 박제환(朴濟煥) 일행과 더불어 100여 리의 길을 행군해 갈 때 연도의 민중들이 열광적으로 이들을 환영 하는 바람에 일본순사들이 감히 이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일행이 강계의 서문 밖 회룡(回龍)동 부근에서 일본경찰을 포위 공격하자 일본경찰들은 김종호의 위용을 두려워 하여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귀로에 경찰주재소 뜰에 있던 한 척의 배를 재빨리 탈취하여 잡아타고, 적의 빗발치는 탄환을 무릅쓰고, 무사히 강을 건너 귀환하였다.
* 회룡(回龍)동 : 현재 폐지
당시 국경경비경찰들 사이에는 그 용감성에 놀라 “김종호는 비호같은 장수이므로 접근해서는 안되니 삼가 피해야 한다”고 수근거렸다고 한다. 그의 과감성이 일본군경들에게까지 얼마나 평판이 높았던가를 잘 알 수 있다.註 064
○ 독립군이 평북 희천(熙川)으로 진격하여 명문(明文)주재소를 점령 소각(1923년 9월 21일)
무장독립군 30여 명은 9월 21일 평북 희천군 북면 명문(明文)동으로 진격하여 그곳 주재소를 기습할 계획을 세운 후 야음을 이용하여 먼저 전선을 단절하고, 주재소로 기습공격해 들어 갔다. 보초순사를 넘어뜨리자 순사부장 이하 4 명의 순사는 필사의 사격으로 대항하였다. 이러한 대항에도 아랑곳 없이 무장독립군이 물밀듯이 주재소로 진격해 들어가니 겁을 먹은 순사들은 도주해 버렸다.
주재소를 점령한 독립군은 총기 2정 순사도 4자루를 노획한 후 주재소를 소각하고, 또 가까이 있던 면사무소도 소각해 버렸다. 이 불이 민가로 연소되어 도합 21호 28동의 가옥이 불타 주민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독립군측은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었다.
이 격전 후 무장독립군이 다시 강계 화경(化京)면으로 내습해 온다는 소문이 떠돌아 겁먹은 일본경찰은 보다 강력한 경찰연합수색대를 편성하여 우편 송달까지 중지시키고 연말까지 광적인 수색전을 폈다.註 065
○ 무장독립군이 1923년 11월 중 전개한 국내 진격작전 및 그 전황
남만주 의용군 제1중대 참사 이명옥(李明玉)과 대원 송선호(宋善浩)·이종식(李宗植)·박성유(朴星瑬)·허병학(許炳學)·이기섭(李基涉)·김상범(金尚範) 등 7용사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강계 방면으로 진격 잠입해 들어갔다. 이때 이곳에 이미 들어와 주재하고 있던 대한의용군의 전 참모였던 이두희(李斗熙)는 신비한 계책을 강구해 가고 있었다. 그는 근본적인 방비시설을 완비하고, 또한 모든 일을 공평순리(公平順理)로 처리하여 크게 민중들의 신망을 얻어 이곳 민중들의 향의심(向義心)이 대단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곳 독립군은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었다.
* 향의심(向義心) : 정의를 향한 마음? 의로운 마음? 의협심?
11월 12일 밤부터 많은 눈이 내려 일본경찰수색대는 눈 위의 발자욱을 더듬어 14일 하오 1시에 산곡 독립군부대의 주둔처를 포위 공격해 왔다. 독립군부대는 미리 구축해 놓은 방어물에 기대어 이들에게 일제히 총탄을 퍼부었다. 숲이 우거진 심곡에서의 전투는 종일 계속되었다. 일본경찰들은 독 안에 든 쥐모양이 되어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고, 동상에 걸린데다가 총탄마저 떨어져 마침내는 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군 사령부에서는 이기술(李己述)이 거느리는 상등병 이봉화(李鳳和)·박원채(朴元彩)·이성관(李成官), 3등병 이용익(李用益)·예응호(芮應鎬) 등 1대에게 중대사명을 주어 국내로 진격케 하였다. 이들은 일본 경찰들의 경비선을 돌파하고, 자성군내로 진격하여 그곳 삼림 중에서 야영을 하면서 임무를 수행해 가고 있었다. 이때 주구의 밀고로 일본경찰이 독립군 부대를 포위하여 공격해 오게 되었다. 독립군부대는 곧 산협고지(山峡高地)를 점령하여 이들에게 총탄을 퍼부어 2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겁을 먹은 경찰들은 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중 매복해 있던 독립군 이노장(李老將) 1대는 퇴주하는 이들 경찰을 요격하여 다시 2명을 사살하고, 계속 추격하여 압록강 강변에 이르니 전면에는 많은 일본경찰이 밀집해 있었다. 형세가 위급하여 독립군은 농가로 뛰어들어 농우(農牛) 한 마리를 끌어 내고, 그 허리에 밧줄을 매어, 헤엄치는 농우의 밧줄에 끌려 무사히 강을 건너 본대로 귀환하였다.
* 산협고지(山峡高地) : 산골짜기의 높은 지대?
그 후 이들은 또다시 국내로 진격하여 하룻밤 동안 수백 리를 달려 주구배를 숙청하고 군자금을 모금한 후 임강에 주둔해 있던 독립군 대장 차천리(車千里) 일행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다시 독립군 1등병 박제환(朴濟煥) 이하 4용사를 공북(公北)·간북(干北)·성간(城干) 방면으로 진격케 하여 영림창(營林廠)과 안전연광(安田鉛鑛)을 점령한 후 그곳 무기·화약을 압수하게 하고, 차대장 외 5명은 후창(厚昌)방면으로, 전(田)대장이 거느리는 1대는 자성 방면으로 진격하여 과감한 활동을 하였다.
차대장 일행은 완평(院坪)동에서 적의 우편물을 압수하여 한 객점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이곳에 와 있던 일본 여인 하나가 전대장 일행을 보고 두려워 떨면서 금화 50엔을 내놓으면서 “이 돈을 대한독립운동의 군자금으로 드리오니 받아주시요”라고 하였다. 전대장은 “너희들은 속히 너희들 나라로 돌아가라! 그리하면 너희의 루명(縷命)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속히 돌아가라! 신성한 우리의 독립사업에 어찌하여 너희들의 불길한 재물을 받을소냐!”하고 엄책하여 쫓아 버렸다.
* 누명/루명(縷命) : 한 가닥 실낱같이 가냘프게 이어지는 목숨.
이들 독립군의 1대는 그 후 다시 칠평(七坪)주재소를 기습공격하여 순사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또 곳곳에서 주구배를 숙청하였다. 그리고 많은 애국청년들을 독립군으로 훈련하기 위해 모집 인솔하여 독립군 전대가 무사히 본영으로 귀환하였다.註 066
○ 독립군이 벽동으로 진격하여 태평동에서 항전 승리(1924년 1월 9일)
독립군 23명이 국내로 진격하여 1924년 1월 9일(『독립신문』에는 1월 13일)에 평북 벽동군 태평동에서 압록강 상·하류의 강상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일본경비대(경찰) 18명(일본경찰기록에는 8명)과 격전을 벌여 1명을 사살하였는데 이때 독립군 40명이 소포 2문(門)을 가지고 이 전투를 응원하여 격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계속되었다. 이 격전에서 독립군은 일본 경찰 4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히니 마침내 적은 패배 하여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군은 대승을 거두었다.註 067
○ 독립군이 강계로 진격하여 문옥(文玉)면에서 격전 승리(1924년 일자 미상)
남만 의용군 제1중대 참사 이화주(李化周)가 거느리는 7명의 무장 독립군은 중대한 사명을 띠고 강계 지방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이곳 일본경찰은 국경경비망을 강화하기 위해 곳곳에 소위 자위단을 만들어 그들을 앞잡이로 독립군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강계 이판(吏判)리의 주구 이길상(李吉祥)의 밀고로 마침내 독립군 이화주 1대는 일본경찰 40여 명의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이화주 1대는 교묘한 전법으로 포위망의 일각을 돌파하여 깊은 눈 사이를 1주야 행군하여 강계 문옥면 총면(總面)동에 이르렀다. 요로를 수직(守直)하고 있던 경찰 척후는 독립군 선발대 2명 안정길(安貞吉)·양봉제(梁鳳濟)를 발견하자 “누구냐!”고 물었다. 대담한 안정길은 “나는 순사로다”라고 대답하고 태연한 태도로 2·3미터로 접근하여 “나는 독립군이다!”라고 고함을 지르고, 숨겨 간 권총을 발사하였다. 척후경찰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이어 뒤따라온 독립군 후군분대도 총탄을 쏘아 또 한 명의 경찰이 쓰러졌다. 독립군은 비상선을 돌파하여 아무 손실 없이 본영으로 귀환하였다.註 068
○ 독립군의 귀감이 된 3용사의 활약(1924년 2월 23일)
남만 의용군 제1중대의 분대장 김종호는 부하 1등병 이종방(李宗芳) 이하 6명을 거느리고, 1924년 2월 하순에 강계 지방으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중대한 사명을 띠고 국내로 들어 온 것이었다. 이들 일행이 강계 고산면 곰추 동구에 이르렀을 때 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몰려왔다. 김종호는 이들과 맞서 격전을 벌여 단번에 그들의 막사를 소각하였다. 격전이 끝난 후 김종호는 이곳 주민들에게 구국독립사상을 설유하고 다시 전진하였다.
이 때 일본 경찰 10여 명이 다시 나타나, 용감하게 이들을 물리친 김종호는 부하들에게 “위험한 지대일수록 인원이 적어야 유리한 싸움을 할 수 있다”는 게릴라전의 요체(要諦)를 설명한 후 고창옥(高昌沃) 이하 4명을 본영으로 돌려 보내고, 1등병 이종방·주상일(朱尙日) 2명만을 남겼다.
김종호는 2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2월 23일 오후 8시에 압록강을 건너 고산진으로 들어가 춘산(春山)리에서 일숙을 하기로 하고, 이날 밤 애국 민중들을 모아 놓고, 구국독립의 시급함을 호소하는 열변을 토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때 주구배의 밀고로 일본경찰들이 습격해 들어왔다. 김종호 등 3명은 필사적으로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불리하여 물러설 즈음에 3명은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적에게 붙잡혀 수모를 당해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그곳을 탈출하여 본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상처가 심하여 얼마가지 않아 3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의『독립신문』에는 이들을 항일 독립군의 귀감으로 그 용기를 대서특필하였고, 또 이들 3용사의 생애를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들의 약력을 기록해 놓고 있다.註 069
○ 항일 독립군(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소속)이 압록강상을 항행하는 사이토오 총독을 저격(1924년 5월 19일)
사이토오총독 일행은 한·만국경을 시찰하기 위해 프로펠라기선을 타고 압록강을 항행하게 되었다.
* 프로펠라기선 : 프로펠러를 옆에 장착. 외륜선 등
오전 9시 5분 기선이 평북 고산진 하류 위원군 마시(馬嘶)지방을 통과할 때 만주쪽 대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한통의부 제1중대장 백광운이 거느리는 10여 명의 독립군 정병들이 일제히 사이토오총독이 탄 기선에 총탄을 퍼부었다. 총독을 호위하던 호위병들이 응사하면서 기선은 속력을 다하여 도주 하항해 버렸다.
이 총격전에서 피차간 손해는 없었으나 지방민 2명이 유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 항전은 당시의 독립군의 굳센 항일의식과 그들의 과감성을 그대로 들어낸 의거였다.註 070
○ 독립군(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소속)이 초산·벽동으로 진격하여 추목(楸木)·여해(如海)동 경찰출장소를 습격 소각(1925년 3월 19일)
대한통의부 군무위원장 오동진에 소속된 무장독립군 78명이 초산·벽동 지방으로 진격하여 1925년 3월 19일 새벽에 2대로 나누어 1대는 벽동 여해동 경찰출장소를 기습공격하여 경찰 3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그곳 무기를 노획한 후 방화하여 소각해 버렸다. 다른 1대는 초산 추목동 경찰출장소를 기습공격하여 경찰 1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힌 후 무기를 노획 한 후 방화 소각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인접기관의 경찰 8명이 달려와 이들과 교전을 전개한 후 본영으로 귀환하였다. 이 교전 중에 일본경찰 가족 1명도 사살되었다.註 071
○ 독립군이 초산 방면으로 진격하여 판면(板面)주재소·재목창(材木廠) 면사무소를 점령 소각(1925년 5월 28일)
무장독립군 약 30명이 1925년 5월 28일 초산 판면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은 오후 9시에 그대로 나뉘어 1대는 판면주재소를 기습공격하였다. 겁을 먹은 순사들이 모두 도망해 버렸으므로 독립군은 이를 점령하여 방화 소각하고, 이어 횡강(橫江)재목창을 점령하였다. 다른 1대는 면사무소를 점령하여 이를 소각하였다. 이어 일본인 가옥을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또한 그곳 주구배 2명도 아울러 숙청하였다.註 072
○ 독립군이 초산 방면으로 진격하여 주구배와 그 가족을 민중 앞에서 처단(1925년 6월 5일)
무장독립군 6명이 6월 5일 평북 초산군 고(古)면 대수(大水)동으로 진격하여 민중들을 모아 놓고 애국독립군을 밀고한 반민족 주구배인 이학율(李學律)과 그의 처·장남 3인을 끌어다가 민중 앞에 세워 놓고, 그의 반민족적인 죄를 알리고 3인을 사살 처형하였다.註 073
○ 독립군이 철산(鐵山)으로 진격하여 차련관(車輦館)주재소를 기습 공격(1925년 7월 4일)
무장독립군 10명이 무기를 감추고 보통 평민의 복장 차림으로 장꾼을 가장하여 7월 14일에 열리는 철산군 차련관의 장날을 이용하여 그 곳으로 잠입하였다. 그들은 곧 차련관주재소로 들어가 집무 중인 순사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순식간에 감추어 간 권총을 꺼내어 집무중인 경부보와 순사 3인에게 발사하였다. 총을 잡을 여가도 없이 그들은 머리와 복부에 각각 5·6발씩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버렸다. 또 그곳에 근무하던 급사와 부근에서 있던 민간인 한 사람도 중상을 입었다. 불과 10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의 독립군들의 숙달된 게릴라전술의 일단과 그들의 과감한 행동을 잘 나타내주는 거사라 하겠다.註 074
* 장꾼 : 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 또는 그 무리
○ 무장독립군이 삭주 방면으로 진격하여 양산(兩山)주재소를 기습 공격(1925년 8월 29일)
무장독립군 5명은 8월 29일 삭주군 양산면으로 진격하여 순사 1인만이 근무하고 있던 양산주재소를 기습공격하여 1인을 사살하고, 또 같은 주재소 구내에 거주하고 있던 2명의 순사 가족을 사살하였다.
이곳 주재소의 정원은 7명이었으나 6명이 수색에 동원되어 부재 중이므로 독립군은 이틈을 타 공격한 것이었다. 이어 급보를 받고 7명의 경관이 달려왔다. 독립군은 이들과 격전을 벌여 2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물러섰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는 독립군 1명이 또한 전사하였다.註 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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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노령에서 항일무장독립군단이 형성되면서부터 1925년에 이르기까지의 그들의 국내로의 진격작전 가운데 중요한 것을 살펴 본 것이다. 즉 수많은 국내로의 진격작전과 그 활약 가운데 특히 격렬하였던 것, 두드러진 성과를 거둔 52건의 항전을 연대별로 살펴 본 것이다.
이상의 항전내용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의 항일무장 독립군단의 게릴라 대원들은 삼엄한 국경 삼도(평북·함남·함북)의 경비망을 뚫고 국내로 진격하여 국경 3도 뿐만 아니라 국내 깊숙히 황해도·서울까지 진입하여 활약하였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또 항일무장독립군의 이러한 국내로의 진격과 그 항전이 당시 일본군 경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감을 주었는가 하는 것은 1922년 10월 21일 자『독립신문』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 기사를 보아도 그대로 잘 알 수 있다.
위원(평북) 밀산면 월평동(越平洞)에 임한 적경(敵警) 우시마/우도(宇島)라는 자 야순(夜巡)을 돌다가 마주 순행하여 오는 동료순사를 독립군으로 오인하고 패도(佩刀)로써 난자하여 즉사케 하였다 하는데 적은 지금 신경과민이 되어 바람소리만 들어도 독립군으로 알고 발광하게 되었다한다.
그야말로 일본군경들이 용감한 독립군의 항전에 전전긍긍하였던 것을 그대로 잘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용감성을 발휘케 한 독립군의 생을 초월한 애국애족의 고귀한 그들의 정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
註 024 신용하(愼鏞廈),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한국학보(韓國學報)』제(第)42집(輯)(1986) ; 강덕상(姜德相),『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6 ; 김정명(金正明),『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Ⅱ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1919년 10월 24일자) ; 채근식(蔡根植), 『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대한민국공보처/大韓民國公報處, 1948), p. 71 ;『독립신문』, 1919년 11월 8일자.
註 025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1930), pp. 21~22 ; 채근식(蔡根植), 앞 책, P.72.
註 026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21 ; 채근식(蔡根植), 앞 책, pp.55~56.
註 027 『독립신문』, 1920년 6월 24일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p. 28~29.
『독립신문』에는 이곳 항전의 날짜를 6월 1일이라 하였으나 경찰 기록에는 6월 4일로 되어 있다. 경찰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註 028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34.
註 029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35.
註 030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39.
註 031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42.
註 032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46.
註 033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54 ;『독립신문』, 1923년 9월 1일.
『독립신문』에는 독립군 30여 명으로 되어 있고 경찰 기록에는 40명으로 되어 있다. 또 날짜는『독립신문』에는 8월 6일로 되어 있고 경찰 기록에는 8월 8일로 되어 있다. 인원수는『독립신문』을 따랐고, 날짜는 경찰기록을 따랐다.
註 034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57.
註 035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58 ;『독립신문』, 1921년 3월 19일.
『독립신문』에는 이 곳에서의 항전의 날짜를 3월 9일이라고 기록하였으나, 경찰 기록에는 3월 1일로 되어 있어 경찰 기록을 따랐다.
註 036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67 ; 『독립신문』, 1921년 12월 19일.
註 037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71 ;『독립신문』, 1921년 11월 11일.
註 038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73 ; 『독립신문』, 1921년 10월 14일.
註 039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78 ;『독립신문』, 1921년 12월 6일.
註 040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83.
註 041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85.
註 042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88.
註 043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97 ;『독립신문』, 1922년 6월 7일.
註 044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97.
註 045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101.
註 046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105.
註 047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106.
註 048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108 ;『독립신문』, 1922년 10월 21일.
註 049 『독립신문』, 1922년 10월 21일.
註 050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p. 117~118 ;『독립신문』, 1923년 1월 24일.
註 051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118 ;『독립신문』, 1923년 1월 24일.
註 052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119.
註 053 『독립신문』, 1923년 3월 19일.
註 054 주 53)과 같음.
註 055 『독립신문』, 1923년 4월 4일.
註 056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127 ;『독립신문』, 1923년 7월 21일.
『독립신문』에는 이곳 항전의 날짜를 6월 19일이라 기록해 놓고 있으나 경찰 기록에는 6월 20일로 되어 있어 경찰 기록을 따랐다.
註 057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130 ;『독립신문』, 1923년 8월 19일.
註 058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pp. 129~130.
註 059 『독립신문』, 1923년 8월 9일.
註 060 주 59)와 같음.
註 061 주 59)와 같음.
註 062 주 59)와 같음.
註 063 주 59)와 같음.
註 064 주 59)와 같음.
註 065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p. 133~134 ;『독립신문』, 1923년 9월 4일.
『독립신문』에는 독립군의 수를 30여 명이라 하였고, 경찰 기록에는 약 20명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는『독립신문』의 기록을 따랐다.
註 066 『독립신문』, 1923년 11월 19일.
註 067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137 ;『독립신문』, 1924년 2월 2일.
註 068 『독립신문』, 1924년 5월 31일.
註 069 『독립신문』, 1924년 5월 31일자에 기록되어 있는 3용사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 부사(副士) 김종호씨(金宗浩氏)는 향년(享年) 35세(歲)요 원적(原籍)은 평북위원군(平北渭原郡)이며 현재(現在)난(는) 집정현구룡면대반분(輯定縣九龍面大盤忿)인데 씨(氏)가 민국(民國) 3년(年)에 비로소 제(第)1중대(中隊)에 복무(服務)하게 된 이래(以來)로 시종(始終) 한결같이 근무(勤務)하여 왔다. 씨(氏)는 원래(原來) 성질(性質)이 종용침착(從容沈着)하고도 과단용감(果斷勇敢)하야 과반(過般) 고산진함락시(高山鎭陷落時)와 위원군강구(渭原郡江口) 적경소(敵警所)의 압수반(押收般)을 탈취(奪取)할 시(時)에 선두(先頭)에 입(立)하야 활동(活動)함도 씨(氏)이며 강계성외(江界城外) 무인타경(無人他境)을 홀대홀래(忽待忽來)하야 일반주민(一般住民)으로 하여금 독립군(獨立軍)이 신출귀몰(神出鬼沒)한다는 소문(所聞)을 내인 것도 씨(氏)의 활동(活動)이라 군계(軍界) 동지(同志)는 씨(氏)의 죽음을 매우 애석(愛惜)하야 마지아니한다고 한다.
* 종용침착(從容沈着) : 차분하고 침착
* 군계(軍界) : 군인사회
· 일등병(一等兵) 이종방씨(李宗芳氏)는 강계군(江界郡) 고산면(高山面) 이석규씨(李碩奎氏)의 장남(長男)이며 향년(享年) 25세(歲)의 청춘(靑春)의 몸으로 순국(殉國)하였다. 씨(氏)는 일즉이 한학(漢學)의 수양(修養)이 잇스며 양잠학(養蠶學)의 전공(專攻)이 잇다 한다. 민국(民國) 5년(年)에 참사(參士) 김정욱씨(金貞旭氏)의 인도(引導)로 제(第)1중대(中隊)에 편입(編入)되어 3개월간(個月間) 학술과(學術課)를 수업(修業)할 시(時)도 우등(優等)의 성적(成績)을 득(得)하엿다. 씨(氏)는 무용(武勇)과 강담(强膽)을 겸전(兼全)한 동작(動作)으로 내지출입(內地出入)을 민활히 하엿스며 상식(常識)이 출중(出衆)하야 멀지아니한 장래(將來)에 일반군계(一般軍界)에 모범(模範)이 되리만한 포부(抱負)가 있는 청년(靑年)의 몸으로 순국(殉國)됨을 일반동지(一般同志)들은 아까워 한다더라.
* 강담(强膽) : 용감, 대담
* 겸전(兼全) : 여러 가지를 완전하게 갖춤
· 주상일씨(朱尙日氏)는 거금(距今) 20년(年) 강계군공서면(江界郡公西面) 농가(農家)에 출생(出生)된 이래(以來)로 자택(自宅)에서 농사(農事)에 득사(得事)하다가 부사(副士) 김종호씨(金宗浩氏)의 인도(引導)로 5년(年) 10월(月)에 제(第)Ⅰ중대(中隊)에 편입(編入)되어 군무(軍務)에 잘 복종(服從)하엇스며 군자금모집(軍資金募集)에 적공(積功)이 실로(實)로 불소(不小)하다.
* 거금(距今) : 지금을 기준으로 지나간 어느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註 070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143;『독립신문』, 1924년 5월 31일.
註 071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p. 167~168 ;『독립신문』, 1925년 4월 13일.
註 072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p. 175~176.
註 073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 176.
註 074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p. 178~179.
註 075 『조선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pp. 18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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