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3041622315&code=900306&med=khan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5)훙산의 비너스상
정수일|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3-04 16:22:31ㅣ수정 : 2009-08-19 11:31:34
동이의 비너스 빼앗길 수 없는 역사
어느덧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츠펑 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훙산 중턱에 있는 정자에 둘러앉은 일행과 훙산문화의 외연성(外延性)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이색적인 여인 나체상인 비너스상, 그리고 우리 고대문화와의 상관성에 모아졌다. 어디를 가나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다들 본능적으로 진지해진다. 그럴 때면 이야기하는 사람도 자연히 흥이 난다.
여인나체상 측면
1979년 늦봄 어느 날, 훙산문화의 중심에 자리한 커줘(喀左)현 둥산주이(東山嘴)에서 대형 석조제단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출토된 유물 중에는 중국에서 처음 보는 흙으로 빚은 여인 나체 소상 2점이 끼여 있어 학계의 큰 주목을 끌었다. 두 점 모두가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가 완전한 형태는 알 수 없다. 잔해의 높이는 각각 5㎝와 5.8㎝이고, 배와 엉덩이가 불쑥 튀어나온 임신부형 환조 조형물로서 제작 연대는 5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발굴에 이어 83년 둥산주이 서쪽 50㎞ 떨어진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시기의 여신묘(女神廟) 한 기와 적석총군 유지가 발견되었다. 이 유지에서 크기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여인 나체 소상 조각들과 함께 여신묘 주실 서쪽에서 사람 키 크기의 채소여신상(彩塑女神像)이 발굴되었다. 머리 부분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이 여신상은 정교한 원조(圓雕)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눈망울은 맑고 짙은 푸른 빛 구슬을 박아 넣어 생기마저 돌아 매우 신기한 감을 준다. 일부 중국 학계에서는 몽골리안 인종으로 추정되는 이 여인을 ‘훙산인들의 여시조’로, ‘중화민족의 공동조상(共祖)’으로 간주하면서 ‘삼황오제’ 전설이 허구가 아닌 실재라는 증거로까지 확대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3점의 여인상과 비슷한 상, 즉 비너스상이라고 하는 여인 나체상이 유라시아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원래 ‘비너스’는 사랑과 미, 풍요를 상징하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인데, 로마 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특정 민족 신화의 틀을 벗어나 여성의 원형으로서 서양 문학과 미술에 자주 등장한다. 독일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 크라나흐가 1532년에 그린 청아하고 신비로운 감각이 돋보이는 불후의 명화 ‘비너스’는 그 전형적인 일례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엽부터 프랑스에서 시베리아 바이칼호에 이르는 19곳에서 약 2만5000년 내지 2만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에 속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크고 작은(3.5~22㎝) 여인 나체상 유물이 발굴됨에 따라 학자들은 이 여인상을 여성의 원형으로 간주해 그 이름을 신화로 전승되어 온 ‘비너스’로 명명했다. 제작 기법은 환조 기법으로 젖가슴과 배, 엉덩이 등 여성적 특징을 나타내는 부분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비너스상의 용도와 의미에 관해서는 사실적 작품, 호신용 부적, 가족이나 종족의 수호신, 그리고 무녀상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엇갈린다. 대별하면, 사실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학계에서는 후자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사회 진화과정에서 여권이 부권에 앞섰으며, 일찍부터 여성(모성)은 숭상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독립적 인간 조형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이 비너스상이 최초의 문명교류 유물이라는 데서 특별한 각광을 받고 있다.
여인나체상 정면
훙산문화에서 발견된 나체 여인상이 형태면에서나 상징성면에서 유라시아 비너스상과 일맥상통하다는 데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 문명론에서는 이렇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유사문명이 생기는 것을 문명의 보편성 현상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런 보편성이 자생적 보편성, 즉 상관성 없이 우연하게 발생한 보편성인가, 아니면 서로의 교류에 의해 생겨난 교류적 보편성인가 하는 것이다. 아직은 연구의 미흡으로 인해 유라시아, 적어도 가까운 바이칼호 부근의 비너스상과 훙산 여인상 사이에 어떤 중간환절(연결고리)을 찾아내지 못함으로써 교류적 보편성 양상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인류학자 모건의 ‘공통심리설’에 의해 자생적 보편문명 현상으로는 설명이 된다. 동일한 발전단계에 이르러 형성되는 유사한 사회환경 속에서는 같은 심리작용이 일어나며, 그 결과 유사한 문명이 창조된다는 그의 설에 의하면 자생적 보편문명 현상으로서의 여인 나체상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멀리 유럽인들과 이러한 자생적 보편성을 공유한 사람들, 즉 훙산의 비너스상을 만들어낸 주역은 과연 누구인가. 그 주역은 중원문화를 창조한 화하족(華夏族)이 아니라 동이족(東夷族)이다. 동이족이라면 우리가 아닌가. 그런데 훙산박물관 해설원의 말대로라면 이 동이족은 중국 산둥 일원에서 발원해 북상한 사람들이며, 우리의 한 조상인 동이나 예맥은 그 후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조 주역에서 우리의 동이를 제외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 면에서 나타나고 있는 우리 고대문화와의 상관성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훙산문화의 공동주역인가, 아니면 그 조역이나 피전파자에 불과한가. 우리 고대사가 이 지역과 얼기설기 얽혀 있었던 점과 이른바 ‘요하문명론’에 우리 겨레의 역사를 함몰시키는 작금의 행태를 감안하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임에 틀림 없다. 우리가 또 한 차례의 본의 아닌 ‘역사전쟁’ ‘문화전쟁’을 불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뉴허량 여신상
사실 이러한 상관성은 선사시대부터 전개되어 온 역사과정에서 확증되고 있다. 몇 가지 사실만을 들어보자. 우선 암각화의 상관성이다. 한반도의 경우 71년 경북 울산 천전리에서 암각화가 처음 발견된 이래 20여 곳에서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주로 경북을 비롯한 남부지역에서 발견되고 중부와 북부지역에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어서 한반도 암각화의 기원이나 계통이 오리무중이었다. 그 기원을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이나 몽골 초원에서 찾으려고 했으나, ‘한국형 암각화’라고 하는 방패 모양 등 기하학무늬의 암각화가 그곳에서는 나오지 않아 그 시도는 낙착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최근(2007년) 훙산문화에 속하는 츠펑시의 츠자잉쯔(遲家營子)와 상지팡잉쯔(上機房營子) 등지에서 유사 암각화가 발견됨으로써 한국 암각화의 계통문제가 해명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역시 츠펑시에 속해 있는 아오한(敖漢)기의 쓰자쯔(四家子)진에 있는 차오마오산(草帽山, 초모로 만든 산, 즉 삿갓산) 뒤편에서 2006년 6월 5500년 전의 제사터나 묘터인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서 얇고 넓죽한 돌로 위를 덮은 석관이 여러 구 나왔는데, 집안의 고구려 장군총이나 경주의 신라고분 같은 적석총과는 동형의 유물이다.
시기적으로 적석총에 앞선 빗살무늬 토기도 발견되었다. 아시다시피 빗살무늬 토기는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토기로서 그 유물이 약 60군데에서 나왔으며, 그 제작 연대는 기원전 6000~30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한국 빗살무늬 토기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아 북방 유라시아 빗살무늬 토기대(帶)에 속하며, 시베리아를 거쳐 전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싱룽와 유적을 비롯한 요하 일대 신석기 유적에서도 지자(之字) 무늬의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이러한 토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중원문화와 훙산문화를 구별해 주는 또 하나의 뚜렷한 증거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빗살무늬 토기대의 동단을 이루고 있음을 시사한다.
훙산문화의 큰 자랑거리의 하나가 옥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8000년 전) 썼다는 것인데, 대표적 유물은 싱룽와 유적에서 출토된 옥결(玉, 옥 귀걸이)로서 지금은 츠펑시의 상징물이 되고 있다. 싱룽와문화보다 조금 뒤진 차하이문화 유적에서도 귀걸이, 관옥, 구슬을 비롯한 20여점의 옥이 나왔다. 그런데 최근 한반도 중부인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와 전남 여수 안도패총에서도 형태뿐만 아니라, 연대도 7000~6000년 전으로 비슷한 옥 귀걸이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훙산 옥기에는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여러 점 있고, 제단터에서는 희생된 곰 아래턱뼈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상징인 곰 토템과의 연관성을 추측케 한다. 고조선의 영역을 다링하(大凌河) 유역 내지는 그 너머까지로 본다면, 두 지역 간, 두 문화 간의 소통이나 교류에 의해 이루어진 이러한 연관성이나 공유성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훙산 옥의 원산지가 자고로 한반도에로의 교통 요지에 자리한 선양 남방의 수암(岫岩)이라는 사실은 문암리나 안도패총 옥의 원류나 산지를 추적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발렌도르프상
우리의 고대문화와 중국 동북지방, 특히 랴오닝 지역 문화와의 관계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돌멘(고인돌, 지석) 문화다. 동북지방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서북 규슈(九州) 지방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돌멘을 비롯한 거석유물이 적잖게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 지역을 ‘동북아시아 돌멘권’이란 하나의 거석문화 분포권으로 묶는다. 이 분포권에서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도 절대적으로 많아 명실상부한 이 돌멘권의 주역이다. 두 지역 문화의 상관성은 단순한 문화의 전이가 아니라, 창의적인 접변(接變) 현상이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일례를 치(雉, 담)를 갖춘 고구려의 석성(石城)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반 석성은 초기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샤자뎬(夏家店)하층문화(기원전 2000~1500)에서부터 축조되었지만, 고구려 시대에 이르면 치를 갖춘 석성으로 변모하게 된다. 일행은 훙산문화 영내를 답사하면서 이러한 고구려식 석성을 여러 곳에서 발견했다. 보편 속에서 나름의 개성을 살려나간 고구려인들의 슬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제일’이니, ‘시원’이니 하는 규정어가 붙은 훙산문화의 몇몇 현장을 돌아보고 난 필자의 뇌리에는 여러 가지 착잡한 사색이 꼬리를 물고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때로는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뒤틀리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냉철한 학문적 사색이다. 학문은 구두선이 아니며, 역사는 상표가 아니다. 역사의 진실을 100분의 1도 채 알지 못하는 인간이 최상급 표현을 써가면서 하나만을 내세우는 ‘문명중심주의’나 ‘문명단원(單元)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며 편단이다. 수백만년의 인류 진화사에서 보면 훙산인은 애당초 애송이에 불과하다. 인류의 조상을 낳아 키운 아프리카에서 훙산문화보다 더 이른 문화가 안 나온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제 이론 실천적으로 명증된 문명보편주의나 문명다원(多元)주의로 들떠있는 갖가지 유설들을 잠재워야 할 것이다. 이럴 때 비로소 ‘열린 민족주의’를 운운하면서 이른바 ‘요하문명’이니 ‘동북아 문화공동체’니 하는 침소봉대식 억지사변도 극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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