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357657200405519141

이순신, 백의종군 길을 걷다 (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8
전남 순천과 구례의 백의종군로
입력시간 : 2013. 01.09. 00:00

손인필 비각. 구례군 구례읍 봉북리에 있다. 군자감 첨정 손인필은 구례 사람으로 이순신의 수군 재건을 도왔다

종군 길에 다양한 사람 만나며 여론 청취 
초계 가는 과정 수령에게 조문·대접 받아
권율·이원익 만나기 위해 구례-순천 왕래

4월19일에 이순신은 모친상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백의종군 길을 떠나야 했다. 그리하여 한 달 반 뒤인 6월4일에 도원수 권율이 있는 경남 합천군 초계에 도착한다. 

이 시기에 이순신은 구례까지 남하한 후에 도원수 권율을 만나기 위해 순천으로 갔다가 다시 구례로 가서 도체찰사 이원익을 만난다. 

이순신은 TV 드라마에 나오듯이 노역을 하면서 백의종군 한 것이 아니었다. 백의종군 길을 가는 동안에 여러 고을 수령으로부터 조문과 대접을 받고, 전라도 감사와 전라병사, 부체찰사도 만나고 도체찰사 이원익과도 두 번에 걸쳐 깊은 대화를 나눈다. 또한 여러 사람으로부터 원균과 조선 수군 소식도 전해 듣는다. 

그러면 이순신의 백의종군 길을 날자 별로 자세히 살펴보자.
 

이순신 백의종군로

이순신은 4월19일에 충남 공주군 일신역, 20일에 공주군 이산, 4월21일에 전북 익산시 여산에 머문다. 4월22일에는 전주에서 전주부윤의 후한 대접을 받는다. 이순신은 4월23일에 임실에 머물고 24일에는 남원 부근 15리쯤에서 정철 등을 만난다. 여수 출신 정철은 이순신의 부하로서 여수 오충사에 배향된 인물이다. 두 사람은 남원 5리 안까지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순신은 24일에는 남원에서 25일에는 운봉에서 머무는데 여기에서 도원수 권율이 순천으로 떠났다는 소문을 듣는다. 

4월26일에 이순신은 구례현 손인필의 집에서 머문다. 이 날 이순신은 구례현감 이원춘의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4월27일 아침에 이순신은 순천으로 떠난다. 송치(순천시 서면)를 지나 송원에 이르렀고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도착한다. 도원수 권율은 이순신이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을 보내 조문을 하고 안부를 묻는다. 저녁에 순천부사 우치적이 찾아왔다. 우치적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영등포 만호를 한 수군 맹장이다.

늦은 밤에는 정사준이 찾아왔다. 정사준은 순천 사람으로 왜군의 조총보다 성능이 우수한 정철총통을 만든 이순신의 심복이었다. 정사준은 이순신에게 원균이 망령된 짓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후 이순신은 5월13일까지 17일간 순천에 머무른다. 4월28일 아침에 도원수 권율은 다시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문안하여 전하되, ‘상중에 피곤할 것이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하였고, 이순신을 보좌할 친분이 있는 군관도 배정하여 주었다.

4월30일 아침에 이순신은 전라 병사 이복남을 만난다. 이복남은 원균의 일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5월1일에는 도원수와 전라도 순찰사 그리고 전라병사가 정사준의 집에서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전쟁 상황을 논의한다.

5월2일에 도원수 권율은 보성으로 가고 전라병사 이복남은 본영으로 갔으며 전라도 순찰사 박홍로는 담양으로 가는 길에 이순신을 만난다. 순천부사 우치적도 이순신을 찾아왔다.

한편 여수로부터 진흥국이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원균의 일을 이야기 하였다. 원균이 수군통제사가 된 지 불과 3개월인데 여수 본영과 한산도 진영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5월4일은 별세하신 모친 생신이었다. 이순신은 비통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이 날과 5월5일 단오절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5월4일 비오다. 

어머님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닭이 울 무렵에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오후에 비가 몹시 퍼부었다. 정사준이 와서 하루 내내 돌아가지 않았다. 이수원도 왔다. 

5월5일 맑다.

새벽꿈이 매우 어지러웠다. 아침에 순천부사가 보러 왔다.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왔는데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진중의 장졸들이 다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오늘은 단오인데, 어머니 영전을 떠나 천리 밖 먼 곳에 종군하고 있어서 예를 못 드리고 곡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이런 일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운명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 할 따름이다. 

5월6일에는 정원명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균의 못된 짓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 날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조문 편지를 받았다. 

5월8일에는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하였는데 이는 도원수 권율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이경신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많이 말하였다. 이순신은 이 날의 일기에 ‘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 데 이 역시 운수이다’라고 적고 있다. 5월12일에 이순신은 부체찰사 한효순을 만난다. 부체찰사는 도체찰사 이원익이 원균의 일에 대하여 많이 탄식하더라는 말을 전하였다. 

5월14일에 이순신은 순천을 떠난다. 정사준과 정사립, 양정언도 동행하였다. 저물녘에 구례에 도착하여 다시 손인필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구례현감 이원춘이 찾아왔다. 5월19일에 이순신은 도체찰사 이원익이 구례로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순신은 성안에 있기가 미안하여 동문 밖 장세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저녁에 도체찰사가 고을에 들어왔다. 

5월20일에 이원익은 사람을 보내어 조문을 하고 저녁에 이순신을 만난다. 이원익은 흰옷을 입고 이순신을 맞았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이순신과 이원익은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이 이야기 중에 이원익은 ‘음흉한 원균이 무고가 극심한데 하늘이 그것을 굽어 살피지 못하니 장차 나랏일을 어찌 하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5월23일에도 이순신은 도체찰사를 만난다. 이원익은 이 때 시국이 이미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분하게 여기면서 단지 죽을 날만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24일에는 도체찰사가 군관 이지각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 연해안 지도를 그리고 싶으나 그릴 방도가 없으니 그려서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지도를 그려서 보내주었다. 

이순신은 5월25일에 초계로 떠나려 하였으나 비가 많이 와서 구례에 머문다. 5월26일에 그는 비가 많이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길을 떠난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에 이르니 비가 퍼붓듯이 왔다. 간신히 악양(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이정란의 집에 이르렀으나 사는 사람이 문을 닫아걸고 기숙을 거절하였다.

이 집에는 김덕령 아우 김덕린이 빌려서 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순신은 아들 열을 시켜 억지로 사정하여 들어가 하룻밤을 잤다. 

경남 하동군 악양 최참판댁.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악양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최참판댁이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순신은 이곳에서 충장공 김덕령의 동생 덕보를 만난다. 그런데 난중일기에는 김덕보가 김덕린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덕보(1571-1627)는 1596년 8월에 형 김덕령이 억울하게 옥사하자 세상이 싫었다. 그는 1597년에 화순군 동복의 어느 마을에 은거하다가 지리산 백운동으로 다시 숨는다. 이순신과 김덕보가 만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김덕보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만나고 싶지 않았으리라. 만일 두 사람이 만났다면 이순신의 입장도 난처하였을 것이니까. 이후 김덕보는 1602년에 광주로 돌아와서 무등산 원효 계곡아래에 조그만 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지낸다. 이 집이 바로 풍암정(楓巖亭)이다. 

이순신은 5월27일에 두치에서 지내고 5월28일에 하동에 이르러 하동현감을 만난다. 하동현감도 원균이 하는 짓 가운데 미친 짓이 많다고 하였다. 6월1일에 이순신은 단성에서 자고 6월2일에는 삼가현 빈 관아에서 유숙한다.

6월3일에는 비로 하루 더 머물다가 6월4일에 괴목정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원수진이 있는 초계 모여곡에 도착한다. 모여곡은 지금의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낙민리이다. 이후 이순신은 7월18일까지 초계 원수진에 머무른다.

최근에 전남도는 구례와 순천구간의 이순신 백의종군로를 개설하였다. 이순신이 친구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구절이 다시 생각난다.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 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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