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독립군의 국내작전과 그 활약의 양상"에서 앞 부분인 "(1) 연도별 국내 진격상황"만 가져왔습니다.
2) 독립군의 국내작전과 그 활약의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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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해외 항일무장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3·1운동 후 수없이 탄생한 항일무장독립군단은 새로운 정세에 대응하여 새로운 조직을 갖추고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먼저 만주·노령의 항일무장독립군단이 국내로의 진격작전을 어떻게 전개하였는가를 연도별로 살피고 이어 다대한 전과를 올린 국내에 있어서의 전황을 살펴 보고자 한다.
(1) 연도별 국내 진격상황
3·1운동 후 만주·노령에서 편성된 항일무장독립군의 국내로의 진격 상황을 당시의 일본 경찰당국은 그들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기 전 국경지방에서는 때때로 중국 마적의 침입이 있었을 뿐 조선 독립군에 관해서는 큰 일이 없었는데, 3·1운동 발발 후에 있어서는 동 사건에 관계되는 자의 일부가……(중략)……중국 땅으로 숨어들어 그곳에 주재하는 무뢰불령(無賴不逞)의 무리(항일 독립군……필자주)와 합하여 독립군이 되고, 각종의 불온단체(항일 무장 독립군단……필자주)를 조직하여 각지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상해 임시정부등과 연계하여 무력 침공을 감행하기 위해 항상 우리 경비력(일본의 국경 경비력·····필자주)을 엿보고 교묘하게 국경 연안의 경비망을 통과하여 조선내로 침입한 후 독립 운동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얻는다고 하면서 소재의 민가를 습격하고……(중략)… 때로는 주재소·면사무소·기타의 관공서를 습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경 일부에 있어서는 아직 그러한 일이 계속되고 있다.註 017
* 불령(不逞) : 원한, 불만, 불평 따위를 품고서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함. 또는 그런 사람.
즉 3·1운동 후 적극화해 간 만주로부터의 항일 무장 독립군단의 국내로의 진격상황을 그대로 잘 알려 주고 있다.
또한 국내로 진격하는 이둘 항일무장독립군의 무기와 전술에 대하여 일본 경찰 당국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독립군은 근거를 중국땅에 두고 단결하여 반거(蟠居)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골-드식 또는 모-젤식 연발총을 소지하고 있으며 그 행동은 민첩하며 지리에 정통하고 야영조식(野營粗食)에도 익숙할 뿐 아니라 부대훈련에도 뛰어나 있어 출몰자재하여 교묘하고 대안(對岸)으로부터 월경침입하여 주간은 인적이 미치지 않는 산악 또는 밀림지대에 잠복하였다가 일몰을 기다려 횡행하는 것이 보통이다.……(중략)……금후 더욱 다사다난할 것으로 그 위험은 예측하기 어렵다.註 018
* 번거(蟠居) : 서릴 반 + 살 거 = 반거(盤踞/蟠踞) ? : 어떤 집단이 한 지방을 차지하고 세력을 떨침.
항일무장독립군이 소지하고 있는 좋은 성능의 무기와 숙달된 훈련 뛰어난 야습 게릴라전술에 일본군경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이같이 국내로 진격해 들어 오는 무장독립군에 대비하기 위해 일제는 국경 삼도(평북·함남·함북)의 경찰경비력을 대폭 강화하였다.
즉 보통은 1부군에 1개 경찰서를 두는 것이 상례였는데 국경 삼도에는 이와는 달리 함북에는 11개 군에 경찰서 19개, 파출소 6개, 주재소 130 개, 출장소 42개를, 함남에는 16개 군에 경찰서 20개, 파출소 6개, 주재소 180개, 출장소 12개를, 평북에는 19개 군에, 경찰서 24개, 파출소 5개, 주재소 195개, 출장소 84개를 각각 설치하였다.
특히 압록강 연안에는 10리 거리에 주재소 또는 파출소를 하나씩 설치하여 4~10인의 경비경찰관을 배치하였다. 또 경비경찰관의 수도 점차 증가시켜 1925년 당시의 인원이 5천 882명에 달하였다. 또 그 시설을 보면 주재소 주위에는 참호를 파 철조망을 두르고, 또 1923년부터는 주재소 주변에 2척의 석벽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또 300명의 경비경찰관을 증원하여 그 가운데 230명을 평북 국경에 나머지를 함남·북 국경에 배치하였다. 또 평북의 압록강 강안에는 기관총으로 장비한 발동선 3척을 함북 두만강 강안에는 경비선 1척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평북 3개소, 함남 2개소의 요지에는 기관총을 상비 장치하고 강안 요지에는 곳곳에 참호를 파 무장 독립군의 진격에 대비하였다. 또한 그들은 강안 주재소·출장소와 본부 경찰서사이에 물샐틈없이 경비전화를 가설하였다. 그들이 장비한 무기는 모두가 38식 또는 44식 기총의 최신 무기들이었다.註 019
이러한 경비시설·경비경관의 대폭증원 조밀한 통신망·근대무기의 장비 등에도 불구하고 항일무장독립군의 국내로의 진격 작전은 그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일본 경비 경관들은
촌각의 안심도 할 수가 없어 경찰관들은 취침에 있어서도 불시에 대비하기 위해 무장한 그대로 총기를 목침으로 가면(假眠)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전혀 휴양 안식할 틈이 없는 상태이다.註 020
* 가면(假眠) : 잠시 졸음
라고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항일무장독립군들의 국내로의 진격에 전전 긍긍하였다.
특히 1924년 5월 19일 재등실(齋藤實 ; 사이토오마코토)총독이 국경 순시를 위해 기선으로 압록강을 선행하여 평북 마시동(馬嘶洞) 부근에 이 르렸을 때 대한통의부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이 인솔하는 항일무장 독립군이 그들 일행에게 총탄을 퍼부어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註 021은 항일무장독립군의 과감한 작전의 성격을 그대로 과시한 것으로, 이후 일제의 국경경비경찰들은 더욱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1920년으로부터 1924년에 걸친 항일무장독립군의 국내로의 진격상황을 알려 주는 일본 경찰측 집계는〈표 4〉와 같다. 이 숫자에는 이미 국내에 들어와 활약하고 있던 독립군의 활약 건수도 들어 있으므로 정확한 국경으로의 진격 건수와는 다르나 모두가 국경을 거쳐 들어간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참고는 되리라 믿는다. 일본측은 이 통계표에서 독립군을 ‘적도(賊徒)’ 또는 ‘비도(匪徒)’라고 표기해 놓고 있으므로 필자가 이것을 ‘독립군’으로 고쳤다.
* 적도(賊徒) : 적의 무리
* 비도(匪徒) : 무기를 가지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빼앗는 무리
〈표 4〉 국경 3도(평북·함남·함북) 독립군 활동상황(1920년~1924년)註 022
이상의 통계는 일본 경찰의 통계이므로 일본 군부의 통계를 합치던 그 숫자는 보다 늘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즉 5년간(1920년~1924년) 독립군 건수로는 1920년의 1천 651건을 최고로 하여 1921년, 1924년, 1923년, 1922년의 순서로 나타났고, 인원수로 보면 1920년의 4천 643명을 최고로 1924년, 1921년, 1923년, 1922년의 순서로 나타나 상술한 바와 같이 보다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도 항일무장독립군의 국내로의 진격작전과 그 항전이 3·1운동 후 5년간 그칠 줄 모르고 줄기차게 지속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5년간의 줄기찬 독립군의 항전의 전과를 보면 경찰서 56개소를 습격하여 경찰관 47명을 사살하고 82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관공서 46개소를 습격하여 관리 11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이 숫자는 일본측이 은폐하여 발표한 숫자이므로 실제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여기에 일본군측에 입힌 손해를 더하면 항일독립군의 전과는 훨씬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5년간 주구배 183명을 살해 처단하고 142명에게 부상을 입혀 민족적인 각성을 촉구하였다.
군자금 모집은 그 액수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매년 증액되어 갔다. 이는 독립군의 군자금 모집의 노력과 애국민중들의 독립운동 지지를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애국청년들이 독립군을 자원하는 수도 매년 불어났던 것도 아울러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전과와 아울러 독립군의 희생도 또한 컸다. 5년간의 항전 끝에 일본측에 피살된 독립군의 수는 753명에 달하였다.
3·1운동 후 5년간 만주·노령의 항일무장독립군의 국내로의 진격작전은 그야말로 격렬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국내로의 진격·활약을 지역별로 보면〈표 5〉와 같다.
즉 국경 3도 가운데 항일무장독립군의 국내로의 진격과 활약은〈표 5〉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1920년에는 함북이 제1위였으나 1921년 이후에 있어서는 평북으로의 진격과 활약이 국경 3도 가운데 주류를 이루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청산리·봉오동 대첩후 만주의 독립군이 노령연해주로 이동하였다가 흑하사변을 계기로 재차 만주로 돌아와 활약하였던 당시의 독립군의 동향이 또한 잘 반영되어 있다.
* 흑하사변 : 자유시참변
〈표 5〉 국경 3도(평북·함남·함북) 독립군 활약건수·인원수 (1920년~1924년) 註 023
주
註 017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조선경찰지개요(朝鮮警察之概要)』(1925), p. 114.
註 018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 앞 책, p.116.
註 019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 앞 책, pp. 118~119, p. 122.
註 020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 앞 책, p.120.
註 021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 앞 책, p.115.
註 022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 앞 책, pp. l23~124.
註 023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 앞 책, p.123 에 있는 통계표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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