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28150029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9>제21대 문자명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258)"에서 따로 떼어 옮겼습니다.

대성산성과 안학궁

<대성산성 전경. 고려의 왕궁을 보호하는 방어용산성이었다. 소문봉 정자가 보인다.>

 

우리가 '평양' 하면 평양성, 지금 평양 시가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장수왕이 국내성을 떠나 새로이 만든 평양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 시가에서도 교외에 해당하는 안학궁,

그리고 그 위의 대성산성에 있었다. 장수왕이 열었던 평양의 수도는 여러 모로 국내성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평상시 전쟁이 없을 때 거처하는 평지성과 전쟁시 방어용으로 쓰기 위한 산성이 분리된 형태.

동명성왕 때부터 내려온 고려의 독특한 방어체계다.

 

대성산성은 높이가 274m 되는 야트막한 산이다.

북쪽으로는 산줄기를 따라 압록강과 국내성으로, 남쪽으로는 대동강을 넘어 묘향산 줄기로 이어진다.

서울의 북한산이나 경주의 토함산에 비견되는 평양의 주산(主山)임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턱없이 낮다.

풍수지리상 평양이 서울에 비해 인재가 적게 나왔던 이유가 그 주산의 힘이 차이가 나서 그랬다고 했다던가.

분화구처럼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있고 동서 남북으로 빙 둘러있는

장수봉, 을지봉, 소문봉, 주작봉 같은 봉우리를 성벽으로 연결해서 성을 쌓았다.

자연지형을 절묘하게 이용해 성벽을 쌓는 것은 고려인들만의 축성 기술이다.

 

이렇게 낮은 대성산이지만 대동강 주변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기에,

산 위로 올라가면 그 일대 들판은 전부 내려다보인다. 심지어 장수왕의 대궐이었던 안학궁까지도.

이곳에 고려인들은 길이 7km(주작봉에서 소문봉 사이의 이중 성벽이나

국사봉의 삼중성벽같은 겹성 둘레까지 합치면 9km)에 달하는 산성을 쌓았다.

서울에 있는 남한산성하고 거의 비슷한 규모인데, 직선거리는 동서로 2.3km이고

남북이 1.7km. 20개나 되는 성문 중에는 남문처럼 항상 쓰는 출입문 말고도

전시 때에만 쓰던 비밀문 즉 암문도 있다.

 

오늘날 대성산은 평양 사람들의 큰 유원지이면서 성지로 개발되어 있는데,

대성산성의 표기는 책마다 다 다르다. 대성의 '성' 자를 '이룰 성(成)' 또는 '재 성(城)',

'성스러울 성(聖)'자로 적어놓은 것도 있다. 성 안에 평양중앙동물원이나 식물원, 어린이 놀이터도 있고,

대성산류희장이나 혁명렬사릉 같은 곳도 대성산 구역 안에 모두 모였다.

 

산성 안에는 연못이 꽤 많이 있다. 1958년에 대성산성을 발굴할 때 연못 있던 자리가 모두 170군데 확인이 됐는데,

그 중에는 지금 호수로 개발돼서 유원지로 쓰이는 곳도 있고,

이름도 동천호, 미천호, 장수못 하는 식으로 고려 왕의 이름을 빌린 곳이나

관련전설을 갖고 잉어못이니 사슴못이니 하는 이름을 붙인 곳도 있다.

모두가 전쟁 때에는 풍부한 수자원 구실을 했다나.

하긴 사람이 밥 없이는 이레 정도 버틸 수 있어도 물이 없이는 사흘도 못 버틴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물인 거다.


<안학궁터. 고구려의 왕궁터로 알려져 있다.>

 

대성산성 바로 아래에 안학궁터가 있다. 넓이 38만㎥에 달하는 거대한 고려의 궁전.

총건평이 3만 1천 평방미터가 넘는다던가. 대성산의 생김새가 학이 편안하게 쉬고 있는 형세라고 해서

안학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인데 모두 스물 한 채의 건물터와 서른 한 채의 회랑이 확인되었다.

남북을 중심축으로 해서 좌우로 하나, 앞뒤로 세 개씩 건축군을 이룬 방대한 규모다.

 

그리고 안학궁에서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로 따라가다 보면, 동명왕의 묘가 나온다.

평양으로 천도했을 때 고려가 졸본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데,

1993년에 개건(改建)해서 지금에 이른다. 고려인들은 평양성보다 이곳 대성산성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안학궁 건물 복원 모형>

 

대성산성의 수비방향은 남쪽, 바로 이 안학궁이 있는 방향을 향하고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는 천연의 절벽, 그리고 북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진 산자락.

북방에서 살다가 남쪽으로 이주해온 뒤에도 고려는 옛날의 습속을 버리지 않았다.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을 구분해서 쓰던 졸본시대와 국내성시대의 전통을 평양에서도 그대로 구현해서,

평시에는 안학궁을 중심으로 한 평야에서 살다가 전시에는 장대한 대성산성 안으로 들어가서 방어한다.

이것이 고려 전기 방어체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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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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