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283871600341059141

세계 해전에 빛나는 한산대첩 <하>
경남 통영 한산도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14
입력시간 : 2010. 09.08. 00:00


충무사
 
적을 알고 나를 안 위대한 승리
백병전 대신 화력 바탕 원거리 작전구사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명구 남겨 

한산도의 제승당과 수루를 둘러본 나는 제승당 왼편에 있는 충무사로 간다. 충무사는 1933년에 통영군민과 한산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만들었다 한다.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한 1930년대에 통영사람들이 이 순신을 모신 사당을 지었다니 정말 대단한 애국심이 아닐 수 없다. 

홍살문을 지나 충무사로 가는 길에는 비가 여러 개 있다. 통제사 조경이 쓴 한산도 제승당 유허비, 이순신의 후손인 고종 때 통제사였던 이규석이 지은 유허비. 그리고 1976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크게 지은 것을 기념하는 제승당 정화기념비 등.

충무사 사당 앞에서 향을 피우고 참배를 하였다. 군복을 입은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충무공 이순신을 생각한다. 

“장군이시여! 당신이 있었기에 조선이 온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이윽고 사당 안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이순신 영정 왼편에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答持平 玄德升書)’가 적힌 병풍이, 오른편에 ‘송사(宋史)를 읽고’라는 독후감 글씨 병풍이 있다.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는 바로 유명한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은 나라의 보장이 되는 곳입니다. 만약에 호남이 없어지면 곧 나라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편지이다. 
 

한산도

'충무공이순신 전서, 권2'에서 찾은 이 편지의 번역 글을 읽어 보자

현덕승에게 답하는 글월

임금께서 쾌차하심은 신하와 백성들의 즐거움이라 기쁜 마음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난리를 치른 후 그리움 마음이 간절했는데, 뜻밖에 이번 하인 편에 이달 초에 보낸 편지를 받고 바삐 뜯어 읽어보매, 위로 받음이 여느 때보다 더하였습니다. 더구나 종이에 가득 실린 말씀이 정중하기까지 하니 더 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가을바람이 들판으로 불어드는 이때 기거(起居)에 한결 더 조심하시고 계시는지 일일이 다 말씀 여쭐 길이 없습니다. 저는 괴로운 진중(陣中)에 있으면서도 나라의 은혜가 망극하여 지위가 정헌대부에 오르고 보니 너무도 감격스럽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호남은 나라의 보장이 되는 곳입니다. 만약 호남이 없어지면 곧 나라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진을 옮겨 왜적이 움직이는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 

이런 난리 중에서도 옛정을 잊지 않고 멀리까지 위로해 주고, 또 겸하여 여러 가지 선물까지 받으니 모두 다 진중에서는 진귀한 물건 아닌 것이 없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느 날에나 전쟁을 끝내고, 평소처럼 같이 놀고 싶어 하던 정회를 실컷 풀어 볼 수 있을는지요. 막상 편지를 쓰려고 종이 앞에 앉으니 공연히 슬픈 생각만 간절해집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마음이 산란하여 이만 씁니다.

계사(선조 26년, 1593) 7월 16일 

1593년 7월16일이면 이순신이 한산도 두억리로 진을 옮긴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호남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실감한 듯 하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필자는 이 말을 달리 표현하고 싶다. “호남이 없었으면 이순신도 없었으리. 전라좌수영 수군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순신이 한산대첩에서 대승을 할 수 있었으리오.” 

한편 이순신 영정 오른편에는 '송나라 역사를 읽고(讀 宋史)' 한문 병풍이 있다. 이 글은 이순신이 중국 송나라 정승 이강이 금나라의 침공에 대해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일어났는데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정승이 된지 70여일 만에 시골로 내려간 송나라 역사책을 읽고 그 소감을 적은 글이다.

어허! 이때가 어느 때인데 강(송나라 정승 이강을 말함)은 가려는가. 가면 또 어디로 가려는 가. 무릇 신하된 자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길이 없다. 이 때야 말로 종사의 위태로움이 마치 터럭 한 가닥으로 천근을 달아 올림과 같아, 정히 남의 신하된 자로서는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할 때 인데, 간다는 말은 진실로 마음에도 못 담을 말이거늘 하물며 어찌 입 밖으로 낼 수 있으랴. 

만일 내가 강이라면 어떻게 할꼬. 몸을 헐어 피로써 울며 간담을 열어젖히고서 사세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르고는 화친할 도리가 없음을 밝혀 말할 것이요, 그 말이 안 된다면 거기 이어 죽을 것이요, 또 그럴 수도 없다면 우선 화친하려는 계획에 몸을 던지고 이것저것 맞추어가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하면 혹시 만일이라도 나라를 건질 도리가 있게 될 것이거늘, 강은 이런데서 계획을 세우지 않고 그저 가려고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바쳐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까 보냐. 

이제 홍살문을 나와 제승당 뒤편에 있는 한산정으로 간다. 한산정은 활터이다. 난중일기에도 나오듯이 이순신은 활쏘기를 즐겼다. 이순신은 수시로 활쏘기를 하고 부하들과 시합도 하였다. 그런데 활터의 과녁이 바다를 지나 건너편에 있다. 거리가 145미터나 된단다. 이렇게 바다를 두고 멀리 활을 쏘았다니 정말 경악스럽다. 

저녁 배를 타기 위하여 충무공 유적지를 나와 선창가로 향한다. 걸으면서 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이순신과 한산도’ 두 단어이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이순신이 없었다면 한산대첩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오후 6시 30분에 통영으로 돌아오는 카페리호를 탔다. 배에서 다시 한 번 한산 섬 주변을 본다. 이 바다가 바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한산대첩 전쟁터이다. 

한산대첩은 살라미스, 트라팔가 해전과 함께 세계 3대 해전중 하나이다. 살라미스 해전은 BC 480년에 그리스 동맹 해군이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한 해전이고, 트라팔가 해전은 1805년 영국의 넬슨 제독이 프랑스과 스페인 연합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넬슨은 이 해전에서 총탄에 맞아 죽는다. 이순신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 이순신이 한산대첩에서 승리한 요인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이유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지피지기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손자병법의 전략이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이 백병전에 강하고 원거리 전투에는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반면에 조선수군은 배와 대포는 우수하나 근접전에는 약하고 병력도 얼마 안 되는 약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 하면서 왜적을 격파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 한산대첩에서는 자만한 일본 수군 맹장 와키자카의 마음을 읽고 멀리 견내량에서부터 도망가는 작전을 구사하였고, 한산도의 넒고 깊은 바다에서 돌연히 학익진을 펴면서 일시에 대포 공격과 거북선의 속공전을 퍼부어 승부를 조기에 종결지었다. 그리하여 와키자카 함대는 불과 2-3시간 만에 궤멸되었다. 일본 수군은 족히 3천명은 죽었을 것인데 조선 수군은 10명 정도의 희생자이었다.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전라 좌수영 수군의 역할이다. 이순신이 선조 임금에게 보고하는 장계에서 자세히 썼듯이 휘하의 참모와 수군들은 정말 잘 싸웠다. 이 장계에는 순천부사 권준, 광양현감 어영담, 사도 첨사 김완, 흥양현감 배흥립,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낙안군수 신호, 녹도만호 정운, 좌돌격장(거북선 돌격대장) 이기남, 우돌격장 박이량, 좌도별장 윤사공, 우별도장 송응민, 여도권관 김인영, 발포만호 황정록등 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참모들 이름이 일일이 적혀 있다. 또한 전사자와 부상자 이름이 한 사람 한 사람 적혀 있다. 

이렇게 이순신은 지도자답게 부하의 공을 치하하고 희생자에 대한 예우를 정성껏 하고 있다. 

이 한산대첩으로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패전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앞으로는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고 해안에 성을 쌓고 수비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국의 역사학자 헐버트는 한산대첩을 히데요시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해전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한산해전을 살라미스 해전에 비유하면서, 그리스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페르시아에게 정복되지 않았듯이 한산대첩이 조선을 구하였다는 것이다. 

한산대첩은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전투였다. 이순신이 바다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일본 수군의 전라도 진출이 봉쇄당하였다. 한편 육지에서도 7월 7일의 웅치 전투, 7월 8일과 9일의 이치 전투, 7월10일의 금산전투로 왜군의 전라도 점령이 무산되었다. 따라서 호남은 온전할 수 있었고, 나라의 보장이 된 것이다. 호남국가지보장 (湖南國家之保障).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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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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