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46784

시마즈 요시히로, 이순신 장군을 만나다
시마즈 가문의 전쟁사, 쇼코 슈세이칸 여행
03.10.05 22:32 l 최종 업데이트 03.10.06 10:11 l 노시경(prolsk)

▲ 쇼코 슈세이칸의 옛모습 ⓒ 노시경 

가고시마의 긴꼬만 앞에 자리한 쇼코 슈세이칸(尙古集成館) 본관은 1865년에 28대 항슈(藩主) 시마즈가 건축한 일본 최초의 근대 공장군이다. 당시 이 곳은 철골 기계 공장이었으나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다. 일본 만화 영화 <모모노케 히메>에서 보이는 근대식 서구 기술이 이 유적과 유물들에서 출발하고 있다. 한 나라의 영화를 보고 그 나라를 여행하면 상상력은 더 풍부해지는 법. 잔뜩 찌푸린 날씨 속에 건물 안에 들어서니, 남편이 한국 사람이라는 일본인 안내인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이 곳에서는 사쓰마의 시마즈(島津) 가문이 개화기에 서양 문물을 도입하던 과정을 볼 수 있다. 특히 철 주조 기술, 대포와 총기 제작 기술, 선박 제조 기술, 유리 세공 기술이 19세기에 이곳을 통해 유입되었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아 보일 수도 있는 유물들이지만, '일본 최초'라는 의미 때문에 일본에서 대접받고 있는 그들 선인들의 유산인 것이다.


▲ 쇼코 슈세이칸 본관 ⓒ 노시경



▲ 쇼코 슈세이칸 별관 ⓒ 노시경 

이 박물관에는 700년간 이곳을 통치하였던 시마즈 가문의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일본의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무구'를 비롯하여 서화, 사진 등의 역사적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시마즈 가문 역대 항슈들의 이력이 이 근대 박물관의 곳곳에 남아 있다. 나의 생각은 다시 시마즈 가문의 역사를 따라가 본다.

시마즈 가는 일본의 가마쿠라 시대에 사쓰마 수호로 임명된 이래 오오스미, 휴가를 포함하는 미나미큐슈(南九州)의 3개국을 메이지 시대까지 지배했던 무사의 집안이다. 이 가문은 16세기 중반에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고, 철포를 사용하면서 전국적인 다이묘, 시마즈 가의 기초를 닦았다. 그 후 이 시마즈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에 항복함으로써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 가문의 17대 항슈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년∼1619년). 55만9천 석의 영주였던 그는 적은 병력을 이끌고 이토가, 오토모가, 류소지가와를 잇달아 격파하고 미나미큐슈를 통일한 무사이다. 그가 이 한국인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 항슈가 임진왜란 때에 조선을 침략하였던 왜장이었기 때문이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준비하며 군량미를 모으고 있었다. 그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통해 조선 침략 시에 7천명 병사가 10개월 동안 사용할 군량미의 징납을 류쿠(琉球,오끼나와)에 강압적으로 요구해 왔다. 당시 큐슈 남부 지역의 사쓰마는 류쿠에 가장 가깝게 자리잡고 있었고, 일본의 류쿠 무역에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 사쓰마의 류쿠정벌 ⓒ 노시경 

군량미 요구를 접한 류쿠는 이를 감당할 경제적 능력이 없었지만, 나라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량미의 반을 바치고, 나머지 반은 시마즈 가문에게 빌려서 겨우 조달한다. 1591년 12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류쿠에서 강제 징납한 군량미를 포함하여, 조선을 침략할 대병력이 먹을 48만명분의 1년 치 군량과 군수 물자를 나고야성에 모았다.

1592년 1월 6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항슈들에게 동원령을 내림과 동시에 큐슈, 시코쿠, 혼슈 서부 지역을 지배하는 다이묘(大名, 막부 시대에 1만석 이상의 독립된 영지를 소유한 영주)들에게 영지 규모와 병력 규모에 따라 병력을 차출하도록 지시했다. 실제 전선에 투입된 일본군의 제1병단 9개군과 수군의 168,250명 중에서 이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제4번대 1만5천명 중에 속해 있었고, 그는 1만명의 사쓰마 병사들을 휘하 병력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 사쓰마 시마즈 가문의 무사 ⓒ 노시경 

사쓰마와 류쿠의 군량미를 가지고 조선을 침략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의 대군을 만나 격전을 치르게 된다. 그는 명나라 장군들에 의해 '석만진(石曼津: 시마즈의 중국식 이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임진왜란 초기, 시마즈는 사쓰마 왜군을 이끌고 강원도를 침략한다.

1593년 7월, 진주성에서 침략을 멈춘 왜군은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후 왜군은 전라도 순천에서 경상도 울산에 이르는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고 방어진을 구축하게 된다. 이 때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거제도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거제도 최북단인 대봉산(大峰山) 정상 인근에 위치한 영등포왜성(永登浦倭城)이 임진왜란 때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가 쌓은 성이다.

1597년 1월 초, 전쟁 발발 4년째가 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패했던 조선 침략을 기어코 성공시키기 위해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번에도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여 14만7천500명의 왜군이 투입되었다.

당시 전열을 가다듬던 시마즈에게 나타난 조선의 장수는 원균(元均)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조선의 선조는 모함을 받은 성웅 이순신을 옥에 가두고, 후임 통제사로 원균을 임명하였다. 1597년 7월 5일, 원균은 무려 268척이나 되는 대함대를 이끌고 절영도(영도) 앞바다까지 나아갔으나, 무더운 날씨와 병사들의 체력 한계를 무시한 항해를 강행하여 왜군들과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극도로 지쳐버리게 된다. 조선의 함대는 20여척의 함선을 일시에 잃어버리고, 그 곳을 빠져나와 본영이 있는 한산도를 향하여 무작정 달아났다.

겨우 가덕도에 도착한 원균 함대의 병사들은 극도로 목이 말라 앞을 다투어 상륙하였고, 정신 없이 물을 찾았다. 그러나 현재 부산시 강서구 눌차동 눌차 초등학교의 뒷산에 있던 가덕왜성(加德倭城)에는 시마즈 야스히로가 이끄는 사쓰마군이 있었다. 그들은 무장도 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조선 수병 중 400여명을 무자비하게 베어 버렸다. 상륙하기 전에 정찰병 하나 파견할 줄 몰랐던 조선 장수들로 인하여 조선 수병들은 개죽음을 당한 것이다.

7월 16일 새벽 4시경, 원균의 무능함을 알게된 왜군은 시마즈의 함대를 포함한 1천여척의 대연합 함대를 총집결하고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조선 함대를 향해 일시에 돌진해 들어갔다. 외즐포에 있던 원균의 조선 함대는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붕괴되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원균은 배를 버리고 물에 뛰어들어 간신히 섬으로 기어올랐으나, 공을 다투며 추격한 왜병들에 의하여 결국 참혹하게 살해되고 만다.

7월 17일, 왜군의 우키다 히데이에는 좌군(左軍)과 중군(中軍)의 10만 대병을 서해를 통해 곧장 한강으로 상륙시켜 한성을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다. 7월 29일, 왜군의 좌군과 중군은 일제히 서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총사령과 우키다 히데이에는 부산에서 출발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웅천에서,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거제도에서 출발하게 된다. 이때 30여명의 왜장들이 연합한 왜군은 대형 수송선 130여 척에 70여척의 호위 전함을 거느린 거대한 함대였다. 사천에 집결한 사쓰마 등의 왜군은 섬진강을 따라 올라가서 구례와 남원성을 함락시켰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전라북도 부안에 배치되었으나, 의병이 공격이 거세어지자 전라남도 해남과 강진으로 배치되었고, 다시 의병에 밀려 경상도 사천으로 후퇴하게 된다. 파이팅! 조선의 의병들! 임진왜란과 달리 정유재란 당시에 시마즈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일어난 의병들에 의하여 패퇴하고 경남의 해안 지대로 물러난다. 썩어빠진 명분 싸움과 당쟁으로 하루를 지새던 조선 조정의 양반들은 이 난리 중에 간 데가 없고, 결국 낙향한 시골의 선비들과 민초들이 조선을 지켰던 것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10명의 왜군 장수 등과 함께 해안에 자리한 경상남도 사천시 선진리의 해발 34m 구릉에 사천왜성(泗川倭城)을 쌓고, 인근 경남 진주시의 해발 192m 망진산(望晋山) 정상에 망진왜성을 쌓는다. 그는 이 곳에 주둔하면서 방을 걸고 "조선 사람은 왜군을 믿고 농사에 전념하라. 조선 사람에게 피해를 준 왜군은 신고하면 처벌하겠다"는 선무 공작까지 하게 된다.

▲ 거북선 ⓒ 노시경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조선의 장수가 그의 눈 앞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이순신(李舜臣)에게 도착하였다. 이순신은 9명의 군관을 이끌고 조선 수군의 보급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왜군이 철수하기 불과 하루 전에 구례, 곡성, 옥과, 순천, 낙안, 보성 등을 돌고 있었다. 조선의 영웅, 이순신은 신병 1천명과 1개월 분의 군량미, 수많은 무기들을 거두어들여 왜군과의 해전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완벽한 영웅의 조건을 갖췄던 이순신! 그는 거의 남아있지도 않은 조선 수군과 불과 12척 전선을 가지고 왜군의 정예 함대를 물리친 믿어지지 않는 신화, 명량대첩(鳴梁大捷)을 거두게 된다. 9월 14일, 성웅 이순신은 우수영에 있는 울돌목의 급한 조류를 이용하여, 왜군의 전함 31척을 격침시키고 약 90여척을 반파시키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때에 도망간 왜군의 지원 함대 90여척 중의 한 척에 시마즈 야스히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왜군은 병참의 지원 없는 북진이 불가능하였고, 육지에서 승리를 거두던 왜군들도 스스로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9월 20일, 서울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왜군은 서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충청도 직산과 보은 지방에서 남해안으로 총퇴각하였다.

1598년, 일본에서 도요토미가 병으로 죽었다는 전갈이 날아오자 왜군은 서둘러 조선에서의 철군을 결정하였다. 이에 전라도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명나라 수군 도독인 진린(陳璘)과 이순신에게 뇌물까지 보내며 퇴각할 길을 열어 달라고 애걸하게 되지만, 이순신은 조각배 한 척도 돌려 보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를 물리쳤다.


▲ 조선 전함 내부 ⓒ 노시경 

이 때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왜군에게도 공포와 존경의 대상이었던 조선의 이순신 장군을 해전을 통해 만나게 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철수 부대는 왜선의 해로를 열어줄 것을 조건으로 뇌물을 받은 명나라 도독 진린에 의하여 이미 바닷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사천에 주둔하고 있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성의 타찌바나 토우도라 등 여러 왜장과 합세하였다. 이 500여척의 왜 함대는 순천에서 퇴로가 차단되어 고전하던 고니시 군단을 구출하기 위하여 남해도 왜성에 집결한 후, 광양만과 남해대교 일대인 노량을 향하여 몰려들고 있었다.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명 연합 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경 노량으로 긴급하게 진격하게 된다. 다음날 새벽 2시경, 역전의 휘하 장수들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을 이끈 이순신의 함대는 왜군의 적선과 난투의 접근전을 벌이면서 정면 충돌하게 된다.

음력 11월 18일이면 추운 겨울이었고, 하늘에는 보름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이순신 함대와 왜군의 시마즈 요시히로 함대는 각종 화포와 불화살을 쉴 새 없이 발사하면서 치열한 야간 전투가 계속 되었고,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이 대회전(大會戰)에서 수많은 병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였다.

이 마지막 해전이 고비에 이른 19일 새벽 이순신은 몸소 독전하던 중에 적의 탄환을 왼쪽 가슴에 맞아 관통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조선 함대가 태워 버린 왜군의 전선이 200여척이나 되었고, 베어버린 적병의 머리가 500여급이었다. 이 해전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겨우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치게 된다. 이순신과 시마즈 요시히로의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조선군과 왜군의 7년 전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 수군들은 이순신 장군, 자신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남해도에서 말 그대로 복수혈전을 벌인다. 왜군과의 혈전이 벌어졌던 노량에서 바다로 빠졌다가 목숨을 건진 왜군들은 남해도로 모두 기어올라왔다. 남해도에 오른 왜군들 중 일부는 배를 빼앗아 타고 도망을 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왜군은 흩어져서 일대의 산으로 도망을 가게 된다. 남해도 일대는 당시 왜군 패잔병들의 마지막 소굴이었다.

이 남해도 남해왜성 일대에서의 소탕작전을 통해 조명 연합군은 왜의 패잔병을 샅샅이 뒤져 섬멸하게 된다. 이 남해도 일대에서 왜병 천명이 잡혀서 목이 베어진다. 이 죽어나간 왜병 중에 상당수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끌던 사쓰마군이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격전, 숱한 난파선과 왜병의 시체가 남해 바다를 피로 물들였을 것이다. 이 곳 사쓰마에서 만난 조선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긍지를 가져다 주는 조선의 인물은 바로 이순신이었다.


▲ 쇼코 슈세이칸의 대포생산 유적 ⓒ 노시경

빠져나온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쓰마군은 조선에서 납치한 포로들과 함께 이 곳 사쓰마 땅에 다시 발을 딛는다. 이 사쓰마의 왜군들은 19세기에 이곳 쇼코 슈세이칸에서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여 정밀한 대포를 직접 생산하게 된다. 그리고 이 대포 기술은 다시 조선을 향하게 된다. 정말 끈질긴 악연이 조선말의 무능한 왕실을 향하고 있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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