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q3olCS , http://blog.daum.net/kkt1594/16144046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8] 고령가야국
삼한시대 상주 육상교통 요충지
신라에 의해 254년경 멸망 추정…함창읍 일대 유적 산재
사진·글=임호기자  2007-05-10 07:52:30 

고령가야 위치 

◇고령가야국이란

경상도라는 명칭은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만큼 상주는 예로부터 큰 고을이었다. 2000년전 상주에는 지금의 사벌면을 중심으로 왕국을 건설한 사벌국과 함창읍과 문경일대를 호령한 고령가야국이 자리했다. 이 두 나라는 삼한시대 한반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 중 하나인 공검지를 사이에 두고, 물적·인적 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가야국의 멸망시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태조왕이 건국해 115년간 재위했고, 2대 마종왕은 병신년(서기 156년)에 즉위해 65년간, 3대 이현왕은 경자년(220년)에 즉위해 35년간 재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254년 7월 신라 첨해왕의 침공으로 멸망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신라 벌휴왕 2년(185년) 8월에 벌휴왕이 장수를 보내 고령가야국을 멸망시켜 144년간 존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령가야국과 사벌국은 신라에 의해 멸망됐고, 고령가야국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사벌국을 통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사벌국의 멸망(249년) 후인 254년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당시 고령가야국의 영역은 지금의 상주시 함창읍·공검면·이안면, 문경시 점촌동·가은읍·농암면·마성면 지역으로 남북 20㎞, 동서 10㎞, 전체 면적은 720㎢ 정도로 추정된다. 

◇ 고령가야국 왕은 알에서 나왔다?

'후한의 광무제(BC 42년) 때 가락(지금의 김해)의 9락(落) 9간(干)이 무리를 이끌고 구지봉(龜旨峰 : 김해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 6개의 알이 든 금합자를 하늘에서 내려받았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에 안치해 두었더니 다음날 새벽 알에서 잘 생긴 6명의 아이가 나왔다. 열흘이 지나자 어른이 되어, 그 중 알에서 가장 먼저 나온 아이의 호를 수로, 성을 김이라 한 후 금관가야(지금의 김해)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다섯 명의 아이들도 각각 아라가야(함안), 대가야(고령), 소가야(고성), 고령가야(함창), 성산가야(성주)의 임금이 되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중

1. 흔적을 찾아 오봉산을 오르다

상주시내에서 승용차로 30분을 달려 함창읍 신흥리와 공검면 역곡리 사이의 오봉산을 찾았다. 이 산 정상부(해발 238m) 남동쪽 줄기에는 남산고성(南山古城)이 있다. 남산고성은 고령가야국의 왕궁터가 있던 곳으로, 이후에도 육상교통 요충지를 관할하는 역할을 하며 조선시대까지 이용됐다. 

하지만 산 아래 국도에서 정상부근까지 이미 콘크리트 농도가 놓여 있고, 성이 위치했던 산 정상부에는 배·고추·대파 등 고랭지 밭이 있다. 이런 곳에 뭐가 남아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산 정상부에서 내려다본 절경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황홀했다. 산 아래로 광활한 함창평야와 이안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둘러본 고대왕국 토성이 그러했듯 남산고성도 뒤로는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강과 곡창지대가 펼쳐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이상적인 배치도가 그려졌다. 성 안 서쪽 봉우리에는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봉수대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다.


고령가야국의 중심지인 상주시 함창읍 일대. 고령가야 왕비릉 너머로 당시 주거지로 추정되는 증촌리와 곡창지대인 함창평야, 이안천, 군사적 요충지였던 오봉산 남산고성이 보인다.  

2. 성곽 잔재 발견, 古城은 실재했다

남산고성의 성곽 대부분은 사라진 상태지만 남은 흔적만으로도 1천206m의 외성과 940m 규모의 내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른 머리만한 돌을 평평하게 다듬어 흙과 함께 정교하게 쌓아 올린 10여m 높이의 성벽도 발견됐다. 놀라운 것은 내성 주변에는 돌도끼 등 석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 조각과 토기 파편들이 널려 있다. 

대부분은 고려·조선시대의 기와·도자기 파편이었지만 물결무늬 등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파편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남산고성주변을 고고학적으로 조사한다면 더 많은 유물과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주시청 직원 김상호씨가 남산고성을 설명하고 있다. 

 
3. 드넓던 함창평야는 오간데 없고

이번엔 함창평야를 활용, 농업국가로 성장한 고령가야국의 흔적을 찾아 상주시 함창읍 공검지를 찾았다. 이곳은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 축조된 3대 저수지 중 하나다.

당시 공검지는 둘레가 8.56㎞로 추정되는 엄청난 크기였지만 현재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저수지 대부분이 고려·조선시대, 근대에 들어오면서 논·밭으로 개간되어 지금은 2천평도 채 남지 않은 상태다. 2005년 상주시가 경북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했지만 어떤 유물도 발견하지 못해, 정확한 축조연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4. 유적 발굴·조사, 정부 지원

함창읍 증촌리의 조용한 시골마을에서도 고령가야국의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입구 골목길로 들어서면 높이 3m, 폭 15m 전고령가야왕릉(傳古寧伽倻王陵)이 있다. 

또 이곳에서 동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엔 비슷한 규모의 왕비릉이 위치해 있다. 왕릉의 명칭에 나타나듯 고령가야왕릉은 정사에 기록이 없어 누구의 묘인지 추정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증촌리 진입로 오른편 밭에는 청동기 시대 제작된 고분으로 추정되는 '증촌리 입석'도 위치해 있다. 상주시청 김상호 담당은 "상주시 함창읍 일대에는 고령가야국의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이를 발굴·조사할 수 있다면 한민족의 역사정립뿐만 아니라 지역 관광산업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