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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3>제10대 산상왕(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2>제10대 산상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17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3>제10대 산상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174

산상왕편을 조금 빨리 올릴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분명히 마음에 남는 찝찝함이 있었을 것인데.

원래 그런 것에 잘 매여 사는 성격이라서.

 

소개를 못한 것이 있는데 이때 고구려에 항호(降胡)라 불리는 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백고 즉 신대왕 때부터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고,

또한 망한 호(胡)의 5백여 가를 받아들였다[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家]."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는 데에서,

여기서 호(胡)라는 건 옛날 왕망이 치려고 했던 그 호(胡) 즉 흉노인지는 모르지만(선비일 수도)

조선조의 항왜(降倭)처럼 항복한 자들을 모아서 고구려에서 또 따로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발기가 한의 요동태수에게 가서 원병을 청하는 시점에 즈음해서 이들도 반란을 일으켜

이이모(연우왕)에게 반역했다[降胡亦叛伊夷模]고 《삼국지》에는 전하고 있다. 어쩌면 발기에게 포섭되어,

혹은 발기에게 자발적으로 응원을 보내어 연우왕에게 반기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二年, 春二月, 築丸都城. 夏四月, 赦國內二罪已下.]

2년(198) 봄 2월에 환도성(丸都城)을 쌓았다. 여름 4월에 나라 안의 두 가지 사형죄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삼국지》에는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있는 것이 이것이다[伊夷模更作新國, 今日所在是也]"라는 기록이 보인다. 언뜻 보면 새로운 나라라고 해서 연우왕이 새로 고구려를 세웠다는 식으로 비치기 쉽지만 그런 게 아니고, 이 《삼국지》가 지어질 당시의 새로운 나라 즉 새로운 '수도'를 연우왕이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나라[國]'라는 말이 '수도[都]'와 동일한 개념으로 해석되는 일은 고대에는 흔한 일이었다. 실제로 환도성을 쌓은 연우왕을 보고 나라를 새로 일신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일신하는 것은 나라를 새로 하나 세우는 것과 같으니.

 

성이라는 것은 무언가 이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 7세기 왜(일본)가 백제 유민들로 하여금 큐슈 연안에 한식산성(韓式山城), 즉 조선식 산성을 쌓게 한 것도, 바다를 건너 신라와 당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고, 고구려나 고려가 자국의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은 것이나, 고려말에 개경에 내성을 쌓은 것도 그러한 군사적인 목적이 있는 것인데, 즉위하고서 형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성곽 축조라? 그런 성을 쌓는다는 것은 뭔가 위협이 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암만해도 찬탈이라는 느낌은 덜 들게 해야겠지. 민심도 수습할겸, 왕은 특별히 선심써서 즉위 2년에 나라 안의 중죄인들을 뺀 경범죄 죄수들을 사면한다.

 

고구려 초기의 사면령은 대체로 태자 책봉 및 태왕의 즉위를 기념해서 내린 경우, 자연재해 및 상서로운 징조로 인해서 내린 경우, 추모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내린 경우로 모두 다섯 가지로 구분이 된다고 한다. 연우왕은 자신의 즉위를 기념해서 사면을 내린 경우에 해당하는데(민중왕과 신대왕도 이러한 케이스), 앞서의 두 왕과 공통점은 국인의 '추대'를 통해서 즉위했다는 점, 다른 점은 여기서 처음으로 사면의 '범위'가 제정된다는 것이다. 민중왕이나 신대왕과는 달리, 연우왕은 '두 가지 사형죄'를 범한 죄수들에게는 면죄부를 주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서는 고구려에서 태왕의 즉위과정과 사면령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고.(또한 국인의 추대를 받지 않고 즉위한 왕들의 기록에서는 사면령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환도성은 왕성 국내성을 보위하는 전시용 군사기지였다.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법사의 제자도 구법을 위해 이곳에 들른 적이 있다고 《속고승전》에 전하고 있다. 이때 쌓은 환도성에 대해서 《삼국사》에서 김부식은 안시성이 곧 환도성이라고 말했었는데, 안정복에 의해 그것은 부정되었다.

 

《고구려기》의 주(注)에서 《괄지지》를 인용하여,
“환도(丸都)와 국내성은 서로 접하였다.”

하고, 《당서》 지리지에도,
“압록강 어귀에서 배를 타고 1백여 리를 간 다음 작은 배를 타고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구(泊汋口)<곧 옛날의 안평현(安平縣)이다.>에 이르면 발해 땅 경계이고, 또 5백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에 이른다.”

하였으니, 그 땅을 대략 알 수 있다. 김부식이 안시(安市)를 환도라 한 것은 잘못이다.
위(魏) 정시(正始) 7년(244)에 무구검(毌丘儉)이 현도에서 군사를 출동하여 비류수를 건너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냈다 한다. 비류는 지금의 파저강(지금의 동가강)인 듯하니, 그것이 국내성과 서로 접했음을 믿겠으며, 지금의 강계(江界)ㆍ이산(理山) 등 강북의 땅에 있었던 것이다. 《요사》지리지에,
“녹주(淥州)는 본래 고구려의 옛 수도[故國]인데, 발해가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라 불렀으며, 신주(神州)ㆍ환주(桓州)ㆍ풍주(豊州)ㆍ정주(正州)를 관할 감독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환주가 곧 환도이기 때문에 고국이라 한 것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영변부(寧邊府)의 검산(劒山)이 곧 옛 환도이다.”

하였는데, 대개 방언에 칼을 환도(環刀)라 칭하므로 또한 억측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동사강목》 부록 하권, 지리고 中 '환도고'

 

그러고 보니, 나도 위나암성과 환도성이 같은 곳인가 하고 가물가물했었다. 환도성은 분명 국내성 뒤에 있는 위나암성일텐데, 전시용 산성을 이때에 개축한 걸까? 아니면 위나암성과 환도성은 서로 다른 성일까? 평시에 쓸수 있는 국내성이 있는데도 왜 환도성을 또 하나 더 쌓은 걸까? 
 

[三年, 秋九月, 王烟于質陽.]

3년(199) 가을 9월에 왕께서 질양에서 사냥하셨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질양의 땅은 원래 명림답부에게 하사된 명림씨 일족의 땅이며, 연나부의 관할지. 왕은 그곳에서 사냥한다. 어쩌면 명림씨 일족을 비롯한 연나부를 무마하기 위한 왕의 정치적 이벤트는 아니었을까 싶다.

 

[七年, 春三月, 王以無子, 禱於山川. 是月十五夜, 夢天謂曰 “吾令汝少后生男, 勿憂.” 王覺語臣曰 “夢天語我, 諄諄如此. 而無少后奈何?” 巴素對曰 “天命不可測. 王其待之.” 秋八月, 國相乙巴素卒, 國人哭之慟. 王以高優婁爲國相.]

7년(203) 봄 3월에 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산천에 기도하였다. 이 달 15일 밤에 꿈에서 하늘이 말하였다.

“내가 너의 소후(小后)로 아들을 낳게 하리니 염려말라.”

왕은 깨어나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꿈에 하늘이 내게 간곡히 말한 것이 이와 같다. 하지만 소후가 없으니 어찌할까?”

(을)파소가 대답하였다.

“천명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왕께서는 기다리소서.”

가을 8월에 국상 을파소가 죽어 국인이 통곡하였다. 왕께서 고우루(高優婁)를 국상으로 삼으셨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우리나라 무속의 연원을 전하는 책 가운데 《무당내력》이라고, 조선조 말년에 저술된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실린 '제석거리' 즉 삼불제석에게 드리는 치성에 대한 설명에서도 연우왕의 이야기가 언급된다. 어린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위험한 곳에 가지 않도록 보호한다는 신이 삼신(三神)인데, 연우왕이 만난 신이 바로 이 삼신이었다는 것이다. 훗날 우리 나라에서 아들 낳기를 발원하면서 삼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습속이 되었는데, 《무당내력》에서는 이 삼신이 삼불제석, 즉 단군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연우왕이 하늘로부터 아들 점지의 '신탁'을 받았다는 이 기록은 '3월 15일'이라는 날짜까지 표기되어있다. 열국시대의 기록은 대부분 사건 발생년도와 월수만 적혀 있고 날짜까지 정확히 기록된 것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그렇게 자세하게 적는 게 더 특이할 정도다. 문헌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날짜나 정확한 정황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았던 걸까. 《삼국사》서 날짜를 몇월 '며칠'이란 것까지 자세하게 표기하는 것은 남북국시대 신라 때부터 부쩍 늘어나고 있으니, 어쩌면 이게 부식이 영감의 농간(?)이 아닐까 싶은 의심도 했다.

 

연우왕에게는 후궁이 없었다. 그렇다고 후궁을 맞아들이자니 아무래도 왕비의 눈치가 보였다. 자기가 이 옥좌에 오르는데 왕비(옛 형수)의 힘이 얼마나 컸던가? 애정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녀가 자신에게 한 것만 생각해도 눈치가 보여 후궁을 들일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왕에게 하늘의 뜻을 말없이 기다려볼 것을 진언한 을파소도 얼마 안가 죽고, 말없이 5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十二年, 冬十一月, 郊豕逸. 掌者追之, 至酒桶村, 躑躅不能捉. 有一女子, 年二十許, 色美而艶, 笑而前執之. 然後追者得之.]

12년(208) 겨울 11월에 교제(郊祭)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담당자[掌者]가 쫓아가 주통촌(酒桶村)에 이르렀으나 머뭇거리다가 잡지 못하였다. 스무 살쯤 되는 아름답고 요염한 여자 한 명이 웃으며 앞으로 나아가 잡았다. 그 뒤에야 쫓던 사람이 잡을 수 있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주통촌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그 마을은 술통을 만드는 장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때에 향소부곡처럼, 왕궁이나 귀척 집안에서 쓸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을 한곳에 모여 살게 한 특수 행정구역. 겨울의 제사 때에 제물로 쓸 돼지를 잡으려다가 이 마을에까지 이르렀는데, 담당자가 잡지 못한 돼지를, 이 마을 사람(그것도 여자)이 잡아주었다고, 《삼국사》는 기록하고 있다.(왜 이 나라 역사에는 돼지가 이렇게 많이 나오지?)

 

[王聞而異之. 欲見其女, 微行夜至女家, 使侍人說之. 其家知王來不敢拒. 王入室, 召其女, 欲御之, 女告曰 “大王之命不敢避, 若幸而有子, 願不見遺.” 王諾之. 至丙夜, 王起還宮.]

왕께서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그 여자를 보시려고 밤에 몰래 여자 집으로 가셔서, 시종을 시켜 말하게 하셨다. 그 집에서는 왕께서 오신 것을 알고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왕께서 방으로 들어가 여자를 불러 동침하려 하시니, 여자가 고하였다.

“태왕의 명을 감히 피할 수 없으나, 만약 행하여 아들을 낳게 되면 버리지 말아주소서.”

왕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다. 자정[丙夜]에 왕께서 기침하셔서 궁으로 돌아오셨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12년(208) 11월

 

여자가 돼지를 잡아줬다는 말을 별로 이상하게 새겨들을 것은 없지만, 왕은 그걸 이상하게 새겨들었다. 아마 이것도 하늘이 마련한 각본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이렇게 왕은 그 여자와 만나게 되었고, 하룻밤을 같이한다. 어쩌면 이 여자가, 하늘이 처음 말했던 그 후궁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것은 난항에 부딛쳤다. 왕비가 질투를 한 것이다.

 

[十三年, 春三月, 王后知王幸酒桶村女, 妬之. 陰遣兵士殺之, 其女聞知, 衣男服逃走. 追及欲害之. 其女問曰 “爾等今來殺我, 王命乎? 王后命乎? 今妾腹有子. 實王之遺體也. 殺妾身可也. 亦殺王子乎?” 兵士不敢害, 來以女所言告之. 王后怒, 必欲殺之而未果.]

13년(209) 봄 3월에 왕후는 왕이 주통촌 여자에게 행차한 것을 질투하였다. 몰래 병사를 보내 죽이려 하였다. 그 여자가 듣고 알게 되어 남장한 채 도망쳤다. 쫓아가 해치려 하였다. 그 여자가 물었다.

“너희가 지금 와서 날 죽이려는 건 왕명이냐? 아니면 왕후의 명이냐? 지금 내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 진실로 왕께서 남긴 몸이다. 내 몸을 죽이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왕자까지 죽일 수 있겠느냐?”

병사들은 감히 해치지 못하고 와서 여자가 말한 대로 고하였다. 왕후는 노하여 기필코 죽이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예전에도 말했지만, 조선시대와는 달리, 고구려라는 나라는 유교의 윤리에 그렇게 제약을 받지 않는 사회였다. 왕비는 마음대로 질투를 하며 남편(왕)의 첩을 죽이려고 덤볐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하마터면 죽임당할지도 모를 판국에, 조선시대라면 맥없이 당하고만 있었을 그 여자도 당당하게 맞섰다. 자신은 지금 왕의 아이를 임신한 몸인데, 그런 자신을 죽이면 왕실의 핏줄을 끊는 대역죄를 범하게 될 것이라며. 그 말에는 자객들도 감히 어쩌지 못했다. 왕비의 명령 대로 그녀를 죽여야 하는 것이 원래대로의 목적인데, 그 바람에 자칫 자신들 손으로 고구려 왕실의 대를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시키는대로만 했을 뿐인데 졸지에 역적이 되고 싶지는 않았겠지.

 

[王聞之, 乃復幸女家, 問曰 “汝今有娠, 是誰之子?” 對曰 “妾平生不與兄弟同席. 况敢近異姓男子乎? 今在腹之子, 實大王之遺體也.” 王慰藉贈與甚厚, 乃還告王后, 竟不敢害.]

왕께서 그 말을 듣고 다시 여자의 집으로 거동하시어 물으셨다.

“네가 지금 임신한 것이 누구의 씨더냐?”

“첩은 평생 형제와도 같이 앉은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감히 성이 다른 남자와 가까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뱃속의 아들은 정녕 태왕께서 남기신 몸입니다.”

왕께서 위로하시고, 선물을 매우 후하게 내리고 돌아와 왕후께 말씀하셨다. 결국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13년(209) 3월

 

왕궁에 돌아가서 왕은 왕후에게 얼마나 맞았을까? 자기 자식을 지키려고 하는 생각에 군말없이 매를 다 맞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왕후로서도 자신이 이미 늙어서 왕의 후손을 낳을 수 없다는 현실 앞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이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왕비 우씨의 태도를 보면, 산상왕과 동침해서 애까지 밴 여자를,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안 뒤에도 또다시 죽이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질투를 보인다. 형사취수제라는 풍속에 따라서 자기 시동생에게 시집간 우씨다. 그런데 이 형사취수라 불리는 이 풍속이라는 것이, 실은 엄청난 가부장적 요소가 그 바탕에 깔려있는 풍속이라 한다.

 

여자를 마치 남자에게 소속된 무슨 재산이나 똑같이 여기기 때문에, 자신이 죽을 때에도 무슨 재산 물려주듯이 여자도 같이 물려주는 것이었다. 여자를 물려주는 재산 취급할 정도로 가부장제가 강한 나라에서, 가부장제의 화신(?)이라 불릴만한 일부다처제가 없었다는 것이 참 기이하다. 더욱이 산상왕이 주통촌 여자를 후궁으로 삼는데 그걸 갖고 엄청난 질투를 보이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저 죽으려고 자처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여성운동가들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모르겠다. 낄낄낄.)

 

[秋九月, 酒桶女生男. 王喜曰 “此天賚予嗣胤也.” 始自郊豕之事, 得以幸其母, 乃名其子曰郊彘, 立其母爲小后.]

가을 9월에 주통(촌)의 여자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께서 기뻐하여 말하였다.

“이는 하늘이 사륜(嗣胤)을 나에게 주심이로다.”

교제에 쓸 돼지의 일에서 비롯되어 그 어미를 침석에 들게 하였으므로, 그 아들의 이름을 교체(郊彘)라 하고, 어미를 소후(小后)로 세웠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13년(209)

 

여담인데, 이 소후(小后)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라고 점지되어 있었다 한다.

 

[初小后母孕未産, 巫卜之曰 “必生王后.” 母喜. 及生名曰后女.]

처음 소후의 어미가 잉태하여 낳기 전에, 무당이 점쳐보고 이런 말을 했었다.

“필시 왕후를 낳겠구나.”

어머니가 기뻐하였다. 낳은 뒤에 이름을 후녀(后女)라 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13년(209)

 

왕의 후궁이 될 운명을 타고난 여자와 후궁으로부터 태어날 운명을 타고난 아이. '소후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마'라는 신탁을 내리기 훨씬 전부터 이미 '너는 소후가 될 것이다'라는 운명을 태어나지도 않은 소녀에게 부여한 하늘이라. 하늘의 그물이 엉성한 것 같아서 빠뜨리는가 싶어도 결국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묘하게 이어지게 마련이다. 하늘이 짠 하나의 각본과 연출로, 고구려 11대 국왕의 탄생이 이루어졌다고. 그렇게 보면 하늘이라는 것은 참 조화로우면서도 교묘하기가 짝이 없다. 인간이 예측하지 못하는 몇 수 앞을 읽으며 각본을 짜고 메가폰을 잡고 있는 저 하늘은 말이다.

 

[冬十月, 王移都於丸都.]

겨울 10월에 왕께선 환도로 도읍을 옮기셨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13년(209)

 

애도 하나 새로 생겼겠다. 새마음 새 기분으로 왕은 수도를 환도로 옮긴다.

 

[十七年, 春正月, 立郊彘王太子.]

17년(213) 봄 정월에 교체(郊彘)를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이때 교체의 나이는 다섯 살. 공식적으로, 이 아이가 바로 고구려의 왕자이며 다음 왕이 될 것임을 천명하고, 하늘에 고하여 태자로 삼았다고, 《삼국사》는 말하고 있다. 교체.... 직역하면 '제삿돼지'라는 뜻인데, 아무리 돼지 덕분에 본 아들이라지만 아들한테 돼지가 뭐니 돼지가. 그나마 제사 때에 쓰는 신성한 돼지라니 다행이다만....

《삼국사》나 계속 읽어보자.

 

[二十一年, 秋八月, 漢平州人夏瑤, 以百姓一千餘家來投. 王納之, 安置柵城. 冬十月, 雷, 地震. 星孛于東北]

21년(217) 가을 8월에 한(漢)의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데리고 투항해 왔다. 왕께서 그들을 받아들이고 책성(柵城)에 안치하셨다. 겨울 10월에 천둥과 지진이 있었고, 동북쪽에 살별[星孛]이 나타났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우리 나라의 기록에 보면 귀화인들이 특히 많이 나온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주변의 백제나 신라, 옥저, 말갈, 그리고 중국 한족들까지. 우리가 순수혈통의 민족이라고 하는 개념은, 가장 먼저 사장되어야 할 고루한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그걸 믿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멍청이다. 스콧 버거슨이라는 미국 사람이, 자서(自書) <대한민국 사용후기>에서 우리를 가리켜 왜 천박한 민족주의에 빠져살고 있다고 비판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천박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주제에 안 맞는 추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추한 짓의 하나가 혈통주의다. 피부 노랗고 머리 검고 가갸 뒷다리나 떼는 사람만 한국인이라고 하면서, 외국 사람은 알게 모르게 거부감을 갖고 대한다.(그러면서도 백인들에게는 또 잘한다. 흑인이나 외국인 노동자들, 조선족 교포들은 무슨 하등한 종놈 취급 하면서 깔보고 업신여기는 주제에)자기 몸에 무슨 피가 섞여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한[一]민족이랍시고 시시덕대는 꼬락서니란.(바른말로 조선족 교포들을 우리 동족처럼 여겼으면, 저 이천의 냉동창고에서 불에 타죽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 민족(Nation)을 '혈통' 개념으로 이야기하는 까닭에 벌어진 일이다. 중국인들이 20만이나 되는 고구려인들을 포로로 잡아간 것을 갖고 고구려인의 대부분이 중국인이 되었다고 '혈통' 운운하면서 고구려를 통째로 잡아먹으려는데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나? 20만 명 잡아간게 뭐 어쨌는데? 20만 명이나 되는 고구려인들의 문화는 중국인들에게 그리 특별한 영향을 주지도 않았건만, 우리 문화는 중국의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전세계에 광고하게 내버려둘 셈인가. 왜 '민족'을 '문화'적인 개념으로 보지 않고 '혈통'으로만 보려고 하는지 답답하다. 민족이라는 것은 그저 단순히 혈통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서 하나로 묶어줄수 있는 벨트를 뜻한다.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를 칭한 것이 단순히 혈통적인 연계만이 아니라, 옛 고구려 지역의 영역 안에서 고구려의 문화권을 토대로 건국된 것이었기에 거침없이 고구려의 후계자를 지칭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혈통적으로 고구려인과 연관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어떤 것을 물려받았고 어떤 것을 아직까지도 지키고 있는가를 밝혀내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고구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많다. 중국이 따라올 바가 못 된다. 온돌을 비롯하여(중국인들은 온돌을 가리켜 조선, 즉 우리나라 물건이라고 부른다), 저 조선조의 유명한 석각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고(중국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 개경의 불일사 석탑이, 신라의 주척이 아닌 고구려의 고려척(1자=35.6cm)을 써서 만들어진 것도 있고, 기업이나 가게의 창업 고사를 지낼 때에 돼지머리 올려놓는 것은 동양 삼국에서 오로지 우리나라에만 있고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다. 돌을 매끈하게 다듬는 그랭이공법은 석가탑이나 다보탑을 지을 때에 사용했던 석축기법으로 원래 고구려의 축성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누워 자면서 온돌의 유래도 알지 못하고, 거문고의 음색이 아름답다면서 거문고가 고구려 유래인지도 모르는데, 단지 밝혀내는 것만으로 그칠수 있을까? 그걸 지키지 못하고 우리 생활 속에 녹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二十三年, 春二月, 壬子晦, 日有食之.]

23년(219) 봄 2월 그믐 임자에 일식이 있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삼국사》가 그 내용면에서 신빙성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는 이유는 천문현상 기록 때문이기도 하다. 《삼국사》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천문 기록, 그 중에서도 특히 일식에 관련된 기록이, 실제 사실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일식에 대한 것은 오늘날 컴퓨터로 분석만 하면 기록에서 전하는 날에 정말 그러한 현상이 있었는지, 태양과 달과 지구의 궤도 변화를 역추적해서 알아낼수 있다고 한다.저 많은 기록들을 아직 우리는 다 역추적해보지도 않았다. 단지 몇 개가 틀렸다는 것만으로는 《삼국사》라는 책의 신빙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ㅡ나는 그렇게 본다.

혹시 천문학 하는 사람 없을까. 저것좀 찾아서 확인해보게.

 

[二十四年, 夏四月, 異鳥集于王庭.]

24년(220) 여름 4월에 이상한 새가 왕궁 뜰에 모여들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고구려의 왕궁에 이상한 새가 모여들기 한 달 전, 부여에서도 위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삼국지》에 이른바 위 문제 연강(延康) 원년. 《삼국지》부여열전에 이른바, 후한 말엽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이 무렵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끼여 있던 부여를 이용해 고구려와 선비를 견제할 목적으로 공손도는 자신의 종녀(宗女)를 부여왕에게 시집보낸다. 위구태의 뒤를 이은 간위거(簡位居)는 적자가 없고 얼자(孼子, 서자) 마여(麻余)만 있었다. 간위거가 죽자 부여의 제가(諸加)는 모두 마여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실권을 쥐고 있던 것은 대사(大使) 위거(位居)였다. 부여 우가(牛加)의 형(兄) 벼슬 가진 자의 아들이었는데, "재물을 가볍게 여겨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국인이 그에게 많이 따라붙었다."고 《삼국지》는 전한다. 대사(大使)라는 벼슬이 부여 관직인 대사자(大使者)인지 아니면 그냥 '대사'로서 외교를 맡아보는 부여의 관직 이름일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후자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부여왕을 제치고 독자적으로 외교권을 행사하며, 해마다 자신의 이름으로 후한에 사신을 보냈다.

 

야심많은 패자들은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위거와 같은 방법을 많이 썼다. 《춘추좌씨전》에 보면 제나라의 제후였던 진걸이 자기 영지의 백성들에게 몰래 우대정책을 펴서 백성을 매수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백성에게서 조세를 거둘 때는 실제보다 작은 되를 써서 낮추고, 빌려줄 때는 실제보다 큰 되를 써서 더 주었다. 아무리 위에서 세금을 무겁게 거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자선을 베푸는 그의 목적은 제의 기존통치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이었고 실제로 제는 훗날 그의 일족이 차지하게 되지만,

 

[二十八年, 王孫然弗生.]

28년(224) 왕의 손자 연불(然弗)이 태어났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왕의 손자라면 분명, 연우왕의 손자일 것인데. 손자를 봤다는 것은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고, 기록상 연우왕에게는 아들이 교체, 즉 훗날의 동천왕 단 한 명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태어난 왕의 손자 고연불은 교체의 아들이라는 것인데. 교체가 태어난 것이 연우왕 13년(209년)이고 태자로 책봉된 것이 4년 뒤인 17년(213년), 이 무렵이면 교체의 나이는 꼭 열다섯. 애를 만들기 충분한 나이이긴 하다만..... 아무튼 없다가 한번 터지면 이렇다니까. 그렇게 자식 없던 왕이 꿈 한번 꾸고 아들 하나 보더니, 15년만에 손자까지 보게 될줄 누가 알았겠나.

 

[三十一年, 夏五月, 王薨. 葬於山上陵, 號爲山上王.]

31년(227) 여름 5월에 왕께서 승하하셨다. 산상릉(山上陵)에 장사지내고 호를 산상왕(山上王)이라 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의 인생에 대해 조선 학자들은 심하게 비판했다. 형을 제끼고 왕이 된 것하며, 자기 형수하고 혼인한 것에다, 왕으로서 체통도 없이 천한 여자와 몰래 야합하고 애까지 만든 것을, 안정복을 비롯한 숱한 '보수꼴통' 유학자들이 앞다투어 별별 말 갖다붙여 비난하는 것에 비하면 김부식은 비교적 말을 아끼는 편이다. 나쁘게 말하면 의뭉스러운 것이고, 좋게 말하면 너그럽다고 할수 있을 정도.사관으로서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 기록에 자신의 주관은 최대한 투영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는 평하여 말한다[評曰]'라는 식의 '사론(私論)'으로 실제 사실과 자신의 주관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원칙이다. 유학자로서 그리고 관리로서, 《삼국사》의 편찬을 총감독하고 진두지휘하면서, 유리명왕이 해명에게, 대무신왕이 호동에게 자살을 명한 것을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사론'으로서 그 견해를 피력하던 김부식이었지만,  유학자로서는 이루 말할 필요가 없는 불륜(유학자들 시각에서)이 벌어졌는데도, 그는 입을 다물고 별다른 사론을 집어넣지 않고 있다.

 

분명, 형의 여자를 가진 산상왕의 행동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도 가정윤리 교과서를 다시 써야 될 정도의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역사를 오늘날의 눈으로 보는 것만큼 엄청난 잘못이 또 있을까? 아무리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다룬 저서가 방대하다고 해도 당대 사람이 아니면 그 당시의 사정이 정확히 어땠는지, 사람들의 가치관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3백년 전의 사람에게 지금 우리가 입는 옷 보여주면서 입으라 하면 분명 우리더러 '오랑캐'라고 벼루 집어던지며 썩 물러가라고 욕할 것이다. 그들도 지금 우리 풍속을 이해하지 못할텐데, 어떻게 우리가 그들의 풍속에 대해 속속들이 다 이해할수가 있겠나? 그것도 천년도 더 전의 일인데.

 

우리가 할수 있는건 그저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는 것 그 뿐이다. 사실이 될수는 없어도 사실에 가까워질수는 있다. 5백년 동안 우리 눈에 끼어있던 유교적인 시각을 벗어버리고, 당시 고구려 사람의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한번 들여다보자. 산상왕의 행동이 정말 지탄받아야만 할 일이었는지. 그리고 왜 그런 고구려의 풍속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지를. 그러면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진짜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유교와 불교 같은 외래의 문화가 들어오기 전의, 한민족이라 불리는 종족의 참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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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산상왕편은 끝났고, 동천왕 편으로 이어진다. 동천왕 편에는 우리가 몰랐던 고구려의 협객들, 공자께서 말씀하셨던 충(忠)이 어떤 것인지. 진정한 무인(武人)의 세계가 펼쳐지게 될테니, 기대하시기를.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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