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00305&artid=200910271724005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12) 드넓은 내몽골 초원을 누비며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4-22 15:02:29ㅣ수정 : 2009-08-19 11:36:06

강성대국 일군 광개토왕 기개 거칠것이 없어라

중국학자들의 견해를 분석해 보면, 시라무렌강을 중심으로 대흥안령과 그 이서의 몽골초원에서 활약한 거란 부족에 대한 광개토왕의 정벌은 인정하면서도, 고구려의 서경은 요동반도에 한정시키는 모순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타르 일가족이 살았던 바오.

어제 대흥안령을 넘는 고행의 여독을 말끔히 날려 보낸 듯, 다들 일찍이 일어나 늦가을 초원의 맑고 시원한 아침을 만끽한다. 문뜩 ‘천고마비’(天高馬肥)란 고사성어가 뇌리에 떠오른다. 그 옛날 당나라 시인 두보의 할아버지가 흉노와의 싸움에 출정하는 친구에게 써준 시 한 편 속에 나오는 ‘가을 하늘 높으니 변방의 말 살찌네’(秋高塞馬肥)란 구절이 이렇게 ‘천고마비’로 와전된 것이다. 초원에 사는 흉노인들이 말을 살찌워서는 이맘 때가 되면 겨울 채비를 위해 노략질을 일삼는 것을 빗대어 읊은 것인데, 말도 많이 기르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가을이라는 계절의 상징어가 된 것은 이상야릇한 일이다.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설프게 받아들여 마구 써대는 이런 유의 말들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들렀다고 자랑하는 우리야스타이 빈관(호텔)을 나서니 하늘 땅 빛깔이나 거리 표정부터가 같은 내몽골에 속한다는 대흥안령 저쪽과는 판판 다르다. 하늘은 더 높고 푸르며 사방은 막힘없이 탁 트여 있다. 바람도 거침없다. 몽골 전통복 차림의 젊은이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몽골식 돔형 지붕도 즐비하다. 한화(漢化)와 현대화의 이중 충격 속에서 그나마도 전통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부터 참 몽골과 대면하게 되었으니, 그만큼 알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우리가 흔히 쓰는 ‘몽고(蒙古)’라는 한자말은 ‘몽골’이란 원음의 한자 음사다. ‘몽골’의 어원에 관해서는 몽골어의 ‘은’(銀)이나 ‘순박’ ‘영존’(永存)’ ‘용감’ ‘영생하는 부락’ 등이라는 각이한 주장들이 갑론을박하고 있다. 당나라 때부터 나타나는 한자 음사어 ‘몽고’도 그 음사법이 <구당서>의 ‘몽올(蒙兀)’로부터 시작해 ‘맹골자(萌骨子)’ ‘몽고사(蒙古斯)’ ‘망활륵(忙豁勒)’ ‘몽고리(蒙古里)’ ‘맹고(萌古)’ ‘몽고(蒙古)’ 등 20여 가지나 된다. 몽골족의 족원에 관해서도 언어학적 비교에 의한 흉노설, 승냥이 전설에 따른 돌궐설, 불교적 전설에 바탕을 둔 토번(티베트)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동호설 등 여러 설이 있는데, 지금은 동호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즉 동호계에 속하는 실위(室偉)의 20여 부족 중 하나인 몽올이 그 시조라는 것이며, 본향은 아무르강(헤이룽강) 중류 일원인데, 후일 대흥안령을 넘어 오늘의 내·외몽골로 서천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흥안령을 넘어 불원천리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고구려의 서경을 현장에서 확인함으로써 지워졌던 고구려의 옛 위상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우리는 전편에서 장수왕이 이곳 디더우위(地豆于, 오늘의 우주무친치)를 분할 통치함으로써 고구려의 서경이 여기까지였음을 밝힌 바가 있다. 이러한 사실(史實) 말고도 또 하나의 사실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논란도 많은 그 유명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文)’(약칭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는 염수(鹽水)다. 그 염수가 이곳에 있는 어지나오얼(額吉淖爾) 염호(鹽湖)라는 일설이 있어 일찍부터 학계의 관심을 끌었으나, 이렇다 할 연구 결과는 없다. 그래서 그곳 답사를 기획한 것이다.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는 ‘염수’(鹽水)로 추정되는 어지나오얼(額吉淖爾) 염호.

우리야스타이에서 시원한 초원의 아침 공기를 가르며 서남 방향으로 무연한 초원길을 35㎞쯤 달리니 ‘염장’(鹽場, 소금밭)이란 표지판이 나타난다. 여기서 길을 우측으로 꺾어 12㎞ 더 가니 드디어 어지나오얼이란 염호가 나타난다. 멀리서부터 벌써 염기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염호 인근에는 몇 개의 작은 마을이 널려 있으며, 염호가에는 소금 가공공장의 굴뚝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소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하적장에서는 대형 트럭들이 분주히 오간다. 면적이 25㎢에 달하는 염호는 몽땅 염전으로 이용되어 연간 8만여t의 소금을 생산한다고 한다. 대부분 식용으로 쓰이고 일부만 공업용으로 사용된다. 주로 인근 마을에서 채용하는 5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한다고 하니 염전치고는 꽤 큰 규모다. 갓 물을 댄 논밭처럼 물결이 찰랑거리는 소금밭은 눈이 모자라도록 아득한 수평을 이루고 있다. 군데군데 논도랑 같은 물길이 가로·세로로 깊숙이 파여 있다. 맛을 보니 혓바닥이 짜릿할 정도로 염도가 높다. 신기하게도 그 짠 물속에서 이름 모를 불그스레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짜면 짠 대로 자연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식물의 강한 순화력(馴化力)을 말해주는 일례다. 이곳 말고도 내몽골 일원에는 여러 개의 염호가 널려 있다. 이것은 그 옛날 이곳이 바다였음을 말해준다.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는 ‘염수’가 이 염호일 개연성은 있지만, 그 연구는 아직껏 오리무중이다. 이 비문은 크게 추모왕에서 광개토왕까지의 세보(世譜)와 대왕의 대외 정복사업, 그리고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들의 역할 등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구려의 독창적인 천하관을 담고 있는 이 비문과 관련해서는 끊어 읽기와 문자서법, 빈 글자의 복원, 본문의 판독과 주석, 비문의 진위, 탁본의 유전 등 많은 문제에서 논란이 분분하며 불확실하거나 해명되지 못한 점도 적잖다. 이 글과 관련된 내용은 둘째 부분, 즉 대왕의 혁혁한 정복사업에 관한 무훈기사인데, 주목되는 것은 그중에서도 중국에 대한 서정(西征)을 맨 먼저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이 서정을 무훈의 첫 자리에 놓을 정도로 중시했다는 뜻이 되겠다. 그 내용은 영락(永樂) 5년(을미년, 395년)에 비려(碑麗)가 ○○○하지 않음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정토에 나섰는 바,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3부락, 600~700영(營)을 쳐부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와 말, 양떼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에서 ‘비려’는 다른 중국 사서에 나오는 ‘비리(裨離)’나 ‘비리(碑離)’ ‘필려이(匹黎爾)’ ‘패려(稗麗)’와 같이 거란 부족이나 고려에 복속되지 않은 다른 예맥 집단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 비문에서 굳이 ‘비려(碑麗)’라고 쓴 것은 그들을 비하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즉 여기서 ‘비’는 비석이고, ‘려’는 잡아맨다는 뜻으로서 상대방 비석에 짐승을 잡아 매놓는다는 것은 그에 대한 비하이고 모욕이 된다. 일리가 있음직한 풀이다. ‘부산(富山)’은 요동 환인(桓因)의 서변에 있는 우모대산(牛毛大山)이고, ‘부산(負山)’에 관해서는 보통 산 이름이라는 설과 ‘산을 따라서’라는 단문이라는 다른 설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부산과 부산 두 산을 지나서”로 해석되고, 후자의 경우는 끊어 읽기로 “부산(富山)을 지나서 그 산을 따라…”로 해석된다. ‘부산(負山)’이 어딘지가 미상인 상황에서 후자의 해석에 신빙성이 간다. ‘염수’는 오늘의 요동 번시(本溪)를 관류하는 타이쯔허(太子河)인데, 이 강의 옛 이름이 ‘연수(衍水)’로서 ‘염’자와 ‘연’자는 동음이의어다. 이상은 대체로 중국학자들의 해석이다. 종합하면, 대왕의 서정은 요동반도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그 서경은 랴오허(遼河) 서쪽 랴오닝성 베이전현(北鎭縣) 경내의 이우뤄산(醫巫閭山)까지라는 것이다.


바타르의 일가족 6명.

이러한 중국학자들의 견해를 분석해 보면, 시라무렌강을 중심으로 대흥안령과 그 이서의 몽골초원에서 활약한 거란 부족에 대한 광개토왕의 정벌은 인정하면서도, 고구려의 서경은 요동반도에 한정시키는 모순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근거로 부산이나 염수 모두를 요동 일원에 소재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사실 ‘염수’를 ‘연수’로 대치시키는 것은 언필칭 견강부회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거란인들의 활동 지역 내에서 ‘염수’로 남아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더러 주장하지만, 그곳이 바로 이 어지뇨얼 염호다. 염호가에 서니 그 옛날 이 드넓은 몽골초원을 누비던 고구려 기마군단의 말발굽 소리가 마냥 귓전을 울리는 것 같다. 이 염호가 어딘가에 그들이 짓부수어버린 그 숱한 영 자리가 있으련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 ‘염호’여, ‘염수’여, 부디 그 옛날의 증언에 인색하지 말아다오”라는 부탁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일찍이 동아시아의 강성대국을 일궈 놓았던 두 성군,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위훈이 깃들어 있는 이 유서 깊은 땅을 누벼보는 후예들의 가슴은 벅찰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이 땅에 관해 더 알고 싶어진다. 두 시간가량 염호를 둘러보고 나서 오던 길을 되돌아 확 트인 초원길에 들어섰다. 일망무제한 실링고르(錫林郭勒) 대초원이 눈앞에 다시 펼쳐진다. 초원은 주로 풀이 자라는 상황에 따라 풀이 약간 자라는 황막초원과 메마른 관목이 성기게 자라는 사지소림(沙地疏林)초원, 키 낮은 풀이 자라는 건조한 전형(典型)초원, 키 큰 풀이 자라는 습윤한 초전(草甸)초원, 수생식물이 자라는 습지초원 등 여러 종류로 나뉜다. 


면적 122만㎢에 동서 너비 2400㎞, 남북 길이 1700㎞, 그리고 평균고도가 해발 1500m나 되는 내몽골자치구 영내에는 동에서 서를 향해 동북부의 습지초원인 홀룬베르(呼倫貝爾)와 커르친(科爾沁), 동부의 초전초원인 실링고르, 중부와 남부의 전형초원인 울란차프(烏蘭察布)와 오르도스(鄂爾多斯), 서부의 황막초원인 아라산(阿拉善) 등 6개의 대초원이 맞붙어 있다. 푸름이나 지형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내몽골은 분명 초원의 세계다. 그곳은 몽골족 삶의 터전이며, 동아시아 유목문명의 요람이다. 그 가운데서 일행이 지금 막 밟고 있는 실링고르(몽골어로 ‘구릉지대의 강’이란 뜻)는 두꺼운 푸른 주단을 깔아놓은 듯 풀이 무성한 내몽골 제1의 대초원이다. 중국의 첫 ‘초지류(草地類)자연보호구’로 지정된 이 초원의 특산물로는 ‘우주무친 말과 양’이 있으며, 이곳은 ‘몽골씨름의 고향’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초원은 인간의 마음도 푸르싱싱하게 만든다. 초원에 접하는 순간, 팍팍한 가슴속의 응어리나 근심 걱정이 일시에 사그라진다. 어느새 여독도 풀린다. 곧게 뻗은 초원길을 1시간쯤 쏜살같이 달리다가 길 오른편 멀리에 아담한 몽골 바오(包)와 함께 붉은 벽돌집 한 채가 눈에 띈다. 초원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기도 하고, 또 육미로 소문난 우주무친 양고기에 식욕도 동한 터라, 무작정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행에서 맛은 곧 멋이며, 멋은 곧 흥이다. 약 1500m쯤 풀밭 길을 헤집고 들어가니 마침 젊은 부부가 살고 있다. 남편은 32세의 바타르(‘영웅’이라는 뜻)이고 처는 27세의 치치거(‘꽃’이라는 뜻)다. 7년 전에 결혼해 다섯 살과 갓 40일이 된 두 딸을 두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바오와 벽돌집이 나란히 있다. 어릴 적 살던 바오는 이제 창고로 쓰이고, 지금은 몇 년 전 그 옆에 지은 벽돌집에서 살고 있지만, 바오가 더 안온하다고 한다. 아직은 문명의 수직이동이라기보다는 공존하는 수평이동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부엌과 침실, 거실이 달린 집안은 꽤 너르고 아담하다. 포동포동한 젖살 얼굴에 홍조가 피어난 아기가 포근한 강보에 싸여 새근거린다. 양 300마리와 낙타 한 마리를 키우고 있으며, 마당에는 경운기와 모터카, 자가용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주인에게 1000위안짜리 양 한 마리를 부탁했다. 바타르는 손전화로 처남을 불러다가 일손을 돕게 하고, 52세의 아버지와 49세의 어머니도 모셔온다. 명성에 걸맞게 고기 맛은 일품이다. 바타르 일가족 6명과 어울려 식사를 하고 나서는 함께 노래 부르고 사진도 찍으며 흥겨운 한때를 보내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염호가에 서니 그 옛날 이 드넓은 몽골초원을 누비던 고구려 기마군단의 말발굽 소리가 마냥 귓전을 울리는 것 같다. 이 염호가 어딘가에 그들이 짓부수어버린 그 숱한 영 자리가 있으련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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