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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30>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⑥ 鮮卑문화의 영향
국제신문 입력: 2003.05.22 20:48 박창희기자 chpark@kookje.co.kr  

한때 북방초원에서 역동적 기마문화를 낳았던 말들이 지금은 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아직도 말이 큰 일꾼이다.
 
준수하게 생긴 말이 쟁기를 끌고 있다. 매를 맞으면서도 고분고분하다. 야성을 잃어버린 듯한 새까만 눈빛-.

“옛날 같으면 이 만주벌을 거침없이 뛰어다녔을테죠. 신세가 바뀌어 이제는 일을 해야 먹고 살아요.”

동행중인 중국 조선족 운전수 이정화(47)씨의 말이다. 그는 “중국 동북에서는 아직도 말이 일꾼이다. 여기선 한국돈으로 몇 십만원이면 말을 산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오전, 취재진은 지린성(吉林省)과 랴오닝성(遼寧省)의 남쪽 경계지점인 신빈(新賓)에서 ‘일하는 말’을 가까이서 살필 수 있었다.

쟁기를 끄는 말은 모두 2두1조였다. 제각기 입가리개를 하고 고삐와 굴레, 가슴걸이 같은 ‘말갖춤’을 했다. 견인저항이 버거운지, 말들은 이랑 끝에서 반전(反轉)을 할때 ‘히힝-’하며 콧김을 뿜었다.

이 말들의 고향은 필시 북방 초원지대일 것이다. 북방의 이민족사를 들춰보면 말의 거친 숨소리가 배어난다. 흉노(匈奴), 오환(烏桓), 선비(鮮卑) 등 기마유목민족들이 초원에 새긴 역동적인 역사 탓이다. 이들 종족은 말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부여와 고구려도 연원을 따지면 기마민족의 후예다. 이뿐인가, 신라와 가야는 어떻고.

랴오허에 흐르는 한국사

이튿날, 취재진은 랴오닝성의 선양(沈陽)에서 역사도시인 차오양(朝陽)으로 차를 몰았다. 차오양은 북방과 중원을 잇는 랴오시(遼西) 지방의 요충지다.

랴오허(遼河) 중류의 장황지대교를 지날 무렵, 창춘(長春)의 동북아역사문화연구소 이종수 소장은 고조선에 대해 잠시 설명했다. “논란이 있지만 다릉허(大凌河)와 랴오허 일대는 동이권, 고조선의 세력권입니다. 이를 말해주는 유물도 꽤 있습니다.”

랴오허는 북방의 한민족사를 더듬을 때 반드시 만나는 강이다. 비파형 동검을 만들었던 고조선의 근거지이며, 고구려가 후연 등과 쟁패하던 곳이 이 강의 중·하류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중국 동북평원은 남과 서로 병풍같은 장대한 산맥들을 거느리고 있다. 서쪽의 다싱안링(大興安嶺) 산맥과 남쪽의 창바이(長白)산맥이다. 두 병풍 산맥이 남쪽과 서쪽을 향해 달리다 한군데로 수렴되는 끝자락에서 다싱안링의 시랴오허(西遼河), 창바이의 둥랴오허(東遼河)가 각각 발원한다. 이 물줄기들은 남쪽으로 수천리를 흘러 하나의 랴오허가 되어 발해만으로 들어간다.

인구 29만명의 차오양은 선비족이 세운 후연(後燕)의 수도다. 현지의 연도(燕都·연의 수도)라는 말이 암시하듯 시내에는 연나라의 자취가 많다. 도심에 우뚝 서있는 높이 42m의 북탑은 3연(燕)시대(349~436년)에 세워진 것이다.

차오양시 주변에서는 근래 유적 발굴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 중 상당수 무덤이 선비(鮮卑) 계열이다. 시내 동쪽을 흐르는 다링허 유역의 벌판에는 4세기 중반 선비족의 족적을 간직한 무덤 수백기가 흩어져 있다.

선비가 누구던가. 단순히 ‘북방 오랑캐’로 알았다면 오산이다. 3~4세기 격동의 동북아에서 이들 만큼 역동적인 삶을 산 종족은 찾기 어렵다. 3세기말 모용선비(慕容鮮卑)는 차오양에 도읍을 정하고 전연·후연·북연 즉 3연을 세웠고, 탁발선비(拓跋鮮卑)는 혼란한 5호16국시대(304~439년)를 평정, 북위(北魏)를 열었다.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의 선비족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들. 선비 무덤에 부장된 마구류 및 장신구 등은 고구려, 신라, 가야에서 출토되는 것의 기원을 따져보게 한다.

선비무덤을 집중 연구해온 충남대 박양진(고고학) 교수는 “선비족 묘제는 토광묘→석곽묘→석실묘 식의 변화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백제 가야 등지의 수혈식→횡혈식 묘제 변천과 유사성을 갖는다.”면서 “특히 4세기 중엽부터 선비 무덤에 부장되는 각종 마구류(馬具類)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야문화에 투영된 鮮卑色

변화의 핵심은 역시 말과 마구다. 지난 1988년 차오양시 인근 십이대자(十二臺子)에서 발굴된 선비족의 철제 말투구는 고대 동북아의 비밀 하나를 푸는 실마리가 됐다. 전연시대(349~370년) 선비족이 만든 것으로 밝혀진 이 말투구는 중국에서 처음 확인된 것으로, 시기적으로 가야보다 다소 빠르다고 한다.

비슷한 형태의 철제 말투구가 가야(부산 복천고분, 합천 옥전고분)와 일본 열도에서 시차를 두고 발견된 것은 어떤 의미일까. 랴오닝성(요녕성)박물관 마청(馬靑·34) 연구원은 “형태적 유사성으로 보아 문화전파의 관점을 중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학자 에가미 나미오(작고)의 ‘기마민족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선비문화가 어떤 경로로 한반도에 유입됐는지는 국내에서도 논란거리다. 일반적으로는 고구려→신라→가야로 전해졌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동국대 강현숙(고고미술사학) 교수는 “서기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이 선비문화 전파의 계기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의 마구는 백제를 거쳐 유입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4세기 중엽 이후 가야와 신라 고분에서 나온 마구와 무구, 금속제 장신구에 ‘선비 색채’가 가미돼 있고, 그것이 가야사회의 성장배경이 됐다는 것은 자연스런 추론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곧 가야문화의 원류일까.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가야문화는 넓게보면 고조선의 영향이 드리워져 있고, 좁게는 4세기대 선비와의 교류·전파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야사회 자체의자생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취재진은 차오양을 빠져나와 다시 랴오허를 건넜다. 랴오허에 깃든 고대사의 비밀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변의 평원에는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박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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